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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문화와역사/장흥역사자료

특집 - 육전의 난중일기 남긴 반곡 정경달선생

by 장흥문화원 관리자 2019. 8. 28.

특집 - 육전의 난중일기 남긴 반곡 정경달선생 

이순신 장군의 종사관으로 종횡무진한 정경달 선생

 

 

 

장흥 출신의 명장이자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장군의 종사관으로 종횡무진한 반곡 정경달(盤谷, 丁景達)선생의 ‘육전의 난중일기’가 학계에서 귀중한 자료로 이용하고 있다.

이 난중일기는 임진년(1592) 4월 13일부터 무술년(1598) 2월 17일까지 약 7년동안의 전쟁 기록을 담은 일기에는 당시 평안도 용천, 정주, 곽산에서 난을 맞은 기록이 있어 학계에서는 왜란 당시 남도의 상황을 상세하게 알 수 있는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정경달(丁景達:1542∼1602)선생은 1542년 전남 장흥군 장동면 반산리에서 태어났다.

1570년(선조 3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여 병조정랑, 가평현감, 남원부사, 청주목사, 함경도백, 통정대부에 이르렀으며 본관은 영광, 자는 이회(而晦), 호는 반곡(盤谷), 아버지는 정몽응(丁夢鷹)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산부사로서 의병을 모으고 관찰사 김성일(金誠一), 병마절도사 조대곤(曺大坤)·정기룡(鄭起龍)·이해(李垓) 등과 함께 기략(奇略)을 써서 적을 경북 금오산 전투에서 왜적 415명을 참수하며 크게 승리하였다.

◇정경달 선생의 임진왜란의 활약상을 살펴봤다.

1592년 4월 28일 상주가 함락되자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은 싸움을 포기하고 달아났다. 정경달 선생은 잠시 몸을 피신한 후 흩어져 있는 관군과 군민을 모았다.

지략을 겸비한 군민 허설(許說)과 김유일(金惟一)로 하여금 금오산에 진을 치게 하고 종일 적과 싸워 많은 병기를 노획하였다.

8월에 서산 각암으로 출전하였으며 9월에 감사 학봉 김성일(金誠一)이 전공을 기리는 서찰을 보내왔다.

뒤이어 창석 이준(李埈), 백사 이항복(李恒福), 임당 정유길(鄭惟吉)이 의병을 일으켜 합세하니 10월 15일 선산 의병은 상주 죽현으로 옮겨 진지를 구축하고 지형과 지세를 가리며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17일에는 해평으로 의병 진지를 이동하였다. 11월에는 대둔사(大芚寺)로 이동하여 진지를 구축하였다. 이듬해 2월초에 이준 형제가 이끄는 의병과 합류하여 무등곡에서 적을 섬멸하고 4월에 금오산 도선굴로 돌아왔다.

5월에 김산(金山 김천)에 주둔하니 일 년 간 적을 죽인 것이 수천명 이었고 많은 병기를 노획하였다.

명나라 군의 영남 진격에 따라 각 고을에서 식량을 공급해야 하는데 고을마다 식량이 바닥이 났다.

그래서 정경달이 도선굴에 비축하여 두었던 양곡으로 일부 명나라 군사의 군량미로 충당하니 명나라 장수 유총병(劉總兵)이 식리장군(識理將軍)이라 하며 치하하는 글과 금빛 부채를 주어 선산 의병의 공적을 찬양하였다.

어사 윤경립(尹敬立), 순찰사(巡察使) 김근(金勤)이 선산 의병의 전공을 나라에 알려 크게 치하하는 서찰이 왔다. 선산의 의병 활동은 왜군을 위협하여 조령을 경유하는 주력 부대의 진출을 견제하고 후방을 교란하는 힘이 되었다.

1594년 당시, 장기전이 된 전쟁으로 수군은 굶주림과 역병(疫病)으로 인해 많이 죽어나갔고 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도 손을 쓸 수 없었다.

또한 이순신의 호령이 고을 수령에게 시행되지 않았고, 여러 장수가 서로 화합하지 않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1594년에는 이에 조정에서 명망 있는 문관을 종사관으로 삼아 보낼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마침 유성룡이 이순신 장군의 계청(啓請)을 받아들여 전 부사(府使) 정경달(丁景達) 선생을 이순신 장군의 종사관으로 삼았다.

그는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행정, 징모업무, 군수조달, 시찰, 전령, 명 장수들과의 외교 등을 담당했다.

특히 선산부사(善山府使) 재직시 능력을 발휘한 정경달 선생으로 인해 이순신 장군이 지방에 주둔한 군대의 군량이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병사가 경작하던 토지인 둔전(屯田)을 맡겨 성공을 거두니 병기와 군량이 풍족하고 새로 만든 병선이 배(倍)가 되었다.

조정에 장계를 올리고, 한산도 부근 해평농장, 순천 돌산도 흥양의 도양장(전남 고흥군 도양면 도덕리), 해남의 황원곶(전남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 강진의 화이도(전남 완도군 고금면) 등에서 둔전을 시작하였다.

돌산도는 군관 송성(宋晟), 도양장은 이기남, 화이도와 황원곶은 종사관 전 부사 정경달(丁景達) 선생을 감독으로 보냈다.

또한 항만 내 평탄한 간석지에는 염전을 경영케 하며 도기도 굽게 했고, 해운업의 길도 열어줘 피난민 중 상업가를 지휘하여 무역을 행하는 이도 생겼다.

이렇게 군민이 단결하여 나중에는 양곡, 어염, 포목 할 것 없이 구하지 못하는 것이 없게 돼 저장된 곡식이 수만 석에 달했다. 이순신 장군으로선 일류 병참참모를 곁에 둔 것이었다.

정경달 선생은 이때의 공적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정경달 선생의 아들인 정명열(丁鳴說)도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에게 쌀과 배를 보태고 명량해전에 함께 참전하였다.

정경달 선생은 사후에 예조참판에 증직되었고 선무원종훈에 올랐다. 어찌되었건 그의 부자는 이순신 장군의 뒤에서 병참보급을 훌륭히 지원해, 최상의 전투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한, 최고의 보급참모였다.

1597년 3월 이순신 장군이 원균(元均)의 모함으로 투옥 되자, 정경달(丁景達) 선생은 조정에 나아가

탄원서를 내고 직접 선조 임금을 독대하여 그의 석방을 위해 종횡무진으로 노력하였다.

나이도 이순신 장군보다 3살이나 많았고 높은 벼슬도 먼저 하였건만 아랑곳 하지 않고 솔선수범하며 상사를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1597년 4월경 이순신 장군이 참소를 당해 옥중에 있을 때 공(公)이 서애(西厓) 유성룡, 백사(白沙) 이항복 두 분을 찾아갔더니, 그들이 묻기를, “그대가 남쪽에서 왔으니 원균과 이순신의 옳고 그름(是非)에 대해 말해 줄 수 있겠는가?”라고 하므로, 공(公)이 말하기를, “누가 옳고 그른가는 말로써 해명할 게 아니라, 다만 보니 이순신이 붙잡혀가자 모든 군사들과 백성들이 울부짖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이(李) 공(公)이 죄를 입었으니 이제 우리들은 어떻게 살꼬.” 할뿐이었소. 이것을 보면 그 시비를 알 수 있을 것이오. 라고 대답 하였다.

또한 “이순신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적을 방어하는 재주는 일찍이 그 예를 찾을 수 없다. 장수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기회를 엿보고 정세를 살피는 것을 가지고 싸움을 주저한다고 몰아 죄를 물을 수는 없다. 왕께서 통제사를 죽이게 되면 사직을 잃게 된다”고 임금께 고하였다.

이러한 기록에서 알 수 있듯, 이순신 장군과 정경달 선생은 서로 존경하고 신뢰한 사이였다.

19세기 다산 정약용은 적을 방어한 수령의 모범 사례로 정경달 선생을 높이 평가해 <목민심서> ‘어구(禦寇)’ 항목에 수록했고, 강진 유배시절에는 정경달의 난중일기들을 모아 <반곡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정경달 선생이 남긴 『난중일기』『진법(陳法)』과 『광국공신계회도(光國功臣契會圖)』『흉배(胸背)』『공신록권(功臣錄券)』등이 1988년도에 지방유형문화재 제164호로 지정되었다.

장동면 반산리 반계사에 배향되었다. 반계사에 모셔진 조선 선조 때의 정경달(1542∼1602)선생의 관련된 자료들이다.

반계사는 숙종 40년(1714)에 영광 정씨 문중이 중심이 되어 건립한 것으로, 영광 정씨의 정인걸, 정경달, 정명설, 정남일 네 사람과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큰 공을 세운 이순신, 임영립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건물이다.

고종 5년(1868) 훼손 되었던 것을 1957년 지금의 자리에 강당을 새로 짓고, 1959년에 탑을 세워 사우로서의 기능을 대신케 하였다.

유물과 유품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반곡의 『난중일기』는 정경달 선생이 임진왜란 초에 참전했던 일기와 명군접반사로 재직할 당시의 일기로, 제2의 ‘난중일기’로 평가되고 있다.

필사본 『반곡일기』하권 1책과『반곡년기』1책이 여기에 해당한다. 본래 정경달 선생의『난중일기』는 2책이었으나 선조 31년(1598)부터 1602년까지의 내용만이 현재 남아있다. 이를 순조 15년(1815) 정약용 선생이『반곡집』에 수록하였다.

진법은 옛 책의 필사본으로 채색된 진법도가 함께 들어 있다. 군영, 군률, 진법이 그림으로 수록되어 있어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군의 전략, 전술을 살피는데 도움이 된다.

광군공신계회도는 구전으로 궁궐도라 불려져 왔던 계회도인데 비단 바탕에 채색하였으며, 상태가 심하게 훼손되었다. 이 공신계회도는 선조 24년(1591)의 것으로 윗쪽 반면에 어전 건물 및 참여 인물도가 있고 하단에는 공신 14명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흉배는 2매로 정경달의 관복유품이며, 학배이다. 공신녹권은 공이 있는 신하에게 나라에서 공신으로 임명하여 내리는 인정서로, 「광국원종공신록권」은 1591년에 발행된 것으로 1책이며, 「선무원종공신록권」은 1603년에 발행되었으며, 1책이다. 그 외에 1760년의 「호남갑자막의록」과 「불갑사간」1책, 교지 등 다수의 고문서 자료가 있다.

참고로 정경달 선생과 같이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활약했던 장흥출신은 마하수(馬河秀), 김몽성(金夢成), 선세신(宣世臣), 신용범(申龍虎), 신용준(申龍俊), 임영립(林英立), 김성원(金聲遠) 마성룡(馬成龍), 마위용(馬爲龍), 박은복(朴銀福)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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