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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자료(장흥+문화원)/장흥군 영상자료(YOUTUBE)

[영상]장흥임씨 뿌리를 찾아서

by 장흥문화원 관리자 2017. 8. 24.

장흥임씨 뿌리를 찾아서

출처: https://youtu.be/ZiUHC9SfTBI

 

장흥 임씨는 고려 시대 문벌 귀족 가문으로 조선 시대에는 유림의병 세력으로 다양한 활동을 한 호남의 대표 성씨이다. 고려시대에는 재상지종[2]으로 특히 호남의 호족세력으로서 현재의 장흥군과 인접 시군 일부에 장흥부라는 지명을 부여받게하고 이후에는 지역발전에 기여하였다. 고려 시대에 지속적으로 국가와 왕권을 보위한 가문으로, 장흥 임씨 세력이 다양한 권력 교체기에도 국가의 주요 직책에 봉사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한 학술 연구가 진행되었는데, 민족을 사랑하고 청렴을 강조한 가풍과 혼맥에 이유가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조선 시대에는 낙향하여 지방 유림세력으로 과거시험을 통하여 중앙 및 지방관직에 진출하였다.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시에 호남 의병장 등으로 활동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장흥 임씨의 시조 임호( 顥)는 중국 송나라 소흥부(紹興府) 출신으로 상서공부원외랑(尙書工部員外郞; 공조 소속의 정6품 벼슬)과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는데[3], 당시 중국의 정세가 혼란하자 난을 피하여 고려 정종 때 정안현(定安縣; 현재의 장흥군 관산읍(冠山邑)의 임자도(任子島 또는 荏子島)에 잠시 정박하였다가, 그곳 천관산 아래에 있는 당동(堂洞)에 정착하였다.

임호의 아들 임의(任懿)가 중서문하평장사(中書門下平章事)·판상서형부사(判尙書刑部事)를 거쳐 상주국(上柱國)에 이르렀고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정안군(定安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정경(貞敬)이다.

임의의 아들 임원후시중에 올라 묘청의 난을 토벌한 공으로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삼중대광(三重大匡; 文官 정1품 품계)·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문관 정1품 품계)를 거쳐 수태위(守太尉)·상주국으로 정안공(定安公)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본관을 장흥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임원후의 두 형제 원숙(元淑)과 원순(元順)이 각기 평장사(平章事; 정2품)를 역임하였으며, 또한 그의 아들 모두가 출세하였는데, 그 중에 맏아들 극충(克忠)이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한 후 한림학사(翰林學士; 한림원 소속의 정4품 벼슬)를 거쳐 사공(司空: 삼공의 하나로 정1품 벼슬)을 역임하였고 이어 판상서형부사(判尙書刑部事)에 오른 뒤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中書門下省 정2품職)에 이르렀다. 둘째 극정(克正)은 호부상서(戶部尙書; 정3품)를 지내고, 셋째 유(濡)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종2품 문산계(文散階)에 올라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정2품)를 거쳐 태자태사(太子太師; 동궁의 종1품)에 이르렀으며, 인종의 비인 공예태후는 임원후의 딸이었다. 공예태후로 인해 왕실과 인연을 맺어 18대 의종, 19대 명종, 20대 신종이 모두 장흥임씨의 외손으로 그들이 전후 약 50년간 왕위에 있는 동안 장흥임씨는 고려귀족가문의 발판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학덕이 높은 명신으로 희종묘(僖宗廟)에 배향된 양숙공(良淑公) 유(濡)의 아들 경숙(景肅)은 형부상서(刑部尙書; 정3품)·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정3품)·수문전태학사(修文殿太學士)에 이어 평장사(平章事; 정2품)가 되었는데 그가 수찬관(修撰官; 사관(史館, 춘추관)에 두었던 벼슬)으로 있을 때 유명한 명종실록(明宗實錄)을 편찬하였다. 유(濡)의 증손 익(翊)은 밀직부사(密直副使)·동수국사(同修國史; 사관(史館)의 한 벼슬)를 거쳐 찬성사(贊成事; 정2품)가 되었는데 왕명을 받들어 선원록을 지었다. 이것이 우리나라 족보편찬의 효시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박식다문하고 전고(典故)에 밝아 당시의 수찬관 김련(金聯)과 함께 원나라에 초빙되어 원나라의 세조사적(世祖事績)을 편찬하였다. 원준(元濬)의 증손 방부(邦富)는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평장사(平章事)에 오르고 아우 방수(邦壽)는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태자태부(太子太傅)에 이르렀다. 조선초기에는 유(濡)의 5세손 서종(瑞宗)이 예조판서(禮曹判書), 서원(瑞原)이 전공판서(典工判書), 서종(瑞宗)의 아들 헌(獻)은 대사헌, 손자 종선(從善)이 전라감사(全羅監司) 등을 역임했을 뿐,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 벼슬길을 멀리해 오다가 성종(成祖朝)에 이르러 원준(元濬)의 8세손 득창(得昌)이 온성도호부사(穩城都護府使)가 된 이래 관직이 이어졌으나 고려조(高麗朝)에 비해 벌열(閥閱)하지는 못하였다. 득창(得昌)의 아들 광세(光世)는 좌통례(左通禮), 아우 충세(忠世)는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지냈다. 광세는 5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희준(希駿)은 절제사(節製使), 2남 희순(希馴)은 옥과현감(玉果縣監), 3남 희중(希重)은 호(號)가 국담(菊潭)인데 문장이 뛰어난 석학으로 지리·병서에도 능했으며 전남·보성군·조성면·축대리(全南寶城郡鳥城面築內里)에 사숙(私塾)을 지어 후진양성에 힘써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희중의 아들 임계영은 문과에 급제하여 진보현감(珍寶縣監)을 지낸 후 임진왜란을 당하자 호남 의병장이 되어 많은 공을 세웠으며, 해남 의병장 희진(希璡)은 효자 근(謹)의 아들로 임진왜란 때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의병장 김건재(金健齋)와 함께 순절하였다. 조선 명종 때 제주목사(濟州牧使)를 지낸 응룡(應龍)은 제주에서 돌아올 때 해송(海松) 여덟 그루를 가지고 나와 제천시의 북쪽 경치 좋은 곳에 심어 그곳 경관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시객(詩客)을 불렀던 것이 유래가 되어 오늘의 탁사정유원지(濯斯亭遊園地)로 발전하여 지금은 많은 관광객과 피서객이 이곳을 찾고 있다.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C%9E%A5%ED%9D%A5_%EC%9E%84%EC%94%A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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