장흥문화원

■2018 ‘장흥전통인문학문화강좌’-장흥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글-이경엽(목포대학교)

 

 

 

 

 

1. 장흥 고싸움줄당기기를 주목하는 이유
2. 장흥 고싸움줄당기기의 진행과정
3. 다른 지역 사례와의 비교와 특징

 

1. 장흥 고싸움줄당기기를 주목하는 이유

줄다리기가 2015년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이에 대한 관심이 확대되었다. 당시 한국·베트남·캄보디아·필리핀 등 아태지역 4개국 줄다리기가 공동등재될 때, 관련 국가들이 협력해서 준비한 점과 벼농사문화권의 대표적인 전통문화라는 점이 주목받았다. (유네스코 제10차 무형유산보호협약 정부간위원회(나미비아 빈트후크, 2015.11.30~12.4)에서 한국, 베트남, 캄보디아, 필리핀이 공동등재 신청한 '줄다리기'(Tugging rituals and games)를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이와 관련해서 문화재청에서는 “위원국들이 아시아·태평양 지역 4개국이 협력하여 공동 등재로 진행한 점과 풍농을 기원하며 벼농사 문화권에서 행해진 대표적인 전통문화로서 줄다리기의 무형유산적 가치 등을 높이 평가했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공동등재된 한국의 줄다리기에는 영산줄다리기(국가무형문화재 제26호)․기지시줄다리기(국가무형문화재 제75호)와 삼척기줄다리기(강원도 무형문화재), 감내게줄당기기․의령큰줄땡기기․남해선구줄끗기(이상 경남도 무형문화재) 등이 포함됐다. 인류무형유산 등재를 전후해서 관련 지자체와 정부에서 국제학술회의를 비롯한 각종 행사를 의욕적으로 추진했으며, 등재 이후에는 줄다리기축제의 글로벌화를 기획하고 사회적 이슈와 관련된 행사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기지시줄다리기 홈페이지(http://www.gijisi.com/)

줄다리기가 공동등재된 이후 다른 나라 줄다리기에 대한 관심도 늘어났다. 한편 줄다리기 관련 연구를 되짚어보면 외국 줄다리기와의 비교는 공동등재 문제와 별개로 이른 시기부터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최인학, 「줄다리기에 관하여 <한일비교연구의 일고찰>」, 『한국민속학』6, 민속학회, 1973., 송화섭,「동아시아권에서 줄다리기의 발생과 전개」, 『비교민속학』38, 비교민속학회, 2009., 지춘상, 「한국과 오키나와 줄다리기의 성희성」, 『동아시아 민속학』, 민속원, 2010.)
여기에서 특기할 점은 한국 줄다리기의 구체적인 사례로 장흥 줄다리기가 거론되었다는 사실이다. 지춘상 교수는 1970년부터 장흥줄다리기(1970년 제1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장흥 보름줄다리기’라는 이름으로 출연했다. 전년도 대회에서 ‘광산고싸움’이 대통령상을 수상한 까닭에 전남에서 연이어 큰 상을 받는 게 부적절하다는 의견에 밀려 2등상인 국무총리상을 수상했지만 큰 관심을 끌었다고 한다. 이렇듯 장흥 고싸움줄당기기가 알려지면서 장흥이 줄다리기의 ‘본향’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의 색다른 면모를 학계에 소개한 바 있고(지춘상, 「전남의 민속놀이에 관한 조사연구(1)-줄다리기를 중심으로-」, 『호남문화연구』5, 호남문화연구소, 1973., 지춘상, 「줄다리기와 고싸움놀이에 관한 연구」,『민속놀이와 민중의식』, 집문당, 1996.)
오키나와 줄다리기와 상세하게 비교하고 특징을 살핀 적이 있다.(지춘상, 「한국과 오키나와 줄다리기의 성희성」, 『동아시아 민속학』, 민속원, 2010.)

이처럼 장흥의 줄다리기는 비교적 이른 시기 주목받았지만, 정작 근래의 유네스코 관련 논의에서는 관심 밖에 놓여 있으며 외부에서는 그 존재마저 모르는 경우가 있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까닭에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장흥 고싸움줄당기기는 오래되고 특별한 무형유산이다. 글쓴이와 양기수 등이 학술조사를 하고 흩어져 있던 여러 자료들을 정리하고 분석한 뒤 단행본을 발간한 바 있다.(이경엽․양기수․이옥희, 『장흥고싸움줄당기기』, 장흥문화원, 2014.)
장흥 고싸움줄당기기는 고을축제의 전통을 잇고 있는 공동체놀이로서 남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 그것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계승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장흥 고싸움줄당기기는 현재도 연행되고 있지만 안정적인 전승기반을 갖추고 있지 못한 까닭에 앞으로의 계승을 위해서는 새롭게 전승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 장흥 고싸움줄당기기를 색다르게 주목하고 지역사회의 관심을 촉구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장흥 고싸움줄당기기’란 명칭에 대해 설명해둘 필요가 있다. 장흥에서는 예전부터 ‘고쌈’ 또는 ‘고싸움’, ‘고줄쌈’, ‘고줄놀이’란 말을 사용해왔고, ‘고줄 고향 장흥’이란 표현도 써왔다. 또한 ‘줄당긴다’, ‘줄땡긴다’란 말도 사용해왔다. 이 명칭들에는 고를 갖고 싸우거나 줄을 당기며 논다는 뜻이 담겨 있다. 또한 ‘고+줄’이란 말에서 보듯이 고싸움과 줄다리기가 별개가 아니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널리 알려진 대로 고싸움과 줄다리기는 놀이 방식이나 원리가 다르므로 구분된다. 대표적인 사례로 광주칠석고싸움의 경우 고싸움과 줄다리기는 완전히 구분된다. 그러나 장흥에서는 두 놀이를 따로 하지 않는다. 또한 ‘고쌈’이 ‘줄당기기’의 예비 놀이에 그치지 않고 비중 있는 놀이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므로 두 놀이 중 하나만 지칭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할 수 없다. 주민들 스스로 ‘고쌈한다’는 말을 자연스러워 하고 선호하며, 고싸움의 연속선상에서 줄당기기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이런 점을 두루 수용한 명칭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이전에 학계에 소개된 ‘장흥 보름줄다리기’란 말은 1970년도부터 사용되었는데, 그 명칭은 지춘상 교수의 언급에서 보듯이 당시 임의적으로 정한 것이다. 지춘상, 「장흥 줄다리기의 민속학적 가치」, 學堂 ’96, 장흥학당, 1997. “출연할 당시 줄다리기 제목을 정하는데 장흥줄다리기로 할 것이냐, 아니면 다른 걸로 할 것인가 의논하다가 ‘노인들이 보름날 줄다리기를 한다고 하므로 「장흥보름줄다리기」로 하는 것이 좋겠다’ 하는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 장흥보름줄다리기라는 이름을 갖고 나갔다.”
그러므로 다소 혼란이 있을 수 있으나 실상을 반영한 명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름 자체가 다른 지역과 다른 특징을 담고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두루 고려하고 주민들이 선호하는 명명을 하고자 2014년에 장흥문화원이 마련한 간담회에서 ①지역 특색을 살린 명칭, ②다른 지역과 변별되는 브랜드화된 명칭, ③어감을 고려한 명칭 등의 기준을 마련하고 의견을 나눈 끝에 ‘장흥 고싸움줄당기기’란 이름을 선택하기로 했다.

2. 장흥 고싸움줄당기기의 진행과정

근래의 고싸움줄당기기는 ‘장흥 군민의 날 및 보림문화제’의 일환으로 실시되고 있다. 1930년대 후반 이후로 한동안 중단되었다가 1970년도에 재현되었다. 그해 4월 15일에 예양강변에서 열린 ‘제1회 보림문화제’에서 30여년 만에 재현된 후, 같은 해 7월에 광주에서 열린 제1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전남대표로 출연했다. 이후 한동안 격년제로 실시되다가 2017년에는 6년만에 재현되었다. 이렇듯 요즘의 고싸움줄당기기는 간헐적으로 ‘형식적으로 재현’되고 있지만, 1930년대까지는 매년 정월에 성대하게 펼쳐지던 고을축제 자체였다.

 

 

<그림> 전라도 장흥부 지도. 그림 중앙의 예양강(탐진강)을 경계로 동교 아래 쪽 모래사장에서 서쪽의 부내면과 동쪽의 부동면을 중심으로 인근 지역까지 망라한 고싸움줄당기기가 펼쳐졌다.

 

과거 장흥읍 일원에서 전승되던 고싸움줄당기기는 전통적으로 고을의 읍치(邑治)에서 이루어지던 고을형 줄굿에 속한다. 장흥 고싸움줄당기기의 편 구성은, 조선시대 읍치의 상황과 연관돼 있다. 탐진강(예양강)을 경계로 서부편(남외․교촌․충렬)과 동부편(행원리․신산리)으로 나뉘어서 줄다리기를 했으며, 인근 지역민까지 합세해 수천, 수만 명에 이른다.’고 할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했는데, 지춘상(1973), 87~88쪽.
이와 같은 편 구성은 방위 개념만이 아니라 치소의 전통과 관련돼 있었다. 이 구도는 20세기 행정구역 개편 후에도 부내면(장흥면)과 부동면 간의 대결로 이어졌으며, 이전 시기와 마찬가지로 인근 지역 주민들까지 합세해서 대규모로 펼쳐졌다.

 

 

1970년4월15일 제1회 보림문화제에서 재현된 고싸움줄당기기.

(강수의, 「사진으로 본 장흥 100년사」에서 전재)

 

 

1970년4월15일 제1회 보림문화제에서 재현된 고싸움줄당기기.

(강수의, 「사진으로 본 장흥 100년사」에서 전재)

 


장흥 고싸움줄당기기는 읍치의 고을축제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규모가 남달랐다. 놀이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한 지춘상 교수의 글에서 보듯이 참여인원과 구경꾼들이 수천, 수만 명에 이른다고 할 정도로 규모를 자랑했다.(지춘상(1973), 88~95쪽.)

장흥의 줄은 고머리 부분이 특이하며 고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이 특징이다. 줄이 완성되면 4~5m길이의 멜대 7~8개를 묶고 거기에 세로로 나무를 세워 층층이 수십 개의 청사초롱을 매단다. 그리고 고머리가 처지지 않게 하기 위해 45도 각도로 세워 밧줄로 묶어 놓는다. 줄을 메고 행진할 때에는 토반에 해당하는 한량과 기생들이 줄 위에 올라타서 줄다리기 설소리를 하고 춤을 춘다. 과거에는 장흥현 관아의 동헌(東軒) 뜰에 들어가서 인사를 한 뒤 예양강변으로 이동해서 본격적인 놀이를 펼쳤다. 재현 이후에도 이런 방식이 이어져서 거리 행진을 한 뒤 줄판에 도착하면 군수를 비롯한 기관장을 태운다.

예양강변 모래판에 이르러 분위기가 고조되면 청사초롱 장식을 해체하고, 장정 10여 명이 웃옷을 벗어젖힌 후 줄 위에 올라타서 기세를 돋우며 ‘고쌈’을 하게 된다. 줄 위의 지휘자가 “밀어라”하는 명령을 내리면 줄을 멘 사람들이 일제히 멜대를 두 어깨로 떠받치면서 돌진해서 상대방의 고에 부딪친다. 고가 맞닿으면 줄 위에 탄 장정들이 상대방의 고를 누르고 또 땅 위로 밀어 떨어트리려 한다. 광주칠석고싸움과 달리 고머리에 대나무를 넣지 않고 ‘굉갯대’도 없이 장정들이 어깨로 떠받치고, 앞사람이 땅에 떨어지면 뒷사람이 고를 받치고 또 그 뒷사람이 계속적으로 올라타기 때문에 수십 명의 장정들이 엉켜 혈전을 벌인다. 상대방의 고머리를 누르고 또 줄을 땅에 닿게 하면 승부가 끝나는데 그 경기 방법이 대단히 치열하고 격렬하다.
고싸움이 끝난 뒤에는 줄에 달린 멜대를 제거하고 줄당기기를 한다. 고싸움에서 진편이 양 어깨에 줄을 메고 전진, 후진을 거듭하면서 응전을 촉구하고, 서로 어우러지면 양 쪽 고머리를 댔다 떼었다를 반복한다. 그리고 줄을 결합한 뒤 줄당기기를 하는데 한쪽에서 끌려갈 경우 지휘자가 “깔아라”는 호령을 내리면 일제히 줄을 깔고 앉는다. 그러면 양편이 모두 줄 위에 앉아서 어깨로 상대의 몸을 밀쳐내는 ‘밀치기’를 한다. 이렇듯 자기편이 유리하면 당기고 불리하면 깔기와 밀치기를 계속하니 쉽사리 승부가 나지 않는다. 요즘에는 시간을 정해 줄당기기를 하기 때문에 깔기를 하지 않고 승부를 겨루지만 예전에는 깔고 밀치기를 거듭하며 몇 날을 끌었다고 한다. 줄당기기의 결과 서편이 이겨야 풍년든다고 하지만 이에 구애되지 않고 서로 이기려고 격렬하게 대결한다. 승부가 가려진 뒤 과거에는 거름으로 쓰기 위해 줄을 가져가기도 했으나 재현 이후에는 보관해두었다가 이듬해 보수해서 사용하고 있다.
이상에서 본 대로 장흥 고싸움줄당기기는 격렬하고 시끌벅적한 집단놀이의 전형을 보여준다. 물론 그 강도가 과거보다 약해지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 본래 정월 대보름 무렵에 하던 세시풍속놀이지만, 재현 이후에는 군민의 날에 열리는 보림문화제의 일환으로 전승되고 있다. 자발적으로 조직화해서 연행하던 공동체 민속이 행사화 돼서 전승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장흥도 여느 농촌지역과 다를 바 없이 젊은 인력이 많지 않아 인원 동원과 고줄 제작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지만 고싸움줄당기기에 대한 주민들의 자부심이 대단하고 계승 의지도 강한 편이다. 예전에 비해 전체적인 분위기가 위축되었지만 현행되는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다른 지역 사례와의 비교와 특징

1)다른 지역 사례와의 비교
 줄다리기는 종류가 다양하다. 지역에 따라 줄의 형태나 놀이 방식에서 차이가 있다. 전국적으로 줄(고)을 이용한 놀이가 여럿 있지만 형태로 보면 외줄형/쌍줄형/이형(異形)으로 나눠진다. 쌍줄다리기와 고싸움은 쌍줄형에 속하며, 게줄다리기는 이형에 속한다. 외줄다리기는 전국적으로 분포하지만 서해안 쪽에 집중돼 있다. 고싸움은 장흥, 광산, 남평, 강진 등 전남지역에서 주로 전승되고 있고 게줄다리기는 경기도・강원도・경상도(과천, 삼척, 밀양, 울진 등)의 몇몇 지역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다.
장흥 고싸움줄당기기에는 그 명칭에서 보듯이 고싸움과 쌍줄다리기가 함께 있다. 장흥 고싸움줄당기기의 특징을 파악하기 위해 다른 지역 자료와 비교할 필요가 있다. 현행되는 사례 중에서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자료를 중심으로 대비하기로 한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고싸움・줄다리기 현황
<명칭/지정번호/전승지역/지정일>
영산 줄다리기/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26호/경남 창녕군 영산/1969.2.11
칠석 고싸움놀이/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33호/광주시 광산구/1970.7.12
기지시 줄다리기/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75호/충남 당진군/1982.6.1
삼척 기줄다리기/강원도지정 무형문화재 제2호/강원도 삼척시/1976.6.17
감내 게줄당기기/경상남도지정 제7호/경남 밀양시/1983.8.6
의령 큰줄땡기기/경상남도지정 제20호/경남 의령군/1997.1.30
남해 선구줄끗기/경상남도지정 제26호/경남 남해군/2003.6.7

 

국가지정 자료는 세 건이고 지방지정 자료는 네 건이다. 명칭이 조금씩 다르고 놀이방법도 약간 차이가 있지만 줄다리기 유형에 속하는 민속놀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지정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영산줄다리기, 광산 칠석고싸움놀이, 기지시 줄다리기가 규모로 볼 때 우리나라 고싸움・줄다리기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만하다. 지방지정 자료 중에서는 경남의 사례가 관심을 끈다. 경남의 경우는 지자체의 적극적인 역할을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자생적인 전승력이 약화된 상태에서 문화재 제도를 활용해 전통을 보존하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비교의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장흥과 규모나 성격이 서로 통하는 국가지정 무형문화재를 구체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 지역 자료의 연행시기와 유형, 전승현황 등을 중심으로 주요 내용을 간추려 대비해보면 다음의 표로 정리된다.

지역별 비교

 

<명칭/연행시기/유형/놀이방법/전승현황>

장흥고싸움줄당기기/정월 대보름→5월/고을형/고싸움-줄다리기
군민의 날 행사의/시연 종목(불규칙)영산줄다리기/정월 대보름→3월 초/고을형/줄다리기
3・1문화제의 핵심 종목 칠석고싸움/정월 대보름/마을형/고싸움-(줄다리기)
고싸움놀이축제기지시줄다리기/윤년 날받이 →윤년 음력3월초/고을형/줄다리기/기지시 줄다리기 축제

 

위에 든 사례들은 한국을 대표하는 민속놀이로 꼽히는 종목들이다. 유서 깊은 전통축제로서도 그렇고 규모도 성대하다. 비슷한 점도 있지만 각기 지닌 역사적 맥락이나 전승기반의 차이에 따라 서로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세세한 부분들은 차치하고 유형, 놀이방법, 전승현황 등을 중심으로 비슷하고 다른 점을 얘기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지역별 비교를 통해 장흥 고싸움줄당기기의 남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2) 장흥 고싸움줄당기기의 특징

(1)고을형 축제 전통의 전형
줄다리기는 전승범위와 규모를 기준으로 볼 때 마을형과 고을형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가 마을 내 또는 마을 간에 벌어지는 것이라면 후자는 고을 단위에서 수행되는 것이다. 마을형 줄다리기는 마을 내 골목길을 기준으로 편을 가르거나 인접 마을끼리 편을 나눠 승부를 겨룬다. 이에 비해 고을형은 마을형을 크게 확대시킨 것이며 마을형과 달리 ‘큰줄다리기’라고 불린다. 고을형은 조선시대 읍치(邑治)가 있던 고을에서 전승하는 까닭에 참여하는 마을이나 놀이꾼・구경꾼들의 숫자가 수천 명에 이를 정도로 큰 규모로 진행된다.
무형문화재 중에서 고을형에 속하는 것은 영산줄다리기와 기지시줄다리기를 들 수 있다. 전통적으로 영산 줄다리기는 ‘영산 읍치’를 중심으로 벌어졌고 그 놀이들꾼은 이른 바 ‘읍4리’라고 하는 교리, 성내, 동리, 서리 등 네 개의 자연마을 사람들이다. 교리와 성내가 동편, 동리와 서리가 서편을 이루며, 인근 지역 주민들까지 합세해서 큰 규모로 승부를 겨룬다. 기지시 줄다리기는 현재의 모습을 보면 규모가 상당하지만 읍치가 아닌 5일장이 서던 시장의 상인들이 주도하던 것이어서 성격이 조금 다르다. 기지시는 과거 면천군(沔川郡)의 남쪽과 서쪽 사람들이 한양을 가기 위해 통과하는 교통의 요지이며 시장이 서던 곳이다. 기지시에서는 시장경제의 번성을 촉진하기 위해 줄다리기가 연행했다. (이인화, 「무형문화재 제75호 기지시 줄다리기의 사회환경적 재검토」, 한국사진지리학회지제19권 4호, 2009, 163~164쪽)

이것으로 볼 때 기지시는 엄밀한 의미에서 고을형에 포함된다고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장흥에서는 읍치 지역답게 큰 규모의 고싸움줄당기기가 전승되었다. 고싸움줄당기기가 전승되는 장흥읍 지역은 조선시대 지방관청 중에서 상급기관에 해당하는 부(府)의 치소가 있던 곳이다. 그런데 장흥의 경우 다른 지역 사례와 다른 조건을 하나 더 갖고 있었다. 장흥에는 동일 관내에 두 개소의 관아가 있었다. 장흥도호부의 관아가 부내면 쪽에 있었고, 치소 동쪽에 ‘장흥-강진-해남-진도’로 이어지는 역로(驛路)를 관장하는 벽사도(碧紗道)가 자리하고 있었다. 9개의 속역을 거느린 벽사찰방(碧紗察訪:종6품)은 품계는 낮았으나 관할 업무가 달라서 도호부사(都護府使:종3품)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지 않았다. 이처럼 소속이 다른 두 기관이 서쪽과 동쪽에 자리하고 있어서, 두 기관 간의 경쟁 구도가 형성돼 고싸움줄당기기가 더 성대하게 치러졌다고 전한다. 일반적인 읍치 줄다리기와 달리 장흥에서는 장흥부사와 벽사도찰방 사이의 경쟁 구도가 더해져 더 역동적인 줄다리기가 전승되었던 것이다.
장흥 고싸움줄당기기의 전통을 보면 관아와의 관련성이 잘 나타난다. 서부와 동부 고가 행진을 하면서 관아에 들러 인사를 했다든가(東軒 參拜), 양 고 위에 원님들(장흥부사, 벽사도찰방)을 태웠다든가 하는 구술 속에 읍치 줄다리기와 관련된 설명이 담겨 있다. 1895년에 역참제도가 폐지된 후에도 동서부의 고가 도호부 동헌에 들러 가는 행진은 계속되었다. 이런 전통은 1970년도에 줄다리기가 재현된 뒤에 군수나 경찰서장 등의 기관장을 고 위에 태워 행진하는 연유가 되기도 했다.
또한 예전에 원도리와 남외리에서 각각 동부고와 서부고를 제작했던 것도 이 마을들이 치소와 직접 관련된 지역이라는 것과 연관 있다. 1970년도에 고싸움줄당기기를 재현한 뒤로는 행원리에서 고를 제작하지만 이전 시기에는 서부고는 남외리, 동부고는 원도리에서 주도해서 만들었다고 전한다.

 

 [동부 어느 마을에서 줄을 걷어왔나요?] 행원리, 원도리, 축내리, 상리, 관덕리, 당정이, 해당쟁이(해당리), 월평, 신기, 금성(금산리) [왜 이 곳에서 동부고를 드렸답니까?] 예전에 여기 위에 찰방이 있었어요. 역졸들이 원도리에서 다 살았어요. 원도리가 205번지가 많아요. 그런데 그곳이 역졸들이 살던 집터예요. 205번지 내에서 차근차근 나갔어요. 찰방이 여기 위에 있어서 어사 출두하면 역졸들이 전부 나간다는 말을 들었어요. 축내 관덕 위에 비가 있었는데 그 비를 교도소 앞으로 다 옮겼어요. [이곳에 역졸들이 살았기 때문에 줄을 드리기에 유리했던 모양이네요?] 예. - 2013,2, 장흥읍 원도리 손영근(남, 87세) 면담

 

 위의 구술을 보면 원도리에서 동부 줄을 제작했던 이유가 나온다. 동부에 속하는 여러 마을에서 새끼줄을 모아오면 원도리에서 큰 줄을 완성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유로 벽사역 찰방에 소속된 역졸들이 원도리에 많이 거주했던 사실을 거론하고 있다. 관아에서 주관 또는 후원하던 고을 축제의 배경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서부고를 제작하던 남외리도 이와 비슷한 사정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장흥 고싸움줄당기기의 편 구성 방식은 행정구역 개편 이후에도 비슷하게 이어진다. 위의 구술에 나오는 것처럼 찰방의 관할 하에 있던 동부는 부동면으로 바뀌고, 서부는 장흥면으로 바뀐다. 그리고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행정구역이 아닌 방위에 따른 편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

읍치 행정기관 기반의 편 구성

조선후기-부내방(도호부) 부동방(벽사도)
20세기 초-장흥면 부동면
20세기 중반 이후-서부 동부

장흥 고싸움줄당기기는 읍치 행정기관에 기반을 둔 편 구성을 잘 보여준다. 한말에 조선시대 행정구역이 폐지되면서 벽사도(역)가 사라지지만 이전의 편 구성 방식이 달리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20세기 초에는 강 서쪽에 자리한 장흥면과 동쪽의 부동면 간의 대결로 이어지며 두 지역이 장흥읍으로 통합된 뒤로는 서부/동부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1970년도에 재현돼 보림문화제 행사로 이어지고 있는 현행 줄다리기도 동일한 방식으로 지속되고 있다. 예전 고싸움줄당기기를 기억하는 노인들의 구술 속에 벽사역이 등장하거나, ‘장흥과 부동’ 간의 대결 구도에 대한 설명이 들어 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라고 할 수 있다.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편 구성이 달라졌지만 읍치 고을 축제의 전통이 기반에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장흥 고싸움줄당기기가 고을 축제로 진행됐다는 것은 작은 줄과 큰 줄의 관계를 통해서도 설명할 수 있다. 장흥읍만 하더라도 예전에는 마을 내 또는 마을 간에 작은 규모의 줄다리기를 하는 곳이 여럿 있었다. 행원리에서는 내동(암줄)과 외동(수줄) 간에 줄다리기를 했으며, 원도리는 원도와 상리, 남외리는 남외・교촌과 충열 간에 줄다리기를 했다. 이렇게 마을 단위의 줄다리기가 끝난 뒤에 그 줄을 해체해서 동부/서부 간의 큰 줄다리기로 확대해서 연행했다. 서부 쪽에 속한 마을들은 남외리로 줄을 모으고, 동부 쪽에 속한 마을들은 원도리로 줄을 모아서 큰 줄을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골목 고싸움줄당기기기’가 고을의 ‘큰 고싸움줄당기기’로 확대되었던 것이다.

 

장흥의 ‘큰 고싸움줄당기기’
<구분/명칭/중심마을(고 제작)/참여마을/인근 군민 참여/1970년 이후 고 제작 마을>
서편,암고/장흥 고/남외리/교촌리,충열리,동동리,남동리,예양리,연산리등/강진,영암군민 가세/행원리
동편,숫고/부동 고/원도리,행원리,기양리,건산리,축내리,관덕리,상리 등/보성,고흥군민 가세/행원리

 

 위의 표는 1930년대까지 이루어지던 장흥의 큰 줄당기기의 모습이다. 마을 단위의 고싸움줄당기기를 하고 난 뒤, 고을 단위로 크게 확대해서 놀이판을 만들어 축제를 펼치는 형태를 보여준다. 여기에서 보듯이 장흥 고싸움줄당기기는 작은 고(줄)가 큰 고(줄)로 확대되는 고을형 축제의 전형적인 모습을 잘 보여준다.
물론 이런 방식이 현재도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20세기 중반까지도 마을 단위의 줄다리기가 있었으나 지금은 전승하는 마을이 없다. 또한 강진, 보성 등지의 인근 지역 주민들이 참여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을마다 새끼줄을 걷어서 한 곳으로 모아 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교부받은 예산으로 한 마을에서 줄을 제작하고 있다. 놀이꾼도 마을마다 할당된 인원들이 나와 편을 짜서 승부를 겨루는 것으로 바뀌었다. 1970년도에 장흥 ‘보름줄다리기’가 재현된 이후 예전 방식대로 편 구성을 하는 형식을 유지하고 있으나, 내용상으로는 많은 변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2)성대한 규모와 놀이과정의 역동성
장흥 고싸움줄당기기의 성대한 규모는 위에서 설명한 고을형 축제의 전통과 관련 있다. 관아의 후원을 받고, 행정관청 간의 경쟁심리가 담겨 있어서 더욱 큰 축제로 확장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배경으로 인해 참여하는 마을들이 많고, 인근 지역까지 포괄한 큰 규모의 승부로 펼쳐졌으며, 참여하는 놀이꾼의 인원수나 줄의 규모 등이 남달랐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 초의 기록을 통해 장흥 줄다리기의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鉦鼓喧喧號令明 징 북소리 시끌벅적 호령소리 분명하니
東西形勢兩分生 동서의 형세 두 편으로 나뉘어 일어나네
龍爭虎鬪千斤力 용과 호랑이 천근의 힘으로 다투어 싸우고
地塌天崩萬仞聲 땅과 하늘 만인의 소리로 기울고 무너지네
管束衆心團體進 뭇 사람들 마음 단속하여 단체로 나아가며
指揮隊伍密行成 대오를 지휘하여 빈틈없이 행렬을 이루었네
一場勝負宜常事 한마당의 승부야 마땅히 보통의 일이니
較這兵家摠是情 이것을 병가에 견준다면 다 이런 마음이라네
(<戊午正月次白兄索戰韻>, 『소천유고(小川遺稿)』)(김희태(전라남도청 문화재전문위원) 선생이 발굴한 자료 중의 하나다. 김 위원에 의하면 장흥 줄다리기의 옛모습을 보여주는 역사자료는 사진 1점, 한시 2점이 있다.)

장흥 유림 이인근(李寅根, 1883~1949)의 시에 묘사된 무오년(1918년) 줄다리기의 모습이다. ‘용과 호랑이 천근의 힘으로 다투어 싸우고’, ‘땅과 하늘 만인의 소리로 기울고 무너지네’와 같은 표현 속에서 장흥 줄다리기의 규모를 어렵지 않게 떠올려 볼 수 있다.
장흥 고싸움줄당기기가 큰 규모로 펼쳐진 배경에는 지역의 경제적 기반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0세기 이후에도 고을형 축제가 지속된 것은 고을 공동체의 전승기반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수백 명의 놀이꾼들이 참여하는 큰 행사답게 지역의 향반 부호들의 후원이 있었을 것이다. 동부고와 서부고가 행진할 때 지역의 유지・한량들과 기생들을 태우고 기세를 돋우곤 했다는 데서 그런 정황을 읽을 수 있다. 지춘상 교수의 설명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다른 지역과 달리 장흥에서는 비교적 토반 측에 속하는 사람들만이 참여하고 또 줄 위에 탄 사람은 문벌과 재력을 어느 정도 겸비한 한량들이 평소에 가까이 지내던 기생들을 태우고’ 지춘상(1973), 97쪽.
행진을 했다고 한다. 토반과 재력을 갖춘 한량들이 줄다리기의 후원 세력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장흥 고싸움줄당기기의 경제적 배경과 관련해서 장흥시장 상업 세력의 존재를 빼놓을 수 없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소화난장’ 때의 줄다리기다. 고로들에 의하면 소화(昭和)시대에 장흥시장의 개장과 번성을 위해 크게 난장을 벌였고 그때 고싸움줄당기기를 했다고 말한다.

 

줄다리기 할 때는 부동하고. 원래 줄은 남밖 삼리, 그리고 성안하고 행안 4개리하고 남정리 3개리하고 줄을 당겼어. 그리고 크게 당길 때는 부동하고 장흥하고 합칠 때 그때 크게 당기고. 소화난장이라고 그래. ……장을 완전히 복구했을 때가 ‘소화난장’이라고 했어. 거기에서 줄을 당겼어. 줄 당길 때는 어려서 못 갔어. 얘기만 들어봤어.- 2013.1.22.장흥읍 행원리 김문수(남,1920년생) 옹과의 면담

위의 인용은 1920년생의 고로가 전하는 말이다. 그는 장흥과 부동을 합할 때, 장흥시장을 개장했을 때 줄다리기를 했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십대 중반에 장흥시장이 복구・개장되었을 때 난장을 텄는데 그 때 줄다리기를 크게 했다고 한다. 그의 구술을 보면, 앞에서 설명한 바 있는 ‘골목줄다리기’가 ‘크게 당기는’ 줄다리기로 확대되는 과정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소화난장 때의 줄다리기가 전통 방식대로 큰 규모로 이루어졌음을 말하고 있다.
고로들이 말하는 소화난장은 소화 12년(1937년)의 줄다리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재열(남, 84) 옹에 의하면 이때의 줄다리기가 전통적인 것으로는 마지막이었다고 한다. 그는 장흥 줄다리기가 시장과 연관 있다는 설명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당시에는 강 이편하고 여기는 ‘장흥’이고 저 건네는 ‘부동’이었거든. 장흥하고 부동하고 고를 멘디 장흥 고는 암줄이고 저 건네 부동은 수줄이에요. …… 여기는 동편이고 저쪽은 서편인디 동편, 서편이라고 안 하고 ‘장흥 고’, ‘부동 고’라고 했어.
이 근방에서 유명한 고싸움이 되았거든. 강진고을, 영암고을은 여기 편이 되고 보성에서 고흥까지도 하듬만. 그 사람들은 저기 부동 편이 되아서 이쪽은 아조 카니발이었어. 장흥 고줄 영향으로 해서 장흥장은 ‘허천난 장’이라는 소리가 있어. 장에만 나오면 뭐든지 먹어버려. 왜냐하면, 고를 당그면 보름동안은 하거든. 하루 이틀에 끝내는 것이 아니여. 보름동안 그 행사를 해서 줄 당겨서 그것이 끝나버리는데, 그럴 때 모인 사람들이 지금같이 야전용 뭣이 있어 가지고 올 것이 없제. 그러니까 장흥 장에 있는 것은 뭐든지 나기만 하면 사 먹어버려. 고구마도 나오면 쪄가지고 가고 토란도 쪄가지고 가고 해서 내만 놓으면 구경꾼들이 다 사먹어준께. 못 사먹어서 난리가 나고 해서 그래서 허천난 장이라는 별명이 있었어.
- 2013.1. 장흥읍 연산리 김재열(남, 84세) 옹과의 면담

 

위의 인용에서 보듯이 장흥의 고싸움줄당기기는 장흥 관내의 행사에 그치지 않고 인근 강진, 영암, 보성 주민들까지 참여하는 축제였다고 한다. 또한 하루 이틀에 끝나지 않고 여러 날에 걸쳐 실시되고 모여드는 인파가 많아서 상인들이 내놓은 물건들이 나오는 즉시 팔려나갔다고 한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먹을 것이 나오면 사서 먹어서 ‘허천난 장’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고 한다.
‘소화난장’의 사례에서 보듯이 장흥의 고싸움줄당기기는 지역의 경제적 기반을 토대로 해서 더 활기차게 전승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런 배경으로 인해 화려하게 줄을 장식해서 행진을 하고 더 많은 놀이꾼들이 참여해서 격렬하게 고싸움과 줄다리기를 했다고 할 수 있다.

 

정월 대보름날, 아침밥이 끝나면 농악대가 놀이꾼들을 끌어들인다. 5,6백 명의 놀이꾼들이 동원되면 휘황찬란한 청사초롱을 매달고 줄을 어깨에 메고 마을 앞을 돌아다니며 전의를 북돋기 위한 시위를 벌인다. 오후가 되면 줄 앞에 노인들이 켜든 횃불 20여 개를 앞세우고 줄다리기가 벌어질 탐진강을 향해 행진한다.
행군의 순서는 횃불 뒤에 수백 년 내려오는 큰 ‘덕석기’와 농기 및 영기가 뒤따르고 그 뒤에 농악대가 따른다. 농악대 뒤에 이 지방의 토반에 속하는 한량들이 호사한 옷차림과 머리에 수건을 옆으로 멋스럽게 동여매고 올라탄다. 그 뒤에는 평상시에 같이 놀던 명기 2,3명이 호사한 옷차림과 머리에는 특이한 고깔을 쓴 채 맨 앞의 기생은 줄다리기 노래의 설소리를 하고 그 외의 기생들은 춤을 춘다. 지춘상(1973), 92~93쪽.


위의 인용에서 묘사한 보름날 줄을 메고 행진하는 장면을 보면, 농악대의 연주와 덕석기・농기・영기 등의 깃발과 수십 개의 횃불이 앞장서고 휘황찬란한 청사초롱을 장식한 고가 뒤따르며, 고 위에는 한량들과 기생들이 올라타서 노래를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놀이꾼 수백 명이 참여하는 성대한 행렬이었으며, 다른 지역 줄다리기보다 규모가 크고 화려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장흥 고싸움줄당기기는 그 규모처럼 놀이 과정도 격렬하고 역동적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대동놀이가 억세게 펼쳐지는 것은 어디나 마찬가지지만 장흥의 경우 더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싸움 또는 줄다리기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반적인 격렬함만이 아니라 각 단계마다 놀이의 역동성이 부각되는 특징을 보여준다. 이런 점이 일반 사례들과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고(줄)을 메고 행진한 뒤에 총사초롱을 해체하고 난 다음 진(陣)잡이를 하는데, 이때에 장정 10여 명이 줄 위에 올라가고 두 세 명이 맨 앞에서 어깨로 고를 떠받치게 된다. 이어 양편의 고가 맞부딪치면서 고싸움이 상대편 고를 누르고 고 위에 탄 이를 떨어뜨리고자, 웃옷을 벗어젖힌 장정들이 맨몸으로 엉켜 싸우는 고싸움이 벌어진다. 그리고 멜대를 해체한 뒤에 고를 연결해서 줄을 당기는데, 줄이 끌려 갈 경우 일제히 줄을 깔고 앉는다. 줄을 끌어 당겨도 끌리지 않으므로 줄 위에 앉은 사람을 밀어내기 위한 밀치기를 한다. 또한 줄을 당길 때에는 여자들이 솔잎을 따다가 상대편 남자들의 손등을 찔러 힘을 못 쓰게 한다. 이와 같이 장흥의 고싸움줄당기기는 여느 줄다리기에 비해 대규모로 펼쳐지는 역동적인 편싸움 놀이라는 점이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장흥 고싸움줄당기기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고을형 축제의 전형적인 사례라는 점과 규모의 성대함, 놀이과정의 역동성이 남다르다는 것을 주된 특징으로 꼽았다. 이외에 청사초롱을 장식하는 문제, 낮에 하는데도 횃불을 들고 나오는 문제, 줄다리기 장소가 강변이라는 문제 등등을 더 구체적으로 다룰 수 있다. 세부적으로 보면 더 많은 특징들을 거론할 수 있으나 위의 설명 속에서 압축적으로 다루었다.

고싸움줄당기기는 장흥의 역사적 내력과 공동체의 기억을 담고 있는 무형문화유산이다. 조선후기 지역사와 연계돼 있고 20세기 격변기의 여러 상황과 연관돼 있다. 특히 고싸움줄당기기를 매개로 반일의식이 표출되었다는 이야기가 후일담으로 전하는데, 고싸움줄당기기가 당대의 특별한 역사적 경험과 연결돼 있다는 점에서 남다른 가치를 인정할 만하다. 그리고 ‘군민의 날 및 보림문화제’의 일환으로 재현되고 있고 지역 공동체의 정체성을 표상하는 상징으로 해석되고 있다는 점도 관심을 끈다. 하지만 지금의 고싸움줄당기기는 축제 자체로서가 아니라 형식적으로 시연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고싸움줄당기기의 온전한 계승을 위해 지역사회의 토론과 실천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 http://www.jhtoday.net/news/articleView.html?idxno=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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