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문화원

 

 

 

1950년대 장흥읍 석대들 모습. 경운기 없던 시절 비료를 마을로 옮길 때

 

 

 

마을 부녀회원들이 논보리 수확을 올리기 위해 제초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장흥읍 掛也里

 

 

 

 

유명했던 부산 자매마을 모시베

 

 

 

 

 

 

 

 

 

 

 

 

 

 

 

집 뒷뜰의 논서밭에 심은 모시를 가지런히 다듬어 밤새껏 동네사람들과 함께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며 실을 내린뒤 온 동네 사람이 모여 마당에서 풀칠을 한 뒤 베틀에 앉아 마무리한다. 장에 내다팔고 혼수감으로도 쓴다. 이제는 거의 볼 수 없는 작업과정이다.

 

 

농가부업과 농한기소득을 권장하던 60년대 국민학교와 중학생들에게는 품평회를 열어 표창하였다.-학생토끼(앙고라)기르기-

 

 


 

 

 

해장창고 앞에서 근처 노인들을 모셨다. 장흥 장날이면 배가 출항.통영, 삼천포, 부산 등지로 서남부 4개군의 쌀이 운반되고 근처 섬사람들은 그 배편으로 장흥장을 이용했다.

 

 

 

해창에서 부산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는 쌀장사 아줌마

 

 

 

베짜기

베틀에 앉아서 베를 짜고 있다. 이 사진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부테허리(부티) 에 몸을 기대고 앉을깨에 앉아 작업을 하는 것이다. 밥댕이에 감은 삼줄이 차츰 조직되어 가는 것을 바라보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

 

 

 

우리는 착실히 이렇게 살아왔다. 장흥의 어머니, 아버지들. 농한기에 가마니짜기

 

 

1951 장흥읍 해당리

 

 

 

퇴비를 증산하여 지력을 증진하자는 1964년의 퇴비증산 결의대회

 

 

 

'퇴비증산운동' 무공해 농산물 생산 이 시대에 깊이 생각해 볼 필요는 없는지. 1951.9. 24 장흥읍 상리

 

 

 

보람으로 일한 당시의 농촌 지도자들도 이제는 거의 세상을 떠났다(1952. 4. 24 퇴비증산 표창). 장흥읍 해당리 경로회당 앞

 

 

 

 

 

 

가을 파종을 마치고 괘야리 부녀조합원 일동(1953. 7. 3)

 

 

 

순지근로청년단원들(1950년 후반)

 

 

 

옛 대덕장터에서 조(서숙)를 따고 있는 옛모습. 논둑에까지 조를 심어 식량증산에 노력하던 때

 

 

 

 

 

 

 

우리땅 우리손으로, 동네 청장년이 품앗이를 하였다. 이때만 해도 농약 생각도 못하고 이때는 논에서 미꾸라지, 붕어가 자랐다.

 

 

 

 

 

 

퇴비증산 총궐기 공동작업(1951. 9. 24 장흥읍 해당리)

 

 

 

각 마을별 영농품평회와 지도교육

 

 

 

 

 

 

동네 최장수 어른께 권주

 

 

 

농한지 활용을 잘하여 양곡증산에 기여한 공로로 도지사로부터 장흥군이 받은 우등상(1963)

 

 

 

 

 

 

 

 

 

식량증산을 위해 행정력을 강화하던 60년대

 

 

 

월남 피난민의 정착기반을 구축한 이준식 군수의 공을 찬양하는 신용우지사(장평 경림마을에서)

 

 

초도 순시차 장흥에 온 신용우 지사. 김수남 군수

 

 

 

농가부업으로 양잠을 장려하던 시절

 

 

 

 

 

 

 

 

 

 

 

 

 

 

 

양잠특설지구와 뽕나무밭. 장편면 봉림리 총농가 117호중 70%에 이르는 83호가 13078,500주를 식상하였다(1963)

 

 

 

장평면 봉림에 산지를 개간하여 뽕밭을 조성

 

 

 

 

 

 

1964년 산림녹화를 위해 읍면 산림계장이 한자리에 모여 억불산 기슭의 식수현장을 방문했다.

 

 

 

 

 

 

농촌의 고리채를 청산하기 위해 마을단위 리동조합을 육성하던 시절 엄을준 조합장.

 

 

 

고리채 청산 마을단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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