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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속의문화원/2021 언론보도

[언론보도자료]장흥 수리봉 위원량의 <망곡서望哭書> 암각문 해발 420m 고지 현장에서 고증 결과를 공개하다.

by 장흥문화원 관리자 2021. 3. 18.

장흥 수리봉 위원량의 <망곡서望哭書> 암각문

해발 420m 고지 현장에서 고증 결과를 공개하다

 

해동암각문연구회(회장 홍순석교수)와 장흥문화원(원장 고영천)이 (재)한국학호남진흥원 공모사업으로 2020년 11월부터 2021년 5월까지 공동사업으로 추진한 장흥암각문 조사 가운데, 전남 장흥군 수리봉 위원량(1882~1945)의 <망곡서> 암각문은 크게 주목받은 성과물이다. 관심이 지대한 만큼 시비의 논쟁도 있었다. 본 조사단이 처음으로 공개한 영상과 사진임에도 판독에 이견을 제시하였다. 이같은 문제점을 불식시키기 위해 조사단은 지난 2021년 3월 13일 현장에서 <망곡서> 탁본을 공개적으로 실시하였으며, 문헌고증의 결과도 공개하였다. 아울러 독립기념관 한시준 관장의 전화인터뷰도 가졌다. 이날 현장에는 조사단(5명) 외에 회은 위원량선생의 증손자 3인(위정복,영복,수복)과 장흥향토사연구가, 장흥위씨종인, 언론 기자 등 10여명이 참여하였으며, 간략하게 고유제告由祭를 올린 다음 탁본을 실시하였다.

 

위원량 망곡서 암각문 N34°42′55.7676 E126°52′48.4896

회은 위원량의 칠언절구를 새긴 암각문은 장흥군 부산면 내안리 내동과 구룡리 자미마을 뒷산 정상인 수리봉[鷲峰,412m] 암벽에 북향으로 새겨져 있다. 바위 면에 광곽을 얕게 파고 평탄하게 조성한 다음에 해서체 종서로 쓴 칠언절구 「登臨是日感斯」峰ㄷ是東邦守」義峰人多不守」峰能守可以人」兮不似峯」 28자를 음각하였다. 그리고 좌측에 「隆熙庚戌秋」 魏元良謹拜」 望哭書」라는 관지를 종서로 음각하였다. 판곽의 규모는 가로 85㎝, 세로 50㎝이다. 글씨 하나의 크기는 대략 가로 8.5cm×세로 9.5cm 정도이다. 관지의 내용은 “융희 경술년 가을에 위원량이 삼가 절하고 곡하며 쓰다.”이다. 융희隆熙 경술년庚戌年은 한일합병이 체결된 1910년이다.

 

수리봉 위원량 <망곡서>암각문 탁본 (원표시는 문헌에 달리 표기된 부분)

 

위원량 망곡서 암각문 현장공개 및 탁본(홍순석 교수)

 

위원량 망곡서 암각문 고유제(告由祭)

조사단장 홍순석 교수(강남대)가 공개한 <망곡서> 관련 문헌기록은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1929) 󰡔장흥지속록長興誌續錄󰡕(1939) 󰡔장흥지長興誌󰡕(1966) 3건인데, 문헌에는 「斯」자가 「於」로, 「多」자가 「之」「而」로 기록되어 있다. 장흥의 유학자 위원량이 경술 국치의 사실을 듣고 울분을 토로하고자 수리봉 정상에 올라와 칠언절구를 짓고, 암각문을 조성한 것이다. 칠언절구를 번역해 보이면 다음과 같다.

 

登臨是日感斯峰 오늘 올라와 이 봉우리에서 느끼나니

ㄷ是東邦守義峰 이 봉우리야말로 동방의 의를 지킨 봉우리네

人多不守峰能守 사람 많아도 못 지킨 것을 봉우리는 지키니

可以人兮不似峯 사람이 이 봉우리만 못하다고 할 수 있겠네

 

 

󰡔조선환여승람󰡕에는 회은 위원량의 <송암정 松巖亭> 시도 수록되어 있는데, <망곡서>와 관련된 중요한 단서이다.

 

隙地煙霞築一樓 안개 노을 빈터에 누정 하나를 지으니

洞門深鎖遠漁洲 마을입구는 굳게 닫혀져 물가에서 멀고

有期月滿靑山面 달이 푸른 산에 꽉 차기만 기다리는데

不種花開老石頭 심지 않은 꽃이 오랜 돌 머리에 피었네

何必苟求名利得 어찌 꼭 구차히 명예와 이득을 구할꼬

莫如安分讀書留 분수 지켜 독서하며 머무는 것만 못하리

於今仰數先天事 지금 우러러 지난 일들을 헤아리니

恨未勤王庚戌秋 경술년 가을에 근왕하지 못함이 한스럽네

 

<송암정>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경술년 가을에 근왕하지 못함이 한스럽네.”라 한 것은 바로 <망곡서> 암각문이 조성된 경술년 당시를 회상해서 말한 것이다.

이날 2차 현장조사에서 확인된 사실 가운데 <망곡서> 암각문이 정북향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의미가 깊다. 수리봉의 여러 바위 면에서 고종 황제가 있는 북향의 바위 면을 택하여 암각문을 조성한 것이다. 그만큼 <망곡서> 암각문은 회은 위원량선생의 결연한 우국충정의 의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현장에서 공개한 홍순석 조사단장의 자료와 한시준 독립기념관 관장의 인터뷰 내용을 정리해 보이면, 수리봉 <망곡서> 암각문은 다음과 같은 사료적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 필서자 회은 위원량은 문림의향 文林義鄕 장흥의 지역콘텐츠에 부합하는 근대시기의 장흥의 문사이자 의리를 실천한 학자임을 암각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근대시기 중 1905년 을미사변과 1910년 한일합병은 전국 유림의 의병 활동을 촉발하는 계기가 된 사건이다. 장흥 지역의 문사들에게 직접 영향을 끼친 연재 송병선이 1905년에 자결하고, 1910년 매천 황현이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29세의 혈기 왕성한 청년 위원량이 수의봉守義峰(수리봉)에 통한을 참아내며 암각문을 조성했을 정황을 충분히 가늠할 수 있는 자료이기에 더욱 의미가 있다. 단지 지면에 남긴 시문과는 격이 다르다. “경술년 가을에 위원량이 삼가 절하고 곡하며 쓴다.”는 관지까지 바위에 새긴 것은 결연한 의지가 없으면 불가한 것이다. 조정의 관료들이 사직하거나 유배지에서 임금을 그리며 지은 망배시望拜詩와는 차원이 다르다.

○ 경술년 전후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분개하고, 지사들은 순절하며 ‘절명시絶命詩’를 남겼던 시기에 이처럼 완벽한 암각문으로 당시의 정황을 토로한 자료는 아직 보고된 바 없다. 근대시기 호남지역의 항일의병 활동 관련 사료로써도 주목될 것이다. 문헌과 증언자료에 외에 <망곡서>와 같은 암각문을 통해서 현장의 사료를 확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제기하였다는 점에서도 이 자료는 의미가 깊다.

○ 회은 위원량의 <망곡서> 암각문은 암각문의 구성요소인 본문과 관지, 판곽까지 구비하고 있다는 점에서 금석학 분야에서의 가치도 높다.

회은 위원량의 <망곡서> 관련 언론 방송보도가 되면서, 후손으로부터 회은의 초상, 고택, 묘역 관련 사진이 남아 있음을 확인하였고, 장흥위씨 문중의 사적과 연관된 관심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 회은선생 관련자료는 향후 후손과 협의하여 방촌유물전시관에 기증될 예정이며 문화재 등록을 위한 암각문 탁본전시회와 학술대회도 장흥군에서 진행할 예정이다.

장흥문화원에 따르면 이 사업은 (재)한국학호남진흥원에서 실시하는 2020년도 「제1기 광주・전남 정신문화 르네상스 문화원 동행사업」에서 「문림의향(文林義鄕) 장흥지역 암각문 영상제작」과 「장흥의 암각문을 따라 걸으며 옛 선비들을 만나다」 사업 선정되어 진행하는 사업이라고 밝혔다.

 

○ 아래 수리봉 참석자 명단을 알려둡니다.

홍순석(해동암각문연구회 회장),강양희(해동암각문연구회 부회장),오준석(해동암각문연구회/강남대 조교),최은철(해동암각문연구회),김진호(해동암각문연구회),김현호(참빛사진영상 대표님),위종만(장흥문화원 사무국장),위성록(장흥위씨 씨족문화연구위원),김기홍(장흥문화원 고문),김선욱(장흥투데이 대표),유용수(장흥문화원 이사),위두환(장흥위씨 도문회 고문),위재원 (장천문회 회장),위수환(장천문회 부회장),위종삼(장천문회 총무),위정복(회은 위원량 선생 증손 첫째),위영복(회은 위원량 선생 증손 둘째),위수복(회은 위원량 선생 증손 세째) 등 18명

 

수리봉 암각문 올라가기전 참석자 명단(일행일부)

[참고자료] 회은 위원량의 사적

위원량(魏元良 1882~1945)은 일제강점기 전남 장흥군의 유학자이다. 초명은 종량(鍾良), 자는 여진(汝眞), 호는 회은(晦隱)이다. 1882년(고종 19) 정월 15일, 부친 위계선(魏啓善)과 모친 인천이씨(仁川李氏) 사이에서 3남1녀 중, 장남으로 장흥군 부산면 기동마을에서 태어났다. 

운암(雲巖) 위덕관(魏德寬)의 11대손이며, 증조부는 위응조(魏膺祚), 조부는 위유권(魏有權)이다. 조부 위유권은 효행으로 가선대부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부친 경은(耕隱) 위계선(魏啓善 1858~1917)은 장흥 지역에 많은 토지를 소유하여 천석군이라 불리었다. 역대 장흥위씨 가운데 천석꾼 집안은 두 집안뿐인데 그중 한집이다. 한때 부산면민들이 '위부자집' 땅을 밟지않으면 걸어 다닐 수 없을 만큼 전답이 널려 있었다고 한다. 부친 역시 효행으로 효릉참봉으로 천거되었다. 

회은 위원량은 천석군의 부유한 가정에서 출생하였지만 부모의 근검한 생활을 보고자라서 성품이강직하고 근검하였다. 예도 또한 극진하였다. 족조(族祖)인 만회(晩悔) 위국채(魏國采 1846~1921)와 족숙(族叔)인 행은(杏隱) 위계훈(魏啓勳 1866~1942)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문이 뛰어났다. 특히 금석문과 서예에 뛰어났다. ‘장흥위씨 삼세효열각(長興魏氏三世孝烈閣)’의 편액, ‘영이루(詠而樓)’ 편액, 수리봉의 ‘망곡서(望哭書)’ 암각문등에서 그가 여러 서체에 능하였음을 가늠할 수 있다. 부산면민이 1930년 건립한 ‘전참봉위공원량선행비(前叅奉魏公元良善行碑)’, 1938년 10월 장흥위씨 습독공파(習讀公派) 문중에서 건립한 ‘회은위원량중건묘각표창비(晦隱魏元良重建墓閣表彰碑)’의 비문에서 살필 수 있듯이 회은 선생은 축적된 가산을 분산해 가난하고 곤궁한 사람을 구휼하였으며, 향당(鄕黨)의 일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이러한 선행으로 참봉에 천거 되었다가 가선대부 공조참판에 승직하였다. 장흥위씨 문중인들은 회은선생이 문중의 제반사에 적극 참여하여 기여한 행적을 널리 칭송하고 있다. 장천재는 물론 연하동 하산재, 평화 다산재, 봉황 운곡재 등 장천문중이 주관하는 여러 곳의 사우와 재각에 사비를 들여 제수용품을 공급했다.

회은 위원량은 1910년(庚戌) 한일합병이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수리봉 정상에 올라가 울분을 토로한 뒤 ‘망곡서(望哭書)’ 암각문을 남겼다. 전하는 기록이 없어 단정하기 어려우나, 남다른 우국충정을 지니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30년 조부 위유권(魏有權), 부친 위계선(魏繼善), 며느리 제주양씨(濟州梁氏) 3세대의 효열비를 세우고, 효열각을 건립하였다. 1937년 장흥위씨의 성지인 회주사(懷州祠)의 강당 백산재(栢山齋)를 중건할 때 장흥부 관아 건물을 해체하여 옮겨지었는데 치성으로 보조하였다. 회은 위원량은 노년에는 수리봉 병풍바위 아래에 송암정(松岩亭)을 짓고 독서와 시서(詩書)를 즐기며 여생을 지내다가 1945년 11월 18일 부산면 구룡마을 자택에서 졸서하였다.

 

[사진자료]

이병연, 『조선환여승람』, 장흥군지

 

회은 위원량선생 초상

 

회은 위원량선생 고택(2010년 철거됨)
회은 현액(설주 송운회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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