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문화원

시인 김헌기(1967~)

 

 

 1967년 나주에서 태어나 장흥으로 이거하였으며 장흥의 문학적 토양에 매료되어 글쓰기에 정진하였으며, 별곡문학동인회의 활동을 통해 소양을 기워왔다.

2002년 <공무원문학>가을호에 시부문 신인상에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하였다. 이어서 행정자치부, 법무부 주최 공무원문예대전 등 수회의 문예제전에 입상하였다. 법무부 교정공무원(장흥교도소)으로 재직하면서 공무원문인협회, 장흥별곡문학동인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 2의 고향인 장흥의 정서와 서정을 가슴으로 안아올리는 따뜻하고 섬세한 작품들을 발표하면서 활발한 작품활동을 보이고 있다.

 

그리운 주월동

 

광복아. 별빛도 어둠이 깊어

아련한 것이 빈 가슴에 차오르는 주월동에

뒷등 희미한 알전구처럼 저 하늘에 외로이 떠서

눈물나는 붕어빵을 찍어 팔던

네 가난한 어머니는 안녕하시냐

 

평생 땅 한 평 가져보지 못한 네 어머니

지지리도 서방복도 없다더니

외동아들 놈 높은 공부 시킨 재미로

너 하나 보고

면서기 말석자리라도 하나 보고

힘들어도 힘든 줄 모르고

저녁 한 끼 시장한 줄도 모르고

찬 서리에 흠씬 젖어

어둑한 고샅길을 쓸쓸히 돌아오던 네 어머니

 

광복아, 감동도 없고 그리움도 없는 이 황량한 도시에

칼바람은 아득한 곳에서 불어오고

가느다란 아픔을 어루만지는 자리마다

강물처럼 흘러 흘러 흰옷자락 눈물 적시던

서러운 네 어머니는 진정 안녕하시냐

 

 

 

관련기사 http://m.jh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54416

출      처_장흥별곡문학동인회'장흥의 문학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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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태중(1929~)

 

 김태중은 일본 가나가와현 오다와라시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전남 장흥군 장흥읍 금산리이며 본관은 광산이다.

1954년 도쿄대학교 문학부를 졸업하였다. 1950년 동교 재학 중에 이지마 코이치, 구리타 이사무, 구도 유키오 등과 함께 동인지 '카이에' 창간에 참여하였다.

 시집은 '속박의 거리' '나의 고향은 호남 땅' 으로 제 39회 훗카이도신문 문학상(시부문)을 수상하였다.

김소운 선생님을 방문하여 면식을 쌓고 모국의 문학 및 민족의식과 긍지에 대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

훗카이도 신문에 컬럼'아침의 식탁'에 2년간 24회에 걸쳐 수필을 집필하였고, 훗카이도신문사에서 '탈 나의 경영 나의 인생'을 간행하였다.

 

맑은 날에

 

구불구불 굽은 세월을 담담하게 비켜나

소음조차 뒷걸음치는

이 평온한 초겨울 아침,

긴 생애 마지막에

또 다른 후회는 새기지 않겠노라고

나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젊은 시절의

낡은 기억과

머릿속 추억을 토해낸다.

 

아아, 청구 땅 또한 맑을 것 같은 도쿄의 아침이여

 

 

 

관련기사_http://www.dailian.co.kr/news/view/123365

출처_ 장흥별곡문학동인회'장흥의 문학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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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의 고싸움줄당기기 문화재 등록 서둘러야"

 

제3강 장흥 민속의 문화사적 가치와 보존 전승-고싸움 줄당기기, 장흥 신청 외_이경엽 교수

 

 

지난 8월 23일 장흥문화원(원장 이금호)이 주관하는 장흥전통인문학문화강좌가 100여명의 군민이 참석한 가운데 군민회관에서 열렸다. ‘장흥 민속의 문화사적 가치와 보존 전승 - 고싸움줄당기기, 장흥 신청 외’란 주제로 이경엽 목포대 국문학과 교수가 진행하였다.
 
 이 자리에서 이경엽 교수는 장흥을 넘어 남도의 소리와 춤을 배우고 전승하면서 최옥산, 신홍재, 김녹주 등 탁월한 음악가들이 활동했던 대표적인 전통음악 공간인 장흥신청이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하고 있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또한 이경엽 교수는 서편으로는 강진과 영암, 동편으로는 보성과 고흥사람들까지 참여할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고을축제였으며, 독특하게 고싸움과 줄다리기가 결합된 장흥 고싸움줄당기기가 현재 형식적인 시연으로 머물러 있는 점도 비판하였다. “장흥 고싸움줄당기기와 비슷한 시기에 복원, 재현(1970년)된 광주시 광산구 칠석 고싸움놀이가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지역민의 자발적인 참여와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장흥도 문화재 등록을 추진하면 가능성이 높다고 제안했다.
 
 특히 이경엽 교수는 심지어 중앙분리대를 철거하고 큰 대로에서 펼쳐지는 오키나와 줄다리기를 예로 들면서 “오키나와 줄다리기는 생동감과 활력이 넘친다”며 그 이유로 “축제 자체가 목적인 까닭에 전승주체가 주인이 되어 즐긴다. 그것을 보고 느끼러 관광객이 찾아온다”고 말했다. “축제는 운동장에서 다른 행사의 방편으로 보여주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며 장흥도 군민의 지혜를 모아 과감하게 일상생활의 공간인 거리에서 고싸움줄당기기를 펼치며 지역의 대표적인 축제로 만들어가야 한다고 강변했다.

 한편 이 자리에 참석한 위등 장흥군의회의장은 인사말에서 “문림의향 장흥의 문화와 역사를 재조명하고 전승하려는 인문학강좌에서 많이 배운다”며 장흥의 고싸움줄당기기를 복원하고 지원하는데 의회 차원에서 관심을 갖고 대처하겠다고 말했다.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장흥문화원(이금호 원장)은 “작년과 올해 장흥인문학강좌를 통해 숨겨져 있는 우리 지역의 문화 소중한 문화유산을 지역민들에게 알리고 관심을 이끌어 발전 계승하기를 바란다”고 장흥 군민의 문화 의식 발전을 염원했다.
 
<저작권자 © 장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출처 http://www.jh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56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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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람/ 용화사 주지 서응스님
불상전문 사진작가 안장헌 - “불상 상호의 아우라 너무나 강렬”
국내 최고전문가 정영호박사-“석불 복원-국가 지정 적극 추진”
관계기관 무관심-석불 재조명, 용화세계 꽃불 언제 피어오를까
 

동면 용화사 전경

 

 
신라 말 고려초기의 용화사 석조여래좌상(사진-안중헌)

 

 
용화사(龍華寺)는 장동면 북교리 산 43번지(장동면 석교상방이길 89-114)에 위치한 신라 말 고려초기의 약사여래불을 모신 사찰이다.
아직은 사찰로서 번듯한 대웅전도 구비되어 있지 않아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영험하다고 잘 알려진 천년된 석불 약사여래가 있어 전국 각처에서 참배 불자들의 기도행이 줄을 잇고 있다.
최근에는 용화사 진입도로가 개설되어 대형 관광버스를 동원한 단체 기도참배객들이 줄을 이을 정도다. 올 가을에도 관광버스 5대의 참배가 예약되어 있다고 한다.

 

■용화사의 기원은 불자사로부터

 

용화사의 시원은 불자사(佛者寺)이다.
<장흥읍지>(1747년 간행 정묘지) 장동방 불우조(佛宇條)에 “佛子寺 在盃山西 今有遺止”라는 내용, 즉 ‘불자사는 배산 서쪽에 있었으나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현재의 약사여래좌상이 위치한 용화사가 예전의 불자사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런데 1953년경 모인(某人)이 폐사지 방죽에 넘어져 있던 약사여래좌상을 일으켜 세우고 석불 주위로 작은 움막 같은 보호각을 지었으니, 이 석불과 작은 움막 같은 보호각으로부터 용화사는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2003년 서응 스님이 용화사 주지로 부임해오며, 용화사는 일대 변혁기를 맞이한다. 서응 스님은 약사여래좌상이 안치된 허름한 보호각을 개축한 데 이어, 설선당, 심검당, 다향각, 화장실 등을 복원하며 어느 만큼 사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서응 스님- 약사여래불에 큰 감화받았다

 

서응 스님은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던 용화사로 이적하게 된 계기를 묻는 기자의 말에 스님은 당시 움막 같은 곳에 갇혀 있던 석불에 큰 감화를 받았다고 한다.
“저의 게으른 선수행을 질타하는 듯 활짝 열어젖힌 눈매며 기상이 넘치는 듯 우뚝 솟은 콧날, 자애가 넘치는 듯한 도톰한 입술...저는 이런 천년고불인 약사여래불을 보고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거기서 하룻밤을 유하는데 부처님이 현몽하기도 했고, 새벽에 몸이 그렇게 가뿐해질 수가 없었습니다. 용화사의 기운이 범상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약사여래불을 모셔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용화사로 온 이후 서응 스님은 첫째로 콘크리트 좌대 위에 앉아 있고 상당히 훼손 되어 있는 석불을 복원하는 불사를 추진하였다고 한다. 그러다 2003년 매미 태풍 때 약사여래불 보호각이 무너지는 참변을 당했고, 이후 군의 긴급 복구사업으로 보호각을 재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동안 서응 스님은 스스로 수십 번 체험하기도 했지만, 약사불을 참배한 수많은 불자들로부터 약사여래부처님의 영험함을 전해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불교 미술사학의 거목인 정용호 박사가 용화사를 다년간 2015년 이후, 약사불의 예술적, 문화적 가치를 거듭 확인하고는 약사여래불의 복원사업과 국가지정 문화재인 국보, 보물 지정운동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용화사의 약사여래좌상은 1974년 9월 24일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된 바 있다)
서응 스님은 석불의 복원에 이은 또 한 가지 꿈을 가지게 되었다. 새로운 당우에 약사불을 본존불로 모시는 대웅전 불사를 추진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불사의 꿈은 2016년 8월 2일, 전 단국대 석주선박물관장으로 한국 고고미술사학계 거목인 정영호 박사가 용화사를 방문하고 나서였다.

 

■미술사학계 거목 정용호 박사 용화사 방문

 

▲정영호박사(좌측에서 두번째)가 석불을 관찰하고 있다.(사진-안중헌)

 
▲정영호박사(우측에서 두번째)가 석불 복원, 국보지정을 주창하고 있다.(사진-안중헌)
 
정영호 박사는 1950년대부터 수백여 점의 유적 및 유물 발굴에 앞장섰던 국내 최고의 미술 사학계의 거봉이었다. 그가 발굴한 단양신라적성비(국보 제198호), 중원고구려비(국보 제205호) 발굴 등은 특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또 양양군 진전사지의 6차례 발굴조사를 통해 부도(보물 제439호)와 석탑(국보 제122호) 발굴 등으로 국내 첫 폐사지 복원의 역사를 일궈내는 큰 기여를 했으며, 1977년 이후 2016까지 200여 회에 걸쳐 일본 대마도를 방문, 왕인 박사를 비롯한 선현들의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그 정영호 박사가 용화사를 방문한 것이다. 이때 동행한 분들이 문화재 전문 사진작가인 안장헌 씨, 박기선 박사(정영호 박사 제자), 순천대 사학과 교수 최인선 씨(순천대학교 박물관장) 등이었다.
특히 안장헌 사진작가의 경우, 국내의 불상 사진만 수십만 점을 보유할 정도로 불상에 대해서 세계적으로 탁월한 식견을 가진 지고 있었고 이런 이유로 용화사 석불과도 인연도 있었던 불상 전문 사진작가이기도 했다.

 

■안장현 불상 전문 작가도 용화사 방문

 

안장헌 씨는 2002년 3월 5일, 처음으로 용화사를 찾아갔을 때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용화사는 석불의 보호각을 법당으로 사용하고 있으면서 변변한 요사채마저 없는 자그마한 절이었다. …용화사의 석불은 광배(光背)와 불신(佛身)을 커다란 하나의 돌에 새겨놓은 좌불상이었다. …석불이 오른손은 잃었으나 항마촉지인을 맺고 있었을 여래좌상이 분명하고이목구비가 뚜렷한 상호는 그윽한 자비의 미소를 듬뿍 머금은 부드럽고 활달한 기운이 생동하고 있었다. 비록 손상되고 결실되기는 하였으나 입체감이 매우 좋은 당당한 몸매에서 원숙한 조각가의 불심을 읽을 수 있었으며 배 모양의 광배에는 조식이 화려하고 양감도 좋아 부처의 몸에서 발산되는 광채를 표현하였는데 둘레가 많이 결실되어 아쉬움이 컸다”(네이버 블러그-‘안장헌의 문화유산과 사진 이야기’)
그리고 안장헌 씨는 2003년 2월, <석불-돌에 세긴 정토의 꿈>(한길아트 발간)이라는 불상 사진집을 펴냈는데 여기서도 용화사 석불을 소개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서응 스님과 인연이 되었고, 이후에도 3회(2004년 10월, 2005년 7월, 2015년 10월)에 걸쳐 용화사를 더 찾았으며, 2016년 8월 2일 정영호 박사가 용화사를 찾았을 때도 용화사를 다시 방문했던 것이다.

 

■“용화사 석불-복원, 국가지정 문화재 추진할 터”

 

서응 스님은 “2016년 8월, 용화사 석불을 일견한 정용호 박사는 수많은 불상을 봐 왔지만 이처럼 대단히 훌륭해 뵈는 불상은 처음이다. 국보급 이상이다. 내 생애에서(당시 80세) 마지막으로 진선사 복원(예전 진선사지 발굴을 주도했다)과 함께 이 불상 복원도 추진해 보고 싶다, 더불어 이 석불의 국보급 지정 운동도 함께 추진하겠다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이때 정 박사와 함께 방문했던 안장헌 씨도 기자와 전화 통화에서 “석불을 참배하고 우러러 보면 불상이 주는 아우라(Aura:예술 작품 등에서, 흉내 낼 수 없는 고고한, 고유한 분위기나 기운)가 너무 강렬했다, 수십만 장의 국내 불상 사진을 찍은 내게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이후 용화사의 약사여래불의 복원과 국보급 지정 운동은 정영호 박사를 위시해서 본격 추진되는 듯했으나, 그 이듬해인 2017년 4월 27일 정영호 박사가 갑자기 별세, 용화사의 약사여래좌상의 복원과 국보급 지정 운동은 이후 정체되고 말았다.

 

■대웅전 불사 추진-용화세계 구현 기반

 

용화사(龍華寺)라는 절 이름은 미래의 불국정토가 실현된다는 용화(龍華)세계에서 따온 사찰 이름이다. 그런데 이 용화사에서 본존불은 미륵불도 아니고 약사여래불, 즉 약사여래좌상이다. 약사여래는 모든 중생의 질병을 고쳐주고 재앙을 소멸시키며 불자에게 무상보리(無上菩提)라는 최고의 깨달음을 얻게 해준다는 부처이다. 그러므로 장동 북교리의 용화사는 이상(理想)으로 불국토를 지향하지만 현실(現實)에서 중생의 아픔과 슬픔을 치유해주는 사찰인 것이다. 이상과 현실이 공존하지만 이상보다 현실을 더 중시하는 사찰이 장동 북교리의 용화사인 것이다.
최근 들어 서응 스님의 대웅전 불사와 약사여래 복원 불사에 대한 발원의식은 더욱 확고해지고 있다.
“전국에서 참배객들이 몰려드는 참배객이 연중 5백여 명이나 되는데, 보호각이 비좁아 겨우 10여명밖에 못 들어가니 기가 막히잖아요. 천년고불을 모신 법당도 너무 초라하잖아요. 그것도 절 입구 길에 떡 버텨있습니다. 바람 불면 먼지가 법당으로 들어와 1년 내내 문도 못열어 놓고 있습니다. 70-80년대에 철근 콘크리트로 만든 좌대가 부식되어 석불이 기울고 거기다 시멘트 독으로 석불이 백화현상으로 부식되고 있습니다. …하여 약사여래불을 제대로 복원도 하고, 제자리에 모시려고 대웅전 불사를 추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약사불에 대한 문화재적, 불교 미술사적인 가치에 대해 수많은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극찬하며, 국보급으로 지정되고 복원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도 전남도나 장흥군 등 관계 당국에서는 너무 무관심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도, 군 관계자들도 석불의 복원을 인정하면서도 에산문제로 이를 처리 못하고 있어 참배객들로부터 욕을 얻어먹고 있습니다.”
용화사 경호스님의 비원의 목소리였다.

 

■용화의 꽃불 피어나길 비원한다

 

“앞으로 대웅전 불사와 약사여래불 복원을 1차적으로 추진해야 하지만, 이와 함께 주차장도 정비해야 하고, 참배객들의 쉼터도 만들어야 하고, 종각도 신설해야하고 참, 할 일이 많습니다.”
서응 스님은 “출가한 이래 수십 년 동아 수행 정진해 오면서, 도솔암에서 천일기도 회향 후 단군 이래 국가 최대의 공사라는 새만금 간척공사 때 3회에 걸쳐 고사 및 천도재를 지낸 것을 비롯하여, 광양제절 제2컨테이너 항만, 부산 신고리 원자력발전소, 시흥 제3,4호기 화력발전소 공사 등 수많은 건설회사 공사 기도를 봉행한 것이 추억에 남는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서응 스님-무엇보다. 외진 산골에서 찬란한 용화세계를 꿈꾸며 그러나 지금은 만인 대중들의 지극한 아픔과 슬픔을 녹여주는 기도처로서 번듯한 도량을 꿈꾸는, 지극히 현대적이며 천진한 스님임에는 분명하다.
어느 시인은 용화사 방문기에서 용사화에 대해 “…당호하나 걸리지 않는 용화사에 천년을 이어오는 옛 불자사의 꽃불이 타오르고 있다”고 표현했다.
이 시인이 표현한 꽃불… 그 ‘꽃불’은 오욕과 번뇌로 가득찬 이 땅(現實)에 발 딛는 인간이 저 투명하고 공(空)한 하늘(理想)을 땅으로 끌어 내려 찬연히 빛나는 ‘용화(龍華)’의 꽃불일 게다./김선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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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김충석(1953~)

 

 

장흥군 장흥읍에서 출생하였다.장흥군 사진회장, 장흥제암산산악회장을 역임하였으며, 장흥군 관광사진공모전 대상, 공무원미술대전 2회 입선하였다.

계간<문학춘추> 수필부문 신인상 당선하여 장흥사진회원, 별곡문학동인회원으로 활동중이다.

산행과 오지탐방을 사실적인 문장의 기행문으로 형상화하고 사진을 곁들여 발표하는 등 착실한 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김충석의 글은 우리 모두의 일상에서 연결되는 사소한 소재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감싸안아올리는 진솔함을 보여주고 있다하여 그의 수필은 다정한 이야기로 독자들에게 전해오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현재 장흥군청 공무원으로 재직중이다.

 

 

베낭을 꾸리며

 

천관산의 억새가 황홀하다. 돌부스러기와 암벽과 척박한 비탈의 대지에서 어쩌면 이다지도 황홀한 생명이 내재되어 있었을까.

지난 세월 속에서는 그 어떤 징후도 보이지 않던 풀잎들이 어김없이 이 가을을 수 놓는다.

무궁한 자연의 섭리안에서 사람은 늘 하찮은 존재로 모리 숙여지거니와, 이 가을 천관산의 억새들이 하늘거리며 펼쳐내는 향연에는 다시 한 번 숙연해지는 것이다.

무수한 사람들이 억새를 감상하고자 천관산을 찾는다.

등정과 하산의 산길이 여러 갈래인데도 제법 붐빈다. 이 고적한 남녘의 명산이 사람들의 냄새로 범상해지는 것도 같다. 길은 좁고 혹은 가파르고 미끄럽고 붎ㄴ하다.

길은 외줄기여서 보행의 예절을 지키기도 쉽지가 않다.

그래도 지장없이 힘겹게 오르고 정상에서의 희열을 표정에 담은채로 내려온다.

(하략)

 

 

 

출처_ 장흥별곡문학동인회'장흥의 문학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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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엽 목포대 교수, 23일 전통인문학문화강좌서 주장
140년된 고싸움줄당기기, “독특하지만 형식적 시연 머물러” 아쉬움 드러내

 


장흥고싸움줄당기기의 문화재 등록을 서둘러야 한다는 제안이 나왔다. 지난 23일 장흥군민회관에서 100여명의 군민이 참석한 가운데 장흥문화원이 개최한 장흥 전통인문학문화강좌에서다.
28일 장흥군에 따르면 이날 인문학문화강좌는 '장흥 민속의 문화사적 가치와 보존 전승-고싸움 줄당기기, 장흥신청 외'란 주제로 이경엽 목포대 국문학과 교수가 진행했다.
이 교수는 독특하게 고싸움과 줄다리기가 결합된 장흥고싸움줄당기기가 현재 형식적인 시연으로 머물러 있는 점을 아쉬운 점으로 지적하며 강의를 시작했다.
이 교수는 "장흥고싸움줄당기기와 비슷한 시기에 복원, 재현된 광주 칠석고싸움놀이가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지역민의 자발적인 참여와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장흥도 문화재 등록을 추진하면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그는 오키나와 줄다리기를 예로 들면서 "오키나와 줄다리기는 생동감과 활력이 넘친다"며 "축제 자체가 목적인 까닭에 전승주체가 주인이 되어 즐긴다. 그것을 보고 느끼러 관광객이 찾아온다"고 말했다.
이어 "축제는 운동장에서 다른 행사의 방편으로 보여주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며 "장흥도 군민의 지혜를 모아 과감하게 일상생활의 공간인 거리에서 고싸움줄당기기를 펼치며 지역의 대표적인 축제로 만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장흥고싸움줄당기기'는 장흥도호부 시절인 1872년 음력 정월 대보름날에 장흥교 밑에서 서부 고와 동부 고로 나눠 풍년을 축원하는 민속공연으로 시작돼 현재까지 장흥지역에서 140여년동안 이어진 전통민속예술이다.


장흥=이영규 기자 yglee2@jnilbo.com 

 

 

출처 http://www.jnilbo.com/read.php3?aid=1535450513558040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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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문화원 2013년 발행_사진자료 일부 발췌(이경엽.양기수.이옥희)

 

 

 

 

                                          ▲제1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장흥읍 원도리(현 장흥교도소 자리) 들판에서 연

                                          습하는 장면(1970년)
                                          ▲제1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장흥읍 원도리 들판에서 연습하는 장면으로 주변

                                          에 초가들이 보임(1970년)

 

 

 

 

                                          ▲고줄 위에 소리꾼과 줄패장을 태우고 행진하는 장면. 예전에는 문벌과 재력을 어느 정도 겸비한

                                          한량들이 기생을 태우고 행진을 했다고 함. 기생의 설소리에 맞추어 멜꾼들은 “상, 사-, 뒤~여!” 하

                                          는 후렴구로 화답함(1970년 광주)

                                          ▲제1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청사초롱을 단 고줄을 메고 행군하는 장면. 청사초롱의 모양

                                          이 현재의 것과는 다르며 고머리에 색천이 감겨 있지 않음(1970년)

 

 

 

 

                                          ▲제 1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출전 당시. 맨 앞부터(우측) 서부기, 덕석기, 영기, 농지천하지대본

                                          기, 버꾸놀이패, 청사초롱, 고줄의 순서로 행군하는 장면.(1970년)
                                          ▲제 1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수많은 청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청사초롱을 단 고줄을 메

                                          고 행군하는 장면.당시 ‘장흥 보름줄다리기’ 라는 명칭으로 출전함(1970년)

 


 

                                          ▲고싸움 준비를 위해서 청사초롱을 떼어내려고 고를 내리는 장면. 이때 농악패는 버꾸놀이를 한판

                                          벌인다. 장흥 버꾸놀이 농약패가 쓴 고깔의 꽃은 담배꽃으로 장흥에서만 썼다. 공력과 비용이 많이

                                          들어 대물림을 하여 썼다고 함.(1970년)

                                          ▲제 1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고싸움을 벌이는 장면으로 격렬한 고싸움 못지 않게 한복

                                          을 입은 여성들의 응원도 열렬함. (1970년)

 


 

 

                                          ▲제1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암고와 숫고가 결합하는 순간 장면. 암고의 편장이 숫고를 받

                                          아들이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이채로웁(1970년)제11회 예술경연대회에서 줄당기기를 하는 장면.
                                          ▲맨 앞쪽 웃옷을 벗은 분이 당시 편장을 맡았던 장흥읍 행원리 故정철수 씨임. 80년대 초반까지

                                          고싸움을 지도함.(1970년 광주)

 

 

 

 

                                          ▲3. 제26회 군민의날 보림문화제(1996년)1996년 장흥서초등학교에서 올라오고 있는 서부고.
                                          ▲고싸움을 하기 전에 고를 아우르고 있는 동부고.

 

 

 

 

 

                                          ▲6. 제39회 군민의 날 보림문화제(2009년, 양기수 송기태 제공)고싸움줄당기기에 사용되는 덕석기

                                          로 장흥읍 동동리에서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것임. 긴 장대 꼭대기를 짚으로 감싸고 황, 청, 백, 적,

                                          흑의 오방색 드림을 묶어 균형을 잡음.

 

 

 

 

                                          ▲1994년 4월 20일 행원마을 분들이 고를 만들기 위해 기본 새끼 줄꼬기를 하는 모습.

                                          ▲기본 새끼줄로 3합의 줄을 만듦.

 

 

 

 

 

▲3합 줄을 다시 3합하여 9합의 줄을 만드는 모습.▲9합의 줄을 다시 3합하여 27합의 줄을 만듦.

 

 

 

 

 

 

▲27합의 줄을 다시 3합하여 81합의 줄이 되어 고 모양을 이룸.▲81합이 된 고를 접어 몸통을 만듦.

 

 

 

 

 

 

                                          ▲고머리에 대나무를 넣고 새끼줄로 다시 감아 고의 모양을 만들면서 고싸움을 할 때 쉽게 부셔지

                                          지 않도록 보강함.

                                          ▲완성된 서부고. 군민회관 앞에서 고를 떠멜 장정들을 기다리는 1994년 5월 1일의 아침.

 

 

 

 

출처 : http://www.jhtoday.net/news/articleView.html?idxno=5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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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장흥전통인문학문화강좌’-장흥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글-이경엽(목포대학교)

 

 

 

 

 

1. 장흥 고싸움줄당기기를 주목하는 이유
2. 장흥 고싸움줄당기기의 진행과정
3. 다른 지역 사례와의 비교와 특징

 

1. 장흥 고싸움줄당기기를 주목하는 이유

줄다리기가 2015년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이에 대한 관심이 확대되었다. 당시 한국·베트남·캄보디아·필리핀 등 아태지역 4개국 줄다리기가 공동등재될 때, 관련 국가들이 협력해서 준비한 점과 벼농사문화권의 대표적인 전통문화라는 점이 주목받았다. (유네스코 제10차 무형유산보호협약 정부간위원회(나미비아 빈트후크, 2015.11.30~12.4)에서 한국, 베트남, 캄보디아, 필리핀이 공동등재 신청한 '줄다리기'(Tugging rituals and games)를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이와 관련해서 문화재청에서는 “위원국들이 아시아·태평양 지역 4개국이 협력하여 공동 등재로 진행한 점과 풍농을 기원하며 벼농사 문화권에서 행해진 대표적인 전통문화로서 줄다리기의 무형유산적 가치 등을 높이 평가했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공동등재된 한국의 줄다리기에는 영산줄다리기(국가무형문화재 제26호)․기지시줄다리기(국가무형문화재 제75호)와 삼척기줄다리기(강원도 무형문화재), 감내게줄당기기․의령큰줄땡기기․남해선구줄끗기(이상 경남도 무형문화재) 등이 포함됐다. 인류무형유산 등재를 전후해서 관련 지자체와 정부에서 국제학술회의를 비롯한 각종 행사를 의욕적으로 추진했으며, 등재 이후에는 줄다리기축제의 글로벌화를 기획하고 사회적 이슈와 관련된 행사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기지시줄다리기 홈페이지(http://www.gijisi.com/)

줄다리기가 공동등재된 이후 다른 나라 줄다리기에 대한 관심도 늘어났다. 한편 줄다리기 관련 연구를 되짚어보면 외국 줄다리기와의 비교는 공동등재 문제와 별개로 이른 시기부터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최인학, 「줄다리기에 관하여 <한일비교연구의 일고찰>」, 『한국민속학』6, 민속학회, 1973., 송화섭,「동아시아권에서 줄다리기의 발생과 전개」, 『비교민속학』38, 비교민속학회, 2009., 지춘상, 「한국과 오키나와 줄다리기의 성희성」, 『동아시아 민속학』, 민속원, 2010.)
여기에서 특기할 점은 한국 줄다리기의 구체적인 사례로 장흥 줄다리기가 거론되었다는 사실이다. 지춘상 교수는 1970년부터 장흥줄다리기(1970년 제1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장흥 보름줄다리기’라는 이름으로 출연했다. 전년도 대회에서 ‘광산고싸움’이 대통령상을 수상한 까닭에 전남에서 연이어 큰 상을 받는 게 부적절하다는 의견에 밀려 2등상인 국무총리상을 수상했지만 큰 관심을 끌었다고 한다. 이렇듯 장흥 고싸움줄당기기가 알려지면서 장흥이 줄다리기의 ‘본향’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의 색다른 면모를 학계에 소개한 바 있고(지춘상, 「전남의 민속놀이에 관한 조사연구(1)-줄다리기를 중심으로-」, 『호남문화연구』5, 호남문화연구소, 1973., 지춘상, 「줄다리기와 고싸움놀이에 관한 연구」,『민속놀이와 민중의식』, 집문당, 1996.)
오키나와 줄다리기와 상세하게 비교하고 특징을 살핀 적이 있다.(지춘상, 「한국과 오키나와 줄다리기의 성희성」, 『동아시아 민속학』, 민속원, 2010.)

이처럼 장흥의 줄다리기는 비교적 이른 시기 주목받았지만, 정작 근래의 유네스코 관련 논의에서는 관심 밖에 놓여 있으며 외부에서는 그 존재마저 모르는 경우가 있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까닭에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장흥 고싸움줄당기기는 오래되고 특별한 무형유산이다. 글쓴이와 양기수 등이 학술조사를 하고 흩어져 있던 여러 자료들을 정리하고 분석한 뒤 단행본을 발간한 바 있다.(이경엽․양기수․이옥희, 『장흥고싸움줄당기기』, 장흥문화원, 2014.)
장흥 고싸움줄당기기는 고을축제의 전통을 잇고 있는 공동체놀이로서 남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 그것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계승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장흥 고싸움줄당기기는 현재도 연행되고 있지만 안정적인 전승기반을 갖추고 있지 못한 까닭에 앞으로의 계승을 위해서는 새롭게 전승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 장흥 고싸움줄당기기를 색다르게 주목하고 지역사회의 관심을 촉구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장흥 고싸움줄당기기’란 명칭에 대해 설명해둘 필요가 있다. 장흥에서는 예전부터 ‘고쌈’ 또는 ‘고싸움’, ‘고줄쌈’, ‘고줄놀이’란 말을 사용해왔고, ‘고줄 고향 장흥’이란 표현도 써왔다. 또한 ‘줄당긴다’, ‘줄땡긴다’란 말도 사용해왔다. 이 명칭들에는 고를 갖고 싸우거나 줄을 당기며 논다는 뜻이 담겨 있다. 또한 ‘고+줄’이란 말에서 보듯이 고싸움과 줄다리기가 별개가 아니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널리 알려진 대로 고싸움과 줄다리기는 놀이 방식이나 원리가 다르므로 구분된다. 대표적인 사례로 광주칠석고싸움의 경우 고싸움과 줄다리기는 완전히 구분된다. 그러나 장흥에서는 두 놀이를 따로 하지 않는다. 또한 ‘고쌈’이 ‘줄당기기’의 예비 놀이에 그치지 않고 비중 있는 놀이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므로 두 놀이 중 하나만 지칭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할 수 없다. 주민들 스스로 ‘고쌈한다’는 말을 자연스러워 하고 선호하며, 고싸움의 연속선상에서 줄당기기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이런 점을 두루 수용한 명칭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이전에 학계에 소개된 ‘장흥 보름줄다리기’란 말은 1970년도부터 사용되었는데, 그 명칭은 지춘상 교수의 언급에서 보듯이 당시 임의적으로 정한 것이다. 지춘상, 「장흥 줄다리기의 민속학적 가치」, 學堂 ’96, 장흥학당, 1997. “출연할 당시 줄다리기 제목을 정하는데 장흥줄다리기로 할 것이냐, 아니면 다른 걸로 할 것인가 의논하다가 ‘노인들이 보름날 줄다리기를 한다고 하므로 「장흥보름줄다리기」로 하는 것이 좋겠다’ 하는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 장흥보름줄다리기라는 이름을 갖고 나갔다.”
그러므로 다소 혼란이 있을 수 있으나 실상을 반영한 명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름 자체가 다른 지역과 다른 특징을 담고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두루 고려하고 주민들이 선호하는 명명을 하고자 2014년에 장흥문화원이 마련한 간담회에서 ①지역 특색을 살린 명칭, ②다른 지역과 변별되는 브랜드화된 명칭, ③어감을 고려한 명칭 등의 기준을 마련하고 의견을 나눈 끝에 ‘장흥 고싸움줄당기기’란 이름을 선택하기로 했다.

2. 장흥 고싸움줄당기기의 진행과정

근래의 고싸움줄당기기는 ‘장흥 군민의 날 및 보림문화제’의 일환으로 실시되고 있다. 1930년대 후반 이후로 한동안 중단되었다가 1970년도에 재현되었다. 그해 4월 15일에 예양강변에서 열린 ‘제1회 보림문화제’에서 30여년 만에 재현된 후, 같은 해 7월에 광주에서 열린 제1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전남대표로 출연했다. 이후 한동안 격년제로 실시되다가 2017년에는 6년만에 재현되었다. 이렇듯 요즘의 고싸움줄당기기는 간헐적으로 ‘형식적으로 재현’되고 있지만, 1930년대까지는 매년 정월에 성대하게 펼쳐지던 고을축제 자체였다.

 

 

<그림> 전라도 장흥부 지도. 그림 중앙의 예양강(탐진강)을 경계로 동교 아래 쪽 모래사장에서 서쪽의 부내면과 동쪽의 부동면을 중심으로 인근 지역까지 망라한 고싸움줄당기기가 펼쳐졌다.

 

과거 장흥읍 일원에서 전승되던 고싸움줄당기기는 전통적으로 고을의 읍치(邑治)에서 이루어지던 고을형 줄굿에 속한다. 장흥 고싸움줄당기기의 편 구성은, 조선시대 읍치의 상황과 연관돼 있다. 탐진강(예양강)을 경계로 서부편(남외․교촌․충렬)과 동부편(행원리․신산리)으로 나뉘어서 줄다리기를 했으며, 인근 지역민까지 합세해 수천, 수만 명에 이른다.’고 할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했는데, 지춘상(1973), 87~88쪽.
이와 같은 편 구성은 방위 개념만이 아니라 치소의 전통과 관련돼 있었다. 이 구도는 20세기 행정구역 개편 후에도 부내면(장흥면)과 부동면 간의 대결로 이어졌으며, 이전 시기와 마찬가지로 인근 지역 주민들까지 합세해서 대규모로 펼쳐졌다.

 

 

1970년4월15일 제1회 보림문화제에서 재현된 고싸움줄당기기.

(강수의, 「사진으로 본 장흥 100년사」에서 전재)

 

 

1970년4월15일 제1회 보림문화제에서 재현된 고싸움줄당기기.

(강수의, 「사진으로 본 장흥 100년사」에서 전재)

 


장흥 고싸움줄당기기는 읍치의 고을축제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규모가 남달랐다. 놀이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한 지춘상 교수의 글에서 보듯이 참여인원과 구경꾼들이 수천, 수만 명에 이른다고 할 정도로 규모를 자랑했다.(지춘상(1973), 88~95쪽.)

장흥의 줄은 고머리 부분이 특이하며 고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이 특징이다. 줄이 완성되면 4~5m길이의 멜대 7~8개를 묶고 거기에 세로로 나무를 세워 층층이 수십 개의 청사초롱을 매단다. 그리고 고머리가 처지지 않게 하기 위해 45도 각도로 세워 밧줄로 묶어 놓는다. 줄을 메고 행진할 때에는 토반에 해당하는 한량과 기생들이 줄 위에 올라타서 줄다리기 설소리를 하고 춤을 춘다. 과거에는 장흥현 관아의 동헌(東軒) 뜰에 들어가서 인사를 한 뒤 예양강변으로 이동해서 본격적인 놀이를 펼쳤다. 재현 이후에도 이런 방식이 이어져서 거리 행진을 한 뒤 줄판에 도착하면 군수를 비롯한 기관장을 태운다.

예양강변 모래판에 이르러 분위기가 고조되면 청사초롱 장식을 해체하고, 장정 10여 명이 웃옷을 벗어젖힌 후 줄 위에 올라타서 기세를 돋우며 ‘고쌈’을 하게 된다. 줄 위의 지휘자가 “밀어라”하는 명령을 내리면 줄을 멘 사람들이 일제히 멜대를 두 어깨로 떠받치면서 돌진해서 상대방의 고에 부딪친다. 고가 맞닿으면 줄 위에 탄 장정들이 상대방의 고를 누르고 또 땅 위로 밀어 떨어트리려 한다. 광주칠석고싸움과 달리 고머리에 대나무를 넣지 않고 ‘굉갯대’도 없이 장정들이 어깨로 떠받치고, 앞사람이 땅에 떨어지면 뒷사람이 고를 받치고 또 그 뒷사람이 계속적으로 올라타기 때문에 수십 명의 장정들이 엉켜 혈전을 벌인다. 상대방의 고머리를 누르고 또 줄을 땅에 닿게 하면 승부가 끝나는데 그 경기 방법이 대단히 치열하고 격렬하다.
고싸움이 끝난 뒤에는 줄에 달린 멜대를 제거하고 줄당기기를 한다. 고싸움에서 진편이 양 어깨에 줄을 메고 전진, 후진을 거듭하면서 응전을 촉구하고, 서로 어우러지면 양 쪽 고머리를 댔다 떼었다를 반복한다. 그리고 줄을 결합한 뒤 줄당기기를 하는데 한쪽에서 끌려갈 경우 지휘자가 “깔아라”는 호령을 내리면 일제히 줄을 깔고 앉는다. 그러면 양편이 모두 줄 위에 앉아서 어깨로 상대의 몸을 밀쳐내는 ‘밀치기’를 한다. 이렇듯 자기편이 유리하면 당기고 불리하면 깔기와 밀치기를 계속하니 쉽사리 승부가 나지 않는다. 요즘에는 시간을 정해 줄당기기를 하기 때문에 깔기를 하지 않고 승부를 겨루지만 예전에는 깔고 밀치기를 거듭하며 몇 날을 끌었다고 한다. 줄당기기의 결과 서편이 이겨야 풍년든다고 하지만 이에 구애되지 않고 서로 이기려고 격렬하게 대결한다. 승부가 가려진 뒤 과거에는 거름으로 쓰기 위해 줄을 가져가기도 했으나 재현 이후에는 보관해두었다가 이듬해 보수해서 사용하고 있다.
이상에서 본 대로 장흥 고싸움줄당기기는 격렬하고 시끌벅적한 집단놀이의 전형을 보여준다. 물론 그 강도가 과거보다 약해지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 본래 정월 대보름 무렵에 하던 세시풍속놀이지만, 재현 이후에는 군민의 날에 열리는 보림문화제의 일환으로 전승되고 있다. 자발적으로 조직화해서 연행하던 공동체 민속이 행사화 돼서 전승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장흥도 여느 농촌지역과 다를 바 없이 젊은 인력이 많지 않아 인원 동원과 고줄 제작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지만 고싸움줄당기기에 대한 주민들의 자부심이 대단하고 계승 의지도 강한 편이다. 예전에 비해 전체적인 분위기가 위축되었지만 현행되는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다른 지역 사례와의 비교와 특징

1)다른 지역 사례와의 비교
 줄다리기는 종류가 다양하다. 지역에 따라 줄의 형태나 놀이 방식에서 차이가 있다. 전국적으로 줄(고)을 이용한 놀이가 여럿 있지만 형태로 보면 외줄형/쌍줄형/이형(異形)으로 나눠진다. 쌍줄다리기와 고싸움은 쌍줄형에 속하며, 게줄다리기는 이형에 속한다. 외줄다리기는 전국적으로 분포하지만 서해안 쪽에 집중돼 있다. 고싸움은 장흥, 광산, 남평, 강진 등 전남지역에서 주로 전승되고 있고 게줄다리기는 경기도・강원도・경상도(과천, 삼척, 밀양, 울진 등)의 몇몇 지역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다.
장흥 고싸움줄당기기에는 그 명칭에서 보듯이 고싸움과 쌍줄다리기가 함께 있다. 장흥 고싸움줄당기기의 특징을 파악하기 위해 다른 지역 자료와 비교할 필요가 있다. 현행되는 사례 중에서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자료를 중심으로 대비하기로 한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고싸움・줄다리기 현황
<명칭/지정번호/전승지역/지정일>
영산 줄다리기/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26호/경남 창녕군 영산/1969.2.11
칠석 고싸움놀이/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33호/광주시 광산구/1970.7.12
기지시 줄다리기/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75호/충남 당진군/1982.6.1
삼척 기줄다리기/강원도지정 무형문화재 제2호/강원도 삼척시/1976.6.17
감내 게줄당기기/경상남도지정 제7호/경남 밀양시/1983.8.6
의령 큰줄땡기기/경상남도지정 제20호/경남 의령군/1997.1.30
남해 선구줄끗기/경상남도지정 제26호/경남 남해군/2003.6.7

 

국가지정 자료는 세 건이고 지방지정 자료는 네 건이다. 명칭이 조금씩 다르고 놀이방법도 약간 차이가 있지만 줄다리기 유형에 속하는 민속놀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지정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영산줄다리기, 광산 칠석고싸움놀이, 기지시 줄다리기가 규모로 볼 때 우리나라 고싸움・줄다리기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만하다. 지방지정 자료 중에서는 경남의 사례가 관심을 끈다. 경남의 경우는 지자체의 적극적인 역할을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자생적인 전승력이 약화된 상태에서 문화재 제도를 활용해 전통을 보존하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비교의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장흥과 규모나 성격이 서로 통하는 국가지정 무형문화재를 구체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 지역 자료의 연행시기와 유형, 전승현황 등을 중심으로 주요 내용을 간추려 대비해보면 다음의 표로 정리된다.

지역별 비교

 

<명칭/연행시기/유형/놀이방법/전승현황>

장흥고싸움줄당기기/정월 대보름→5월/고을형/고싸움-줄다리기
군민의 날 행사의/시연 종목(불규칙)영산줄다리기/정월 대보름→3월 초/고을형/줄다리기
3・1문화제의 핵심 종목 칠석고싸움/정월 대보름/마을형/고싸움-(줄다리기)
고싸움놀이축제기지시줄다리기/윤년 날받이 →윤년 음력3월초/고을형/줄다리기/기지시 줄다리기 축제

 

위에 든 사례들은 한국을 대표하는 민속놀이로 꼽히는 종목들이다. 유서 깊은 전통축제로서도 그렇고 규모도 성대하다. 비슷한 점도 있지만 각기 지닌 역사적 맥락이나 전승기반의 차이에 따라 서로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세세한 부분들은 차치하고 유형, 놀이방법, 전승현황 등을 중심으로 비슷하고 다른 점을 얘기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지역별 비교를 통해 장흥 고싸움줄당기기의 남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2) 장흥 고싸움줄당기기의 특징

(1)고을형 축제 전통의 전형
줄다리기는 전승범위와 규모를 기준으로 볼 때 마을형과 고을형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가 마을 내 또는 마을 간에 벌어지는 것이라면 후자는 고을 단위에서 수행되는 것이다. 마을형 줄다리기는 마을 내 골목길을 기준으로 편을 가르거나 인접 마을끼리 편을 나눠 승부를 겨룬다. 이에 비해 고을형은 마을형을 크게 확대시킨 것이며 마을형과 달리 ‘큰줄다리기’라고 불린다. 고을형은 조선시대 읍치(邑治)가 있던 고을에서 전승하는 까닭에 참여하는 마을이나 놀이꾼・구경꾼들의 숫자가 수천 명에 이를 정도로 큰 규모로 진행된다.
무형문화재 중에서 고을형에 속하는 것은 영산줄다리기와 기지시줄다리기를 들 수 있다. 전통적으로 영산 줄다리기는 ‘영산 읍치’를 중심으로 벌어졌고 그 놀이들꾼은 이른 바 ‘읍4리’라고 하는 교리, 성내, 동리, 서리 등 네 개의 자연마을 사람들이다. 교리와 성내가 동편, 동리와 서리가 서편을 이루며, 인근 지역 주민들까지 합세해서 큰 규모로 승부를 겨룬다. 기지시 줄다리기는 현재의 모습을 보면 규모가 상당하지만 읍치가 아닌 5일장이 서던 시장의 상인들이 주도하던 것이어서 성격이 조금 다르다. 기지시는 과거 면천군(沔川郡)의 남쪽과 서쪽 사람들이 한양을 가기 위해 통과하는 교통의 요지이며 시장이 서던 곳이다. 기지시에서는 시장경제의 번성을 촉진하기 위해 줄다리기가 연행했다. (이인화, 「무형문화재 제75호 기지시 줄다리기의 사회환경적 재검토」, 한국사진지리학회지제19권 4호, 2009, 163~164쪽)

이것으로 볼 때 기지시는 엄밀한 의미에서 고을형에 포함된다고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장흥에서는 읍치 지역답게 큰 규모의 고싸움줄당기기가 전승되었다. 고싸움줄당기기가 전승되는 장흥읍 지역은 조선시대 지방관청 중에서 상급기관에 해당하는 부(府)의 치소가 있던 곳이다. 그런데 장흥의 경우 다른 지역 사례와 다른 조건을 하나 더 갖고 있었다. 장흥에는 동일 관내에 두 개소의 관아가 있었다. 장흥도호부의 관아가 부내면 쪽에 있었고, 치소 동쪽에 ‘장흥-강진-해남-진도’로 이어지는 역로(驛路)를 관장하는 벽사도(碧紗道)가 자리하고 있었다. 9개의 속역을 거느린 벽사찰방(碧紗察訪:종6품)은 품계는 낮았으나 관할 업무가 달라서 도호부사(都護府使:종3품)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지 않았다. 이처럼 소속이 다른 두 기관이 서쪽과 동쪽에 자리하고 있어서, 두 기관 간의 경쟁 구도가 형성돼 고싸움줄당기기가 더 성대하게 치러졌다고 전한다. 일반적인 읍치 줄다리기와 달리 장흥에서는 장흥부사와 벽사도찰방 사이의 경쟁 구도가 더해져 더 역동적인 줄다리기가 전승되었던 것이다.
장흥 고싸움줄당기기의 전통을 보면 관아와의 관련성이 잘 나타난다. 서부와 동부 고가 행진을 하면서 관아에 들러 인사를 했다든가(東軒 參拜), 양 고 위에 원님들(장흥부사, 벽사도찰방)을 태웠다든가 하는 구술 속에 읍치 줄다리기와 관련된 설명이 담겨 있다. 1895년에 역참제도가 폐지된 후에도 동서부의 고가 도호부 동헌에 들러 가는 행진은 계속되었다. 이런 전통은 1970년도에 줄다리기가 재현된 뒤에 군수나 경찰서장 등의 기관장을 고 위에 태워 행진하는 연유가 되기도 했다.
또한 예전에 원도리와 남외리에서 각각 동부고와 서부고를 제작했던 것도 이 마을들이 치소와 직접 관련된 지역이라는 것과 연관 있다. 1970년도에 고싸움줄당기기를 재현한 뒤로는 행원리에서 고를 제작하지만 이전 시기에는 서부고는 남외리, 동부고는 원도리에서 주도해서 만들었다고 전한다.

 

 [동부 어느 마을에서 줄을 걷어왔나요?] 행원리, 원도리, 축내리, 상리, 관덕리, 당정이, 해당쟁이(해당리), 월평, 신기, 금성(금산리) [왜 이 곳에서 동부고를 드렸답니까?] 예전에 여기 위에 찰방이 있었어요. 역졸들이 원도리에서 다 살았어요. 원도리가 205번지가 많아요. 그런데 그곳이 역졸들이 살던 집터예요. 205번지 내에서 차근차근 나갔어요. 찰방이 여기 위에 있어서 어사 출두하면 역졸들이 전부 나간다는 말을 들었어요. 축내 관덕 위에 비가 있었는데 그 비를 교도소 앞으로 다 옮겼어요. [이곳에 역졸들이 살았기 때문에 줄을 드리기에 유리했던 모양이네요?] 예. - 2013,2, 장흥읍 원도리 손영근(남, 87세) 면담

 

 위의 구술을 보면 원도리에서 동부 줄을 제작했던 이유가 나온다. 동부에 속하는 여러 마을에서 새끼줄을 모아오면 원도리에서 큰 줄을 완성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유로 벽사역 찰방에 소속된 역졸들이 원도리에 많이 거주했던 사실을 거론하고 있다. 관아에서 주관 또는 후원하던 고을 축제의 배경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서부고를 제작하던 남외리도 이와 비슷한 사정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장흥 고싸움줄당기기의 편 구성 방식은 행정구역 개편 이후에도 비슷하게 이어진다. 위의 구술에 나오는 것처럼 찰방의 관할 하에 있던 동부는 부동면으로 바뀌고, 서부는 장흥면으로 바뀐다. 그리고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행정구역이 아닌 방위에 따른 편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

읍치 행정기관 기반의 편 구성

조선후기-부내방(도호부) 부동방(벽사도)
20세기 초-장흥면 부동면
20세기 중반 이후-서부 동부

장흥 고싸움줄당기기는 읍치 행정기관에 기반을 둔 편 구성을 잘 보여준다. 한말에 조선시대 행정구역이 폐지되면서 벽사도(역)가 사라지지만 이전의 편 구성 방식이 달리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20세기 초에는 강 서쪽에 자리한 장흥면과 동쪽의 부동면 간의 대결로 이어지며 두 지역이 장흥읍으로 통합된 뒤로는 서부/동부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1970년도에 재현돼 보림문화제 행사로 이어지고 있는 현행 줄다리기도 동일한 방식으로 지속되고 있다. 예전 고싸움줄당기기를 기억하는 노인들의 구술 속에 벽사역이 등장하거나, ‘장흥과 부동’ 간의 대결 구도에 대한 설명이 들어 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라고 할 수 있다.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편 구성이 달라졌지만 읍치 고을 축제의 전통이 기반에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장흥 고싸움줄당기기가 고을 축제로 진행됐다는 것은 작은 줄과 큰 줄의 관계를 통해서도 설명할 수 있다. 장흥읍만 하더라도 예전에는 마을 내 또는 마을 간에 작은 규모의 줄다리기를 하는 곳이 여럿 있었다. 행원리에서는 내동(암줄)과 외동(수줄) 간에 줄다리기를 했으며, 원도리는 원도와 상리, 남외리는 남외・교촌과 충열 간에 줄다리기를 했다. 이렇게 마을 단위의 줄다리기가 끝난 뒤에 그 줄을 해체해서 동부/서부 간의 큰 줄다리기로 확대해서 연행했다. 서부 쪽에 속한 마을들은 남외리로 줄을 모으고, 동부 쪽에 속한 마을들은 원도리로 줄을 모아서 큰 줄을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골목 고싸움줄당기기기’가 고을의 ‘큰 고싸움줄당기기’로 확대되었던 것이다.

 

장흥의 ‘큰 고싸움줄당기기’
<구분/명칭/중심마을(고 제작)/참여마을/인근 군민 참여/1970년 이후 고 제작 마을>
서편,암고/장흥 고/남외리/교촌리,충열리,동동리,남동리,예양리,연산리등/강진,영암군민 가세/행원리
동편,숫고/부동 고/원도리,행원리,기양리,건산리,축내리,관덕리,상리 등/보성,고흥군민 가세/행원리

 

 위의 표는 1930년대까지 이루어지던 장흥의 큰 줄당기기의 모습이다. 마을 단위의 고싸움줄당기기를 하고 난 뒤, 고을 단위로 크게 확대해서 놀이판을 만들어 축제를 펼치는 형태를 보여준다. 여기에서 보듯이 장흥 고싸움줄당기기는 작은 고(줄)가 큰 고(줄)로 확대되는 고을형 축제의 전형적인 모습을 잘 보여준다.
물론 이런 방식이 현재도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20세기 중반까지도 마을 단위의 줄다리기가 있었으나 지금은 전승하는 마을이 없다. 또한 강진, 보성 등지의 인근 지역 주민들이 참여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을마다 새끼줄을 걷어서 한 곳으로 모아 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교부받은 예산으로 한 마을에서 줄을 제작하고 있다. 놀이꾼도 마을마다 할당된 인원들이 나와 편을 짜서 승부를 겨루는 것으로 바뀌었다. 1970년도에 장흥 ‘보름줄다리기’가 재현된 이후 예전 방식대로 편 구성을 하는 형식을 유지하고 있으나, 내용상으로는 많은 변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2)성대한 규모와 놀이과정의 역동성
장흥 고싸움줄당기기의 성대한 규모는 위에서 설명한 고을형 축제의 전통과 관련 있다. 관아의 후원을 받고, 행정관청 간의 경쟁심리가 담겨 있어서 더욱 큰 축제로 확장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배경으로 인해 참여하는 마을들이 많고, 인근 지역까지 포괄한 큰 규모의 승부로 펼쳐졌으며, 참여하는 놀이꾼의 인원수나 줄의 규모 등이 남달랐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 초의 기록을 통해 장흥 줄다리기의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鉦鼓喧喧號令明 징 북소리 시끌벅적 호령소리 분명하니
東西形勢兩分生 동서의 형세 두 편으로 나뉘어 일어나네
龍爭虎鬪千斤力 용과 호랑이 천근의 힘으로 다투어 싸우고
地塌天崩萬仞聲 땅과 하늘 만인의 소리로 기울고 무너지네
管束衆心團體進 뭇 사람들 마음 단속하여 단체로 나아가며
指揮隊伍密行成 대오를 지휘하여 빈틈없이 행렬을 이루었네
一場勝負宜常事 한마당의 승부야 마땅히 보통의 일이니
較這兵家摠是情 이것을 병가에 견준다면 다 이런 마음이라네
(<戊午正月次白兄索戰韻>, 『소천유고(小川遺稿)』)(김희태(전라남도청 문화재전문위원) 선생이 발굴한 자료 중의 하나다. 김 위원에 의하면 장흥 줄다리기의 옛모습을 보여주는 역사자료는 사진 1점, 한시 2점이 있다.)

장흥 유림 이인근(李寅根, 1883~1949)의 시에 묘사된 무오년(1918년) 줄다리기의 모습이다. ‘용과 호랑이 천근의 힘으로 다투어 싸우고’, ‘땅과 하늘 만인의 소리로 기울고 무너지네’와 같은 표현 속에서 장흥 줄다리기의 규모를 어렵지 않게 떠올려 볼 수 있다.
장흥 고싸움줄당기기가 큰 규모로 펼쳐진 배경에는 지역의 경제적 기반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0세기 이후에도 고을형 축제가 지속된 것은 고을 공동체의 전승기반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수백 명의 놀이꾼들이 참여하는 큰 행사답게 지역의 향반 부호들의 후원이 있었을 것이다. 동부고와 서부고가 행진할 때 지역의 유지・한량들과 기생들을 태우고 기세를 돋우곤 했다는 데서 그런 정황을 읽을 수 있다. 지춘상 교수의 설명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다른 지역과 달리 장흥에서는 비교적 토반 측에 속하는 사람들만이 참여하고 또 줄 위에 탄 사람은 문벌과 재력을 어느 정도 겸비한 한량들이 평소에 가까이 지내던 기생들을 태우고’ 지춘상(1973), 97쪽.
행진을 했다고 한다. 토반과 재력을 갖춘 한량들이 줄다리기의 후원 세력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장흥 고싸움줄당기기의 경제적 배경과 관련해서 장흥시장 상업 세력의 존재를 빼놓을 수 없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소화난장’ 때의 줄다리기다. 고로들에 의하면 소화(昭和)시대에 장흥시장의 개장과 번성을 위해 크게 난장을 벌였고 그때 고싸움줄당기기를 했다고 말한다.

 

줄다리기 할 때는 부동하고. 원래 줄은 남밖 삼리, 그리고 성안하고 행안 4개리하고 남정리 3개리하고 줄을 당겼어. 그리고 크게 당길 때는 부동하고 장흥하고 합칠 때 그때 크게 당기고. 소화난장이라고 그래. ……장을 완전히 복구했을 때가 ‘소화난장’이라고 했어. 거기에서 줄을 당겼어. 줄 당길 때는 어려서 못 갔어. 얘기만 들어봤어.- 2013.1.22.장흥읍 행원리 김문수(남,1920년생) 옹과의 면담

위의 인용은 1920년생의 고로가 전하는 말이다. 그는 장흥과 부동을 합할 때, 장흥시장을 개장했을 때 줄다리기를 했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십대 중반에 장흥시장이 복구・개장되었을 때 난장을 텄는데 그 때 줄다리기를 크게 했다고 한다. 그의 구술을 보면, 앞에서 설명한 바 있는 ‘골목줄다리기’가 ‘크게 당기는’ 줄다리기로 확대되는 과정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소화난장 때의 줄다리기가 전통 방식대로 큰 규모로 이루어졌음을 말하고 있다.
고로들이 말하는 소화난장은 소화 12년(1937년)의 줄다리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재열(남, 84) 옹에 의하면 이때의 줄다리기가 전통적인 것으로는 마지막이었다고 한다. 그는 장흥 줄다리기가 시장과 연관 있다는 설명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당시에는 강 이편하고 여기는 ‘장흥’이고 저 건네는 ‘부동’이었거든. 장흥하고 부동하고 고를 멘디 장흥 고는 암줄이고 저 건네 부동은 수줄이에요. …… 여기는 동편이고 저쪽은 서편인디 동편, 서편이라고 안 하고 ‘장흥 고’, ‘부동 고’라고 했어.
이 근방에서 유명한 고싸움이 되았거든. 강진고을, 영암고을은 여기 편이 되고 보성에서 고흥까지도 하듬만. 그 사람들은 저기 부동 편이 되아서 이쪽은 아조 카니발이었어. 장흥 고줄 영향으로 해서 장흥장은 ‘허천난 장’이라는 소리가 있어. 장에만 나오면 뭐든지 먹어버려. 왜냐하면, 고를 당그면 보름동안은 하거든. 하루 이틀에 끝내는 것이 아니여. 보름동안 그 행사를 해서 줄 당겨서 그것이 끝나버리는데, 그럴 때 모인 사람들이 지금같이 야전용 뭣이 있어 가지고 올 것이 없제. 그러니까 장흥 장에 있는 것은 뭐든지 나기만 하면 사 먹어버려. 고구마도 나오면 쪄가지고 가고 토란도 쪄가지고 가고 해서 내만 놓으면 구경꾼들이 다 사먹어준께. 못 사먹어서 난리가 나고 해서 그래서 허천난 장이라는 별명이 있었어.
- 2013.1. 장흥읍 연산리 김재열(남, 84세) 옹과의 면담

 

위의 인용에서 보듯이 장흥의 고싸움줄당기기는 장흥 관내의 행사에 그치지 않고 인근 강진, 영암, 보성 주민들까지 참여하는 축제였다고 한다. 또한 하루 이틀에 끝나지 않고 여러 날에 걸쳐 실시되고 모여드는 인파가 많아서 상인들이 내놓은 물건들이 나오는 즉시 팔려나갔다고 한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먹을 것이 나오면 사서 먹어서 ‘허천난 장’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고 한다.
‘소화난장’의 사례에서 보듯이 장흥의 고싸움줄당기기는 지역의 경제적 기반을 토대로 해서 더 활기차게 전승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런 배경으로 인해 화려하게 줄을 장식해서 행진을 하고 더 많은 놀이꾼들이 참여해서 격렬하게 고싸움과 줄다리기를 했다고 할 수 있다.

 

정월 대보름날, 아침밥이 끝나면 농악대가 놀이꾼들을 끌어들인다. 5,6백 명의 놀이꾼들이 동원되면 휘황찬란한 청사초롱을 매달고 줄을 어깨에 메고 마을 앞을 돌아다니며 전의를 북돋기 위한 시위를 벌인다. 오후가 되면 줄 앞에 노인들이 켜든 횃불 20여 개를 앞세우고 줄다리기가 벌어질 탐진강을 향해 행진한다.
행군의 순서는 횃불 뒤에 수백 년 내려오는 큰 ‘덕석기’와 농기 및 영기가 뒤따르고 그 뒤에 농악대가 따른다. 농악대 뒤에 이 지방의 토반에 속하는 한량들이 호사한 옷차림과 머리에 수건을 옆으로 멋스럽게 동여매고 올라탄다. 그 뒤에는 평상시에 같이 놀던 명기 2,3명이 호사한 옷차림과 머리에는 특이한 고깔을 쓴 채 맨 앞의 기생은 줄다리기 노래의 설소리를 하고 그 외의 기생들은 춤을 춘다. 지춘상(1973), 92~93쪽.


위의 인용에서 묘사한 보름날 줄을 메고 행진하는 장면을 보면, 농악대의 연주와 덕석기・농기・영기 등의 깃발과 수십 개의 횃불이 앞장서고 휘황찬란한 청사초롱을 장식한 고가 뒤따르며, 고 위에는 한량들과 기생들이 올라타서 노래를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놀이꾼 수백 명이 참여하는 성대한 행렬이었으며, 다른 지역 줄다리기보다 규모가 크고 화려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장흥 고싸움줄당기기는 그 규모처럼 놀이 과정도 격렬하고 역동적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대동놀이가 억세게 펼쳐지는 것은 어디나 마찬가지지만 장흥의 경우 더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싸움 또는 줄다리기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반적인 격렬함만이 아니라 각 단계마다 놀이의 역동성이 부각되는 특징을 보여준다. 이런 점이 일반 사례들과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고(줄)을 메고 행진한 뒤에 총사초롱을 해체하고 난 다음 진(陣)잡이를 하는데, 이때에 장정 10여 명이 줄 위에 올라가고 두 세 명이 맨 앞에서 어깨로 고를 떠받치게 된다. 이어 양편의 고가 맞부딪치면서 고싸움이 상대편 고를 누르고 고 위에 탄 이를 떨어뜨리고자, 웃옷을 벗어젖힌 장정들이 맨몸으로 엉켜 싸우는 고싸움이 벌어진다. 그리고 멜대를 해체한 뒤에 고를 연결해서 줄을 당기는데, 줄이 끌려 갈 경우 일제히 줄을 깔고 앉는다. 줄을 끌어 당겨도 끌리지 않으므로 줄 위에 앉은 사람을 밀어내기 위한 밀치기를 한다. 또한 줄을 당길 때에는 여자들이 솔잎을 따다가 상대편 남자들의 손등을 찔러 힘을 못 쓰게 한다. 이와 같이 장흥의 고싸움줄당기기는 여느 줄다리기에 비해 대규모로 펼쳐지는 역동적인 편싸움 놀이라는 점이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장흥 고싸움줄당기기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고을형 축제의 전형적인 사례라는 점과 규모의 성대함, 놀이과정의 역동성이 남다르다는 것을 주된 특징으로 꼽았다. 이외에 청사초롱을 장식하는 문제, 낮에 하는데도 횃불을 들고 나오는 문제, 줄다리기 장소가 강변이라는 문제 등등을 더 구체적으로 다룰 수 있다. 세부적으로 보면 더 많은 특징들을 거론할 수 있으나 위의 설명 속에서 압축적으로 다루었다.

고싸움줄당기기는 장흥의 역사적 내력과 공동체의 기억을 담고 있는 무형문화유산이다. 조선후기 지역사와 연계돼 있고 20세기 격변기의 여러 상황과 연관돼 있다. 특히 고싸움줄당기기를 매개로 반일의식이 표출되었다는 이야기가 후일담으로 전하는데, 고싸움줄당기기가 당대의 특별한 역사적 경험과 연결돼 있다는 점에서 남다른 가치를 인정할 만하다. 그리고 ‘군민의 날 및 보림문화제’의 일환으로 재현되고 있고 지역 공동체의 정체성을 표상하는 상징으로 해석되고 있다는 점도 관심을 끈다. 하지만 지금의 고싸움줄당기기는 축제 자체로서가 아니라 형식적으로 시연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고싸움줄당기기의 온전한 계승을 위해 지역사회의 토론과 실천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 http://www.jhtoday.net/news/articleView.html?idxno=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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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김용승(1939~)

 

 

1939년 장흥군 장흥읍 신흥(연산) 에서 출생하여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졸업하였다.<수필문학>신인상으로 등단하였으며 월간<한사랑>수필, 안보연구소 교수부장을 지냈다. 군복무시<육군정훈교재>,<새마을교재 집필>외 다수 집필하였으며, 현재 동성기계산업공사 대표이사로 재직 중이다.

 

잣두 뜰에 추억을 묻고

 

내 고향 신흥!

늘 내가슴 한 가운데서 숨쉬는 양지 바르고 평화로운 산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는 아스라이 잊혀져 가던 고향이,

이마에 주름살 생기고,  백발이 심심찮게 찾아섞이니

웃모술, 아랫모술 고향집 골목들이 눈앞에서 선명하고

숨겨 두었던 그리움이 서럽도록 솟구치네

새암골, 가장골 모퉁이 약산등 산골, 불란멧등 수인산 모두들 정감 어린 고향의 얼굴일세.

 

출처_장흥별곡문학동인회'장흥의 문학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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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영래(1960~)

 

1960년 장흥군 장흥읍에서 출생하여 월간<문학공간>으로 등단하였으며, 광주대 사회교육원 시창작과를 수료하였다.

광주문인협회 회원, 백호문학회 동인으로 활동중이다.

 

직소폭포

 

푸르른 산빛

마신

 

산신령,

 

흰 수염만

드러내놓고

 

선정에 들다

 

햇빛 나부껴도

모르고,

모르고,

 

 

출처_ 장흥별곡문학동인회'장흥의 문학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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