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문화원

국가문화재 제 275호

장흥 방촌리 석장승 (長興 傍村里 石長栍

분 류 유물/기타종교조각/민간신앙조각/석조
수량/면적 2기
지정(등록)일 2013.06.14
소 재 지 전라남도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 572번지 등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장흥군
관리자(관리단체) 장흥군

장흥 방촌리 석장승은 관산읍에서 방촌으로 넘어가는 23번 국도변 양쪽에 서 있는 2기의 장승으로 고려말에 건립한 성문장승이라는 설과 조선시대 후기(17~18세기)에 창궐한 천연두를 퇴치하고자 세웠다는 설이 있다. 방촌리 석장승은 현재에도 마을에서 매년 정월 대보름에 동제인 별신제의 신격으로서 마을 수호의 기능을 하고 있어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있다.

 

자료출처: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18,02750000,36&pageNo=5_2_1_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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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1252호

상교정본자비도량참법 권9~10(詳校正本慈悲道場懺法 卷九∼十)

조선 세조 8년(1462)

2권 2책

목판본/간경도감본

1997.06.12

보림사

전남 장흥군

문화재형태

선장

 

1. 상교정본자비도량참법 권9 詳校正本慈悲道場懺法 卷九 - 상하단변(上下單邊), 광고(匡高) 26.0cm, 무계(無界), 전엽(全葉) 20행(行) 13자(字), 주쌍행(註雙行); 32.6cm×18.0cm

2. 상교정본자비도량참법 권10 詳校正本慈悲道場懺法 卷十 - 상하단변(上下單邊),광고(匡高) 26.0cm, 무계(無界), 전엽(全葉) 20행(行) 13자(字), 주쌍행(註雙行); 32.6cm×18.0cm

 

자료 출처 ; http://www.heritage.go.kr/heri/mem/selectSeojiDetail.do?s_code1=99&s_code2=11&s_code3=&s_query=&s_query2=&s_mnm=&s_kdcd=12&s_asno=12520000&s_cnum=0001&s_ctcd=00&s_dcd=&s_pcd=&s_page=1&s_hgsv=0&s_from_asno=&s_to_asno=&searchGubun=s_mnm1&searchCond=%EC%83%81%EA%B5%90%EC%A0%95%EB%B3%B8%EC%9E%90%EB%B9%84%EB%8F%84%EB%9F%89%EC%B0%B8%EB%B2%95&searchPage=1&pageIndex=1&searchPageSize=10&searchDisp=0&listGubun=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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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772-3호

분 류

기록유산/전적류/활자본/금속활자본

수량/면적

1권 1책

지정(등록)일

2002.08.05

소 재 지

전남 장흥군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보***

관리자(관리단체)

보***

 

금강경삼가해 권1(金剛經三家解 卷一)은 『금강경』에 대한 주석서 『금강경오가해』 중 송나라 야보(冶父)와 종경(宗鏡), 그리고 조선 전기의 고승인 기화(己和) 3인의 주석을 뽑아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성종 13년(1482)에 세조의 비인 자성대왕대비의 명에 의하여 본문의 큰 글씨는 정축자(丁丑字)로, 풀이 부분의 중간 글씨와 작은 글씨는 을해자(乙亥字)로 찍어낸 활자본이다. 활자본은 글자를 하나하나 파서 고정된 틀에 끼워 찍어낸 것을 말하며, 정축년에 찍어낸 것을 정축자본, 을해년에 찍어낸 것을 을해자본이라고 한다.

책 끝부분에 있는 한계희와 강희맹의 글에 의하면, 세종의 명을 받아 문종과 세조가 번역을 하였으나 교정을 마치지 못했던 것을 자성대비가 고승 학조(學祖)에게 다시 교정하게 하여 300부를 찍어낸 것임을 알 수 있다.

불경의 간행이 세종 때부터 성종 때까지 왕실사업으로 계승되었다는 점과 함께 한글의 표기형식이 혼용되어 있어 한글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자료 출처 ;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5_2_1_0&ccbaCpno=112360772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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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보물 제795호
명 칭 장흥 천관사 삼층석탑 (長興 天冠寺 三層石塔)
분 류 유적건조물/종교신앙/불교/탑
수량/면적 1기

지정(등록일)

1984-11-30
시 대 고려시대

 

 

천관사는 신라 진흥왕 때 통령화상이 창건한 사찰로, 천관보살을 모셨다 하여 천관사라 하였다. 바닷가에 위치하여 왜구의 칩입을 여러차례 겪은 탓에 그 규모가 점차 축소되어 현재는 천관보살을 모셨던 법당만 남아있다. 법당에서 조금 떨어진 오른쪽에 자리잡고 있는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이 고려시대의 탑이다.
탑신을 받치고 있는 기단은 아래·위층 모두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본떠 새겨두었다. 탑신은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쌓아 올렸으며, 층마다 몸돌의 모서리에 기둥 형태의 조각을 두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얇게 4단씩이고, 윗면에 흐르는 경사가 아래로 내려올수록 완만하며, 네 귀퉁이에서는 경쾌하게 치켜올라 세련된 느낌을 준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네모난 노반(露盤)과 둥그런 복발(覆鉢)이 한돌에 새겨져 올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비례감이 알맞아 안정감이 느껴지며 단아함을 풍긴다. 기단 각면의 가운데기둥이 생략되고, 지붕돌의 받침이 얇아져 퇴화된 수법을 보여주는데, 이는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시대가 바뀌면서 일부 양식이 지방화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들을 통해 이 탑은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자료 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www.ch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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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  목

 보물 제745-9호

 명  칭

 월인석보 권25

 분  류

 기록유산 / 전적류 / 목판본 / 관판본

 수량/면적

 1권 1책

 지정일

 1997년 06월 12일

 소재지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보림사로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보림사

 관리자(관리단체)

 보림사

 

 

 

 

 

 『월인석보』는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합하려 세조 5년(1459)에 편찬한 불교대장경이다. 석보는 석가모니불의 년보 즉 그의 일대기라는 뜻이다. 조선 세종 28년(1446) 소헌왕후 심씨가 죽자 세종은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아들인 수양대군(후의 세조)에게 명하여 불교서적을 참고하여 한글로 번역하여 편찬한 것이 곧 『석보상절』이다. 세종 29년(1447) 세종은 『석보상절』을 읽고 각각 2구절에 따라 찬가를 지었는데 이것이 곧 『월인천강지곡』이다. 『월인석보』는 완질이 현재 전하지 않으므로 전권의 수량은 확인할 수 없다. 월인석보 권25(月譜 券二十五)의 편찬 체제는 먼저 『월인천강지곡』을 배열하고 이어 여기에 해당하는 『석보상절』의 내용을 해설형식으로 실었다. 그렇지만 『월인석보』 편찬 때 기존의 『석보상절』의 내용을 그대로 수록한 것이 아니라 이를 수정, 보완하여 여러 경전에서 내용을 첨삭하여 싣고 있다. 이 권 25는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 있는데 권의 2장과 일부가 탈락되어 있다. 전체분량 5분의 2에 해당되는 전반부는 2~4수로 추정되고, 후반부는 『월인천강지곡』 577~583까지의 7수와 『석보상절』 권 24의 내용을 중심으로 싣고 있다. 『월인석보』의 총 권수는 24권 혹은 25권으로 추정되어 왔는데 이번에 권 25가 새로이 발견됨에 따라 『월인석보』가 전체 25권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밝혔을 뿐만 아니라, 조선 전기 한국불교 및 문헌학 연구에 새로운 전기를 맞는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자료 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www.ch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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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  목

 보물 제158호 

 명  칭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

 분  류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수량/면적

 1기

 지정일

 1963년 01월 21일

 소재지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산10-1

 시  대

 통일신라

 소유자(소유단체)

 보림사

 관리자(관리단체)

 보림사

 

 

 

 

 

  보림사에 있는 보조선사 지선의 탑비로,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보조선사(804~880)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로, 어려서 출가하여 불경을 공부하였으며, 흥덕왕 2년(827)에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을 받았다. 희강왕 2년(837) 중국으로 건너갔으나, 멀리서 구할 필요가 없음을 느끼고, 문성왕 2년(840)에 귀국하여 많은 승려들에게 선(禪)을 가르쳤다. 헌안왕 3년(859) 왕의 청으로 보림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77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왕은 그의 시호를 '보조선사'라 하고, 탑이름을 '창성'이라 내리었다. 비는 거북받침돌의 머리가 용머리를 하고 있어 이목구비가 뚜렷한 사나운 모습이며, 등 뒤에는 육각형의 무늬가 전체를 덮고 있다. 등 중앙에 마련된 비를 꽂아두는 부분에는 구름과 연꽃을 새겨 장식해 놓았다. 비몸돌에는 보조선사에 대한 기록이 새겨져 있는데, 김영이 비문을 짓고 김원과 김언경이 글씨를 썼다. 머릿돌에는 구름과 용의 모습을 웅대하게 조각하였고, 앞면 중앙에 '가지산보조선사비영'이라는 비의 명칭을 새겼다. 통일신라의 헌강왕 10년(884)에 세워진 비로, 당시 조형수준을 대표하는 뛰어난 작품이다.

 

 

자료 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www.ch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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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  목

 보물 제157호

 명  칭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 

 분  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탑

 수량/면적

 1기

 지정일

 1963년 01월 21일

 소재지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산10-1

 시  대

 통일신라

 소유자(소유단체)

 보림사

 관리자(관리단체)

 보림사

 

 

 

 

   보림사에 세워져 있는 사리탑으로, 보조선사의 사리를 모셔두고 있다. 보조선사(804~880)는 어려서 출가하여 불경을 공부하였으며, 흥덕왕 2년(827)에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을 받았다. 희강왕 2년(837) 중국으로 건너갔으나 문성왕 2년(840)에 귀국하여 많은 승려들에게 선(禪)을 가르쳤다. 헌안왕 3년(859)에 왕의 청으로 보림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77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왕은 그의 시호를 '보조선사'라 하고, 탑 이름을 '창성'이라 내리었다. 탑은 바닥돌부터 지붕돌까지 모두 8각으로, 통일신라 탑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탑신(塔身)을 받치는 기단(基壇)의 아래받침돌에는 구름무늬를 매우 입체적으로 조각하였고, 가운데받침돌은 아래위로 띠를 두른 약간 배가 부른 모습이다. 8개의 큰 연꽃조각 위에 놓여진 탑신의 몸돌은 앞·뒷면에 문짝 모양을, 그 양 옆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새겼다. 두터워 보이는 지붕돌은 밑면에 서까래를 표현해 놓았고, 윗면에는 기왓골이 깊게 파여져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 장식으로 완전한 모양은 아니지만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 보륜(寶輪:바퀴모양의 장식),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 등이 차례로 놓여 있다. 탑신의 몸돌이 지붕돌에 비해 지나치게 커 보이고, 지붕돌의 질감이 달라서 전체적으로 부자연스럽다. 일제시대 때 사리구를 도둑맞아 쓰러졌던 것을 복원한 바 있는데 이때 일부분이 손상되어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자료 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www.ch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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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  목

 보물 제156호

 명  칭

 장흥 보림사 서승탑

 분  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탑

 수량/면적

 2기

 지정일

 1963년 01월 21일

 소재지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봉덕신덕길 62-1

 시  대

 고려시대

 소유자(소유단체)

 보림사

 관리자(관리단체)

 보림사

 

 

 

 

 보림사의 서쪽에 있는 승탑 2기로, 보림사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나란히 세워져 있다. 하나는, 전체적으로 8각의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네모반듯한 바닥돌 위로 3단의 기단을 세우고 그 위에 탑신과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기단은 아래받침돌에는 2겹의 연꽃무늬를 새기고, 두껍고 넓은 가운데받침돌은 모서리마다 구슬을 꿰어놓은 듯한 기둥을 조각해 놓아 독특한 모습이다. 윗받침돌은 아래받침돌과 그 크기와 넓이가 비슷하며, 8장의 연꽃잎을 새겨두었다. 탑신의 몸돌에는 한쪽 면에 문짝 모양을 새기고 그 안에 자물쇠와 문고리 2개를 본떠 조각해 두었다. 지붕돌은 윗면의 경사가 꽤 급하며,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살짝 들려있다. 또 다른 승탑도 역시 전체적으로 8각의 평면을 이루고 있는데, 기단의 모습이 위에서 말한 승탑과 거의 비슷하다. 다만 가운데받침돌에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았고, 윗받침돌이 오른쪽 승탑보다 얇고 넓다는 점이 다르다. 탑신의 몸돌 한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짝을 새겼으며, 지붕돌은 대부분 깨어져 있어 그 원래의 모습을 볼 수 없음이 안타깝다. 위의 승탑이 완전한 형태를 지니고 지나치게 장식적인데 비해, 이 승탑은 우아하긴 하나 장식성이 떨어져 전체적으로 위축된 것처럼 보인다. 2기 모두 마무리 수법이 같으며, 만들어진 때는 고려 중기로 짐작된다. 머리장식은 모두 온전하게 남아있는데, 1941년 사리를 두는 장치가 도굴되어 1944년 다시 만들어 놓았다.

 

 

자료 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www.ch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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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  목

 보물 제155호

 명  칭

 장흥 보림사 동승탑

 분  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탑

수량/면적

 1기

 지정일

 1963년 01월 21일

 소재지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산10-1

 시  대

 통일신라

 소유자(소유단체)

 보림사

 관리자(관리단체)

 보림사

 

 

 

  보림사는 통일신라시대 선종 9산 중 가장 먼저 만들어진 가지산파의 중심사찰로, 헌안왕 4년(860)에 왕의 권유를 받아 체징이 창건하였다. 동부도는 보림사 동쪽 숲 속에 있는 여러 승탑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손꼽힌다. 승려의 사리를 두는 탑신(塔身)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3단의 기단(基壇)을 두고 위로는 머리장식을 얹었는데, 각 부분이 8각으로 깎여져 있다. 3단으로 된 기단의 맨아랫단과 맨윗단에는 8잎의 연꽃잎을 둘러 새기고 각 귀퉁이마다 꽃장식을 얹은 모습으로, 가운데는 8각의 기둥을 낮게 두었다. 탑신은 한 면에만 자물쇠가 달린 문짝 모양을 새기고, 지붕돌은 다른 부분에 비해 좁고 낮은 편이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중간에 둥근 기둥을 세우고, 위아래를 나누어 장식하였는데, 그 완전함만큼이나 세심한 정성을 기울인 흔적이 엿보인다. 전체적으로 탑신의 윗부분이 높게 이루어진 반면, 기단의 가운데받침돌이 작고 낮아 안정감이 떨어진다. 잘 정돈된 구조가 돋보이며 머리장식이 온전하게 남아있는 것도 이 승탑의 소중함을 더하고 있다.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졌으면서도 고려 전기의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승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자료 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www.ch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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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  목

 국보 제117호

 명  칭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분  류

 유물 / 불교조각 / 금속조 / 불상

 수량/면적

 1구

 지정일

 1963년 02월 21일

 소재지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보림사로 224

  시  대 

 통일신라

 소유자(소유단체)

 보림사

 관리자(관리단체)

 보림사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보림사의 대적광전에 모셔진 철로 만든 불상으로, 현재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를 잃고 불신(佛身)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불상의 왼팔 뒷면에 신라 헌안왕 2년(858) 무주장사(지금의 광주와 장흥)의 부관이었던 김수종이 시주하여 불상을 만들었다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어서 정확한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작품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달걀형의 얼굴에는 약간 살이 올라있다. 오똑한 콧날, 굳게 다문 입 등에서 약간의 위엄을 느낄 수 있으나 전체적으로 다소 추상화된 모습이다. 통일신라 전성기(8세기)의 불상에 비해 긴장감과 탄력성이 줄어들었고,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가슴 앞에서 U자형으로 모아지며, 다시 두 팔에 걸쳐 무릎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옷주름은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지만 탄력을 잃은 모습이다. 이런 형태의 표현은 신라 불상에서 보여주었던 이상적인 조형감각이 후퇴하고 도식화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9세기 후반 불상 양식의 대표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손은 왼손의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이다. 이 작품은 연대가 확실하여 당시 유사한 비로자나불상의 계보를 확인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며, 신라 말부터 고려 초에 걸쳐 유행한 철로 만든 불상의 첫번째 예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다.

 

 

자료 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www.cha.o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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