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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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의 백사정과 군영구미 위치 검토-

 

 

 

이수경(문화재학 박사, 지역유산연구원장)

 


▶본 글은 11월 25일, 장흥군민회관 인문학강좌에서 이수경 박사가 발표한 논문 「‘난중일기’의 백사정과 군영구미 위치 검토」에서 중요한 부문만을 발췌한 것이다.-편집자 주

(논쟁의 빌미를 제공해주고 있는) 백사정, 군영구미를 현재의 보성군 회천면으로 볼 수 있는 이유는, 먼저 ‘이순신의 종사관으로 활동한 정경달(丁景達,1542~1602)이 지은 정자 백사정(白沙亭)이 장흥부 회천면 바닷가에 있었다’는 18세기 후반의 기록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회천면의 행정구역이 조선시대에는 장흥부에 속하였으나, 1914년 행정개편 이후 보성군으로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회천면 군학마을에 성(城) 터라고 주장하는 유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1597년 8월 17일 이순신 일행은 장흥부 회천면에 있는 정경달이 지은 정자 백사정에 들러 사람과 말이 쉬었으며, 인근 구미영성(龜尾營城) 터가 남아 있는 군학마을에서 하루 유숙한 것으로 파악하였던 것이다’

 

이순신…회천(군학리)에 들리지 않았다

 

장흥부 해창 선소






먼저 백사정에 대해 살펴보겠다. 백사정은 하얀 모래사장 혹은 하얀 모래톱의 의미로 사용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장흥 땅 백사정이란 곳도 장흥의 하얀 모래사장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지형상 장흥의 하얀 모래사장은 강변이나 바닷가로 특정한 곳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될 수 없다.

「난중일기」 -‘1597년 8월 17일 일찍 아침 식사 후에 곧장 장흥 땅 백사정(白沙汀)에 이르렀다. 점심 후에…’ 이를 정리하면, ①장흥 땅 백사정에서는 점심을 먹을 수 있어야 하며 ②보성읍성에서 일찍 출발하여 군기를 싣고 온 말도 쉬게 해야 하고 ③통제사 일행이 점심을 해결할 수 있고 말도 쉴 수 있는 곳은 당시 역‧원(驛·院)이어야 한다.

(그러므로)…통제사가 점심을 먹은 장소, 말에게 여물을 먹이는 장소가 대개 역(驛)과 원(院)이었다. 백사정에서 점심을 먹었다고 했으므로, 이곳은 역원과 유사한 성격을 가진 장소, 혹은 역과 원에서 가까운 지역으로 봐야 한다.

따라서 필자도 통제사 일행이 점심을 먹고, 말이 쉴 수 있는 백사정을 장흥부 벽사역과 가까운 물가로 추정한다. 8월 17일의 일기를 구체화시키면, ‘이순신 일행은 보성읍성에서 장흥 벽사역을 목적으로 이동하는 중 벽사역 인근 물가 백사정에 이르자 먼저 말에게 물을 먹이고, 벽사역으로 들어가 조선 수군 일행도 점심을 먹었다’고 설정하겠다.

그렇다면 백사정은 벽사역 인근의 장흥 예양강(汭陽江-현재 탐진강)의 강변 둔치로 추정된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백사정을 보성 회천면 벽교리의 ‘명교마을 앞 해안가 넓은 모래 둔치’라 비정하였다(노기욱, 이수경 논문). 그러나 말에게 바닷물을 먹일 수는 없다. 120명이 넘는 군사가 모여서-「행록」에 따르면, 1597년 8월 초부터 18일 사이에 순천에서는 병정 60여 명을 얻고, 보성에 이르러서는 120명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바닷가 백사정이란 정자에서 점심을 해결하는 것도 불가능해 보인다. 따라서 말과 사람이 쉴 수 있고 점심을 먹을 수 있는 장소로 역을 예상하였고, 보성읍성에서 장흥 벽사역으로 이동하는 동안 만날 수 있는 장흥 땅 백사정은 벽사역 인근의 예양강의 모래 둔치로 판단된다.

…(이순신 장군 일행은)…보성읍성에서 출발하여 장흥 웅치면, 장동면, 용계면을 거쳐 부동면 벽사역까지 약 21km를 이동한 셈이다. 당시 120여 명의 군사와 무기를 실은 말이 이동할 수 있는 길은 ‘대로’로 볼 수 있다. 하여 조선수군 일행이 대로를 타고 이동한 것으로 여긴다.

보성읍성에서 대로를 타고 벽사역을 향해 이동할 때 만나는 장흥 땅 백사정은 예양강(탐진강) 인근의 강변 둔치다. 만약 소로를 타고 이동하였다면 벽사역 방향으로 이동할 때 만나는 장흥 땅 백사정은 제암산에서 발원하여 흐른 역천(驛川-현재는 부동천) 인근의 강변 둔치다. 따라서 백사정을 넓게 보면 벽사역에 도착하기 전의 예양강 강변 둔치로 볼 수 있다.

이순신은 그전에도 장흥 백사정을 방문하였다. 이순신 일행은 1596년 윤 8월, 당시는 흥양(현재 고흥) 녹도진에서 배를 타고 백사정으로 들어왔다. -「난중일기」 : 1596년 윤 8월 19일 녹도로 가는 길에 도양의 둔전을 살펴보았다. …녹도에 도착하여 잤다./「난중일기」 : 1596년 윤 8월 20일, 일찍 출발하여 배를 타고 체찰사와 부찰사와 함께 종일 군사 일을 이야기했다. 늦게 백사정에 이르러 점심을 먹은 뒤에 그 길로 장흥부에 이르렀다-

당시 이순신 일행은 녹도진에서 머물렀으며, 다음 날 녹도진에서 전선을 타고 장흥부로 들어왔다. 그런데 기존의 주장은, 체찰사 일행을 모시고 회천면 벽교리 명교 바닷가 백사정에서 하선하여 점심을 해결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문맥상 백사정이 전선의 정박처가 될 수 있다. 따라서 1597년 8월 17일의 백사정도 전선의 정박처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순신이 굳이 군영구미로 가서 전선을 탈 필요가 없어 보인다. 즉 백사정이 전선의 정박처가 아니다는 것이다. 이 경우는 전선을 某處(즉 군영구미)에 정박하고 벽사역으로 이동하여 점심을 먹은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조선 후기 ‘장흥읍지’에는, 회령방의 정자 백사정에 관한 기록이 있다. 정경달이 지은 정자이다. 물가 백사정에 대한 기록은 검토되지 않았다. 이유는 백사정은 하얀 모래사장이므로 어느 특정한 곳을 지칭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닷가, 강변의 모래사장은 모두 백사정이므로 지리지에 특별히 오를 이유가 없다.

1910년대 이후 발간된 장흥과 보성 지역의 지리지에는 백사정을 정경달이 보성군 회천면 바닷가에 지은 정자 백사정으로 보았다. 이유는 임진왜란 시기 이순신과 정경달의 관련성을 두었기에 때문이다. 이순신은 백사정으로 나아가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이곳에서 약 10리 거리에 있는 전선이 출입할 수 있는 옛 군항지(軍港地)인 군영구미(군학)에 도착했을 것으로 보았다.

정경달의 연보(年譜)와 ‘盤谷集’에 의하면, 정경달은 임진왜란 이후 1599년에 장흥 회령 백사(白沙)에 청람㙜(靑嵐㙜), 해은당(海隱堂)을 지었다.-‘반곡집’ 반곡일기 등-. 그러므로 정경달의 백사정과 이순신은 이무런 관련이 없다. 백사정이 보성군 회천면 벽교리 명교해수욕장이라는 전거를 검토한 결과, 1966년에 발간된 ‘보성지’의 ‘백사정이 정유재란 시기 이순신의 수비처였다’라는 기록은 보성군 향토사(1974), 문영구의 연구(1975), 보성군 지명유래지(1990), 조선수군재건로를 고증한 기초조사 보고서(2013)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1596년 윤 8월 20일의 이순신 일행의 일정은 고흥 녹도진에서 전선으로 장흥 모처에 도착, 말을 타고 벽사역으로 이동하여 점심을 해결하였다. 반면, 1597년 8월 17일에는 예양강 인근의 백사정에서 말을 쉬게 한 후 벽사역으로 이동하여 점심을 먹고, 다시 말을 타고 이동하여 군영구미에 이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장흥 군영구미(軍營仇未)와 선소(船所)

「난중일기」에 위하면, 1597년 8월 17일 장흥 땅 백사정(예양강변)을 거쳐 벽사역에서 점심을 먹은 조선 수군 일행은 군영구미(軍營仇未)에 이른다. 그런데 「난중일기」 번역자 및 연구자들이 비정한 군영구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이은상은 강진군 고군면 병영으로 보았고, 조성도는 강진군 고조면으로 보았다. 그러나 고조면은 강진군에 존재하지 않은 面이다. 아마 ‘군영’을 염두하여 강진군 병영으로 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인용된 일기를 놓고 보면 첫째, 통제사 이순신이 타야 할 전선이 육군의 병영에 있었는지의 여부이다. 둘째, 일기의 내용 상 백사정, 군영구미는 장흥에 소속된 곳이었다.

또 장흥 땅 백사정에 도착하였다는 점, 군영구미에 도착하니 장흥 사람들이 군량을 옮겨간 것에 대한 기록, 다음날 8월 18일 장흥에 소재한 회령포진으로 이동한 기록을 놓친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군영구미는 강진군 병영으로 볼 수 없으며 장흥으로 보아야 한다.

다음으로, 향토사학자들이 비정한 장소에 대해 살펴보면, 1974년 ‘보성군 향토사’에 수록된 군학마을의 구전되는 구미영(龜尾營) 이야기를 토대로 군영구미를 회천면 전일리 군학마을로 비정하였다. 게다가 이곳에서 배설의 전선을 인수한 회령포진으로 이해하는 오류도 범하였다.

2013년의 ‘조선수군재건로 고증 및 기초조사’에 수록된 군영구미는 다음과 같다.

▶옛 지명은 휘리포로 불렀음. 마하수 장군이 군선을 가지고 와 군수 물자를 이동한 곳임

▶1457년 이곳에 수군만호진이 개설됨으로써 군영구미라 불러오다 1554년 호남진지 회령포진지에 의하면 회령면 휘리포라 부른 기록이 있음(호남진지2, 회령포진지)

▶군영구미 옛터에는 김명립 비와 성지가 남아 있음

▶군학마을은 경주김씨 이전에도 여러 성씨가 살았다는 설이 있으나 사적은 없고 경주김씨 낙향 선조이신 김명립이 1558년 경기도 광주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음

▶군영구미는 회천면 군학마을로 회천면 전일 2리이다(이충무공전서 10권 행장)

▶임란시기 구미영성이라 칭함. 이충무공은 군학에서 배에 올라 회령포(장흥 회진)로 향하였음

▶고려시대 태조 23년 영현인 대로현이 회령현으로 바뀌었음. 인종2년에 영현인 회령현이 영암군 소속에서 부로 승격되어 독립된 장흥부로 소속을 옮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보성군에 이속됨.

위의 군영구미에 대한 조사기록을 살펴보면, 문헌 ‘이충무공전서’와 ‘회령포진지’, 김명립의 비를 근거로 삼았다. 그러나 관련 문헌과 김명립의 비문에는 군영구미의 위치에 대한 내용이 없다.

필자 또한 그동안 군영구미를 보성군 회천면 전일리 군학마을에서 전래되고 있는 성(城) 머리, 사장터, 불무골, 진(鎭)밖끝 등 지명이 남아있어 현장에서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이곳을 군영 터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현재 군학마을의 옛 지명이 ‘휘리구미’라 전해지고 있어서 군영구미를 보성군 회천면 군학마을로 추정하였다. 결국 회령포진의 옛터를 군영구미로 이해한 것이다. 그러나 회령포진의 옛터는 옛터일 뿐이다.

장흥부 선소가 군영구미인 이유

다음으로, 군영(軍營)을 검토해 보면, 1597년 8월 17일의 「난중일기」를 통해 ①장흥 땅 군영구미는 전선이 닿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즉 포구, 선소, 나루터 뜻을 포함한 구미여야 한다. ②군량과 그 군량을 관리하는 군량 감색이 있어야 한다. 즉 군창(軍倉)과 관리(官吏)가 있어야 한다 ③통제사 및 조선 수군 일행이 머물러 잘 관청(官廳)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곳이 군영이다. 당시 장흥부의 군사(軍事)와 관련된 영(營)을 살펴보면, 수군진 회령포진과 장흥부 船所-선소는 시기와 기능에 따라 船倉(艙, 滄, 廠), 待變亭, 御變亭, 戰船所 등으로 별칭되었으며,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군선의 건조·수리, 정박처, 그리고 수군보급품의 보관·지급하는 공간이었다. 아울러 조운선·상선의 정박·점검·수리도 함께 이루어졌다. 또한 바닷길의 무사함을 비는 祭儀의 공간이자 포구로서 상업 활동이 활발하였다. 이러한 선소는 조선시대 수군력, 수군활동, 수군사, 해양문화 등 연구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송은일, 논문(2017), 317쪽).-뿐이다. 모두 수군과 관련된 영이다. 육군과 관련된 시설은 당시에 장흥에 존재하지 않았다.

앞에서 예로 든 당시 이순신 일행은 1596년 흥양 녹도진에서 전선을 타고 장흥부로 들어오는 장면을 적은 일기(‘1596년 윤 8월 19일’, ‘1596년 윤 8월 20일’) 내용대로라면 전선의 정박처를 백사정으로 오인할 수 있다. 전술하였듯이, 백사정은 벽사역 인근 예양강의 강변이다. 전선의 정박처가 아니다. 일기에는 장흥부 선소(군영구미)가 생략된 것이다. 녹도진에서 출발한 전선은 장흥부 선소에 도착하고, 이들은 하선하여 벽사역까지 말을 타고 이동한 후 그곳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벽사역 서쪽으로 5里에 있는 장흥부 읍성으로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백사정이 전선의 정박처라면 굳이 군영구미까지 이동하여 배설이 보낼 전선을 기다릴 필요가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수군진 회령포진에 전선을 정박한 후 이동한 것은 아닐 것이다. 장흥부의 선소가 있다는 것이다.

‘난중일기’ “1592년 2월 22일… 아침에 공무를 본 후 녹도로 가는데 …먼저 흥양 전선소(戰船所)에 이르러 배와 기구를 직접 점검하고, 그 길로 녹도로 갔다”는 대목이 있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영 구역을 돌며 순찰하는 일정 중흥양현에 도착하여 전선과 기구를 점검하는 날의 기록이다. 선소에는 전선과 기구가 있으므로, 이곳은 전라좌수사의 순찰 대상지였다.

흥양현에는 4곳의 수군진인 녹도진, 발포진, 여도진, 사도진이 있었다. 이곳에는 각각의 전선이 있었으며, 사도첨사를 비롯하여 각각의 만호가 이 전선을 관리하였고, 모두 전라좌수영 관할로 좌수사의 통제를 받는 곳이었다. 전라좌도 연해안 5개고을[5官]이 전라좌수사 관할에 소속이 되어 유사시 해전에 참전하였다. 이들은 각 지역의 수군진과는 별도로 평소 읍성 가까운 포구에 전선을 마련하여 무기를 갖추고, 격군을 운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곳을 군영(軍營)이라 할 수 있다. 순천부사 이하 고을 수령이 주관하는 선을 정박해 놓은 곳이 선소였다.

이는 장흥부에도 적용되었다. 전라우수영에 소속된 장흥 부사도 유사시 전선을 이끌고 전투에 참전하여야 하며, 이를 위해 평소에 전선을 장흥부 선소에 정박시켜 두고 전선 및 군기를 단속하여야 했다.

장흥부 선소는 장흥부의 전선 정박처이며, 이곳에는 군량 창고 및 군기고와 이를 관리하는 군량 감관 및 색리[監色], 그들의 집무 공간인관청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요건을 모두 갖춘 곳이 군영이다.

…16세기 중엽, 진관체제가 제승방략체제로 바뀌면서 전라좌수영은 관할 수군진 뿐만 아니라 연해 지역 각 읍에 수군기지를 설치하여 수군 훈련과 군선 관리 등의 권한을 갖게 되었다. …이에 따라 각 읍에 읍 수군이 창설되었고 읍 수군이 주둔할 수 있으면서도 전선을 건조하고 계류시킬 수 있는 장소로 선소가 들어섰다.

여하튼 장흥도호부의 경우 회령포진과 장흥읍 수군의 선소 두 곳이 장흥 땅 군영에 해당되며 이곳이 당시 수군기지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 연해 군현은 읍 수군의 전선 정박처를 갖추고 있었으며, 장흥부도 읍 수군의 기지가 있었고, 그곳이 군영구미, 장흥부 선소이다. 장흥부는 大邑으로 선소 또한 군[中邑], 현[小邑]의 규모와 달랐을 것이다.

…‘장흥읍지’(1747) 따르면 ‘장흥도호부 선소는 府 치소 동쪽으로 30리 떨어져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872년 장흥부지도」에는 海倉 건물이 부 치소에서 30리로 표기되어 있고, 바로 앞 우측으로 군기고와 석돈, 전선, 병선, 사후선이 각각 1척씩 표현되어 있어 조선 후기 장흥부 선소는 해창과 동일한 장소, 또는 인근 거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선소와 해창의 기능이 같다는 것은 아니다. 장흥도호부 선소는 포구 안쪽에 있는 장흥군 안양면 해창마을 일원이다. 각종 지리지와 고지도에서 장흥부 선소의 위치를 살펴보겠다.

‘장흥읍지’ 안양방 창고조에는 附船所가 기록되어 있다. ‘선소에는 대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1척 등이 있으며 좌수영에 속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816년의 ‘장흥부읍지’ 창고조에는 ‘司倉, 賑恤庫, 大同庫, 軍器庫, 海倉, 南倉, 船倉’이 기록되어 있다.

‘해창은 장흥부에서 동 30리 안양면에 있으며, 선창은 해창에 있으며 장흥부에서 동 30리 거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다면 을묘왜변 후 마련된 읍 수군의 전선 정박처인 선소의 선창은 조선 후기의 해창으로 이어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장흥부의 선소는 군영구미이며 전선, 군기고, 창고가 있으므로 군영에 해당된다. 장흥부 고지도에서는 선소와 해창이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선소가 해창과 같은 곳에 위치한 것은 이곳의 유리한 지리적 이점을 이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연구자의 견해로는 장흥 회령포진의 포구보다 장흥부 선소가 있는 포구의 규모가 더 큰 것으로 판단된다./김선욱 기자 정리

출처_ http://www.jhtoday.net/news/articleView.html?idxno=5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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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학의 ‘전라도 장흥도호부 수군(水軍) 만호진(萬戶鎭) 회령포(會寧浦) 연구’에서 

 

 


이병혁/한문학자, 문학박사

 


▶… ‘전라도 장흥도호부 수군(水軍) 만호진(萬戶鎭) 연구’는 지난 2017년 6월,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이 발간한 『호남문화연구』61호 pp.223~254(31pages)에 실린 이병혁 박사의 논문이다. 이 논문은 전남도가 2015년에 추진한 이순신 길 수군재건로 사업에서 회천면 군학리 일원을 ‘군영구미’로 비정한 관련 논문들에 대해 의문점을 제기한 논문으로, 당시 폐령현이었던 군학리 일대가 군영구미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이 논문 중, ‘군영구미=회천 일원’의 부당성을 제기하면서 당시 이순신 수군의 중요한 역할을 했던 회령포진에 개설과 이진 등에 관한 부분만 발췌한다.…편집자 주◀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해방체제(海防體制)는 조선조 태종, 세종을 거쳐 세조 3년(1457)에 이르러 전국적인 진관체제(鎭管體制)와 함께 일차적인 해방체제가 완비되었다. 이때 구축된 해방체제는 이후 삼포왜란·을묘왜변·임진왜란 등 크고 작은 왜구의 침입을 거치면서 왜구의 침입 경로· 해안지형· 조류변화 그리고 수조(水操)의 시행에 따른 정책변경 등의 추이에 따라 신설·이설·폐지·관할변동과 같은 변화를 거치면서, 왜구의 침입이 비교적 줄어든 후대에는 표류민(漂流民)의 호송 등 해상방어의 근간으로 작동되다가, 고종 32년(1895) 을미년에 각 군문이 통합되어 군무아문(軍務衙門)으로 일원화 되면서 폐지되었다.

이러한 해방체제에 대한 연구가 이제까지는 주로 국방제도사 연구의 일부분으로 다루어지거나 왜구의 침입에 따른 전쟁사 특히 임진왜란시 이충무공(李忠武公)의 승전과 역할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진포(鎭浦)의 설치와 변동 등이 부차적으로 기술되기도 하였지만, 해방체제의 하부조직인 제진(諸鎭), 즉 개별 진포만을 대상으로 한 연구사례는 미비한 편이었다. 이처럼 미진한 해안 진포에 대한 연구가 지방자치 시대가 도래한 근래에 이르러 각 자치단체별로 지방사 연구의 명분과 관광 유적지 개발 등을 통한 지역홍보라는 현실적 필요에 따라 경쟁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고, 또한 해당지역의 지방대학에서도 해양도서(海洋島嶼) 연구와 지역사회의 관심사에 부응한다는 취지에서 연구영역을 확대해 나가고 있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라 하겠다.

장흥부 회령포진은 정유재란(1597)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이충무공이 전선 12척을 얻어 임진왜란 해전 중 가장 극적인 승리를 쟁취했던 명량해전(鳴梁海戰) 승리의 단초를 제공했던 역사의 현장이고, 근래에는 전라남도에서 추진하는 ‘조선수군 재건로 조성’사업의 중요 거점이 되어 새로운 역사·관광 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유적지로서 그간 크게 부각되지 않고 방치되었던 설진과 이설의 시기· 축성 등 관련 문헌상의 상이한 기록들에 대한 재검토가 요청되고 있고, 역사적 사실을 올바르게 정립해야 할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1425년 (세종 7년) 회령포에

수군 만호진의 설치 이설됐다

고려 고종 10년 계미년(1223) 5월 금주(金州)의 왜구 침입 기사로 고려사에 처음 등장한 왜구는 그 후 충정왕 2년 경인년(1350) 2월에 고성(固城)지역 등의 침입을 기점으로 하여 고려 전역에 대대적으로 침구하기 시작하였다. 장흥지역 또한 같은 해 4월 장흥부의 조운선이 약탈당하고 6월에 장흥부 안양향(安壤鄕)이 침탈을 당한 이래, 장흥부에 왜구의 침탈이 점점 거세지고 지역이 황폐해지자, 다음 해인 우왕 5년(1379)에 왜구의 약탈을 피하여 장흥부의 치소를 내륙의 철야현(鐵冶縣)으로 옮기고, 공양왕 원년(1389)에는 보성군으로 잇달아 옮기는 등 극심한 피해를 당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태종 6년(1406) 1월에 왜선 6척이 장흥부 주포(周浦)에 침범하여 병선 1척을 약탈하였고…이러한 왜구에 대한 대응책으로 세종 4년(1422) 11월에 주포와 회령포를 관할하는 전라도 지역의 수군통수권자인 도안무처치사(都安撫處置使)의 청을 받아들여서 최근에 왜적이 침입했던 해변 요해지인 회령포(會寧浦)에 본영의 군선 2척과 좌·우도의 군선 각 1척씩을 차출하여 정박(碇泊)시켜둠으로서 뜻밖의 사변에 대비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권18).

이러한 조치가 시행 된지 3년 후인 세종 7년(1425) 2월에 전라도 감사가 병조의 관문(關文)에 의하여, 전라도 각 포 병선의 이박(移泊)편의에 대한 여부를 현지시찰하고, 조목별로 열거한 보고서에 회령포 만호의 병선이 머무르고 있는 소마포(召麻浦)는 조수가 물러가면 물이 얕아지기 때문에 병선의 출입이 용이하지 않다고 하면서, 비옥한 토지가 많고 왜적이 밟는 첫 길〔初程〕인 주포(周浦)로 병선을 이박 시키기를 청하므로 지형의 이점과 방비의 편의를 위하여 만호진을 주포로 이설하게 되었다. (『세종실록』권27)

이때에 ‘기존의 회령포’(회천면의 회령포)라는 지명을 그대로 가져다 사용하게 되어 장흥부의 관내에 2개의 동일 지명이 통용되게 되었다. 이 같은 사례는 다른 지역 진포의 이설 과정에서도 종종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지역사정에 밝지 못한 외지 연구자들의 혼란과 오류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더구나 처음 회령포진이 설치된 장흥부의 회령포(회천면에 있던)는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장흥부에서 떨어져 나가 보성군에 편입됨으로서 이러한 혼란이 더욱 심하여 현재까지도 그 영향이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회령포진의 이진 사실은 그 후 7년째 되는 세종 14년(1432)년에 완성된「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전라도조에 “관방(關防)의 수어(守禦)는 회령포가 장흥부의 남쪽 주포에 있다”라고 한 기록과, 후대인 1530년에 발간된『신증동국여지승람』등의 관찬(官撰) 지리지와 1747년 정묘년(丁卯年)에 발간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장흥부의 사찬(私撰)지리지인『장흥읍지(長興邑誌)』등 모든 지지·지도에 회령포의 위치를 ‘장흥부 남거(南距) 또는 남지(南至) 50∼77리’라고 표시하고 있다. 회령포진의 설치와 이설사실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기록한 1871년의『호남읍지중장흥도호부지(湖南邑誌中長興都護府誌)』와 1872년에 그린 것으로 알려진「장흥부회령진지도(長興府會寧鎭地圖)」의 표제에 “옛적 본진은 장흥부의 동(東)쪽 60리 떨어진 회령면 휘리포(揮里浦)에 있었는데 장흥부 남(南)쪽 60리 떨어진 대흥면(大興面) 선자도(扇子島)로 옮겨서 옛 이름 그대로 회령포라 했다.”라고 한 기록의 비교를 통해서도 확인해 볼 수 있다.

반면에 장흥부의 동(東)쪽에 소재한 회령면·회령방(會寧坊)에 대해서는『세종실록지리지』이후에 발간된 모든 지지·지도상에 ‘회령폐현(會寧廢縣)’의 기록 외에는 수군의 진포를 위시한 성보(城堡) 등 관방에 대한 특기사항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 또한 위 사실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위 기록들을 토대로 하여 회령포 만호의 병선이 정박했던 회령포진은 처음 병선을 정박시켰던 세종 4년(1422)부터 세종 7년(1425)까지 3년 동안은 장흥부의 동(東)쪽인 지금의 보성군 회천면 관내의 포구에 소재해 있었고, 이후 정박처를 옮겨서 옛 이름을 그대로 붙인 회령포진은 장흥부 남(南)쪽 지금의 장흥군 회진면 관내의 포구에 위치하였다가, 성종 16년(1485)과 성종 21년(1490)사이에 회령포성의 축성을 계기로 현재의 위치인 장흥군 회진면 회진리(會鎭里)에 고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기록- 1554년(명종9년) 회령포 이진설

성벽 완전 보존…‘회천 회령포=군영구미’ 설 근거돼

그러나 회령포진의 설치와 이설에 대해서는 다른 기록이 존재하고 있다.

1940년 발간『장흥지(長興誌)』 “회령진은 명종 9년(1554) 보성군 회령면에서 옮겨와서 회령진으로 개칭하였다.”라고 한 기사가 그것이다. “회령진은 대덕면 회진리에 있는데 동쪽으로는 녹도, 사도를 제어하고 서쪽으로는 마포, 고금도, 신지도와 연결되며 수군만호가 주둔한다. 좌수영에 소속되어 명종 9년(1554)에 보성군 회령면에서 옮겨와서 회령진이라 개칭하였는데 고종 을미년(1895)에 폐지되었으나 성벽 등은 아직까지 완전하게 보존되어있다.” (『장흥지 (무인지, 1938)』, 장흥지속록, 제1권, 고제, 요처)는 기록이 그것이다. 이에 대해

일제시기에 나온 이 읍지 외에는 입증할 만한 자료를 찾아보기 힘들어 그대로 취신(取信)하기는 어렵다는 견해와, 이는 회령포진의 이설 기록이 아니라 수군편제상의 소속변화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하는 추정이 있기도 하지만, 이 기록이 장흥군에서 발행된 주요 향토기록물에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1989년『장흥군의 문화유적』중「장흥군의 연혁」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러한 선행 연구의 결과는 이후에도 비판 없이 수용되어 장흥군에서 발간되는 주요 문헌들인『장흥지리지·읍지모음』,『장흥군지』등에도 기술되고 있을 뿐 아니라, 처음 회령포진이 설치되었던 옛 장흥부의 회령면을 이관 받은 인근 고을인 보성군에서 발간된『보성군사(전)』,『보성군사2-선인의 자취 사료와 역사유적』,『보성문화유산총람(보성문화원 간)(2004)』등은 물론 전라남도의 ‘조선수군재건로조성’ 사업에 참여하는 일부학자들의 저서-노기욱의『약무호남 시무국가 명량 이순신』(2014), 노기욱·이수경·정현창의『금신전선 상유십이 보성 이순신』(2015)에도 이와 유사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어 회령포진의 설치·이설 시기에 대한 관련 연구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고 있는 실정으로, 이에 대한 올바른 역사적 사실을 정립해야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회령포진의 설치와 이설에 관한 다른 견해가 나오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째, 세종 4년(1422)에 회령포에 병선 4척을 정박하여 세워두었다〔泊立〕는 기록을 최초의 설진 기록으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조선 초기의 수군은 병선에 무기와 식량을 싣고 배 위를 영보(營堡)로 삼아 항상 선상에서 근무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원칙에 의하면 당시의 수군 진포는 병선의 정박처(碇泊處)로 지정된 포소(浦所)일 뿐으로 정박처의 이동에 따라 진포의 위치도 수시로 변동 되었으며, 후대의 그것처럼 고정된 성보(城堡)를 수축하여 진포로 삼은 것이 아니었다. 진포의 명칭 또한 회령포진처럼 이전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또는 새로운 포소의 명칭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례는『조선왕조실록』가운데 조선 초기 성종 이전의 관련 기록에서 쉽게 확인 해 볼 수 있는데, 전라도 용문포(龍門浦)에 정박해 있던 도만호(都萬戶)의 병선을 여도(呂島)에 이박(移泊)시킨 세종 7년(1425) 2월의 기사를 여도 도만호진의 설진(說鎭) 기사로 보는 것도 이 같은 사례 중의 하나이다. 병선의 정박처를 포소로 삼는 조선 초기 수군의 근무방식은 본격적으로 진포에 성보를 수축하여 수군의 ‘장재선상수어’ 원칙이 폐지되기에 이른 성종 15년(1484)경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병선의 정박과 이박에 관한 기록을 수군 진포의 설치·이동과 연계해서 해석한 연구의 사례는 관련 논문에서도 확인해 볼 수 있는데 회령포진의 설치와 이설 또한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회령포에 수군 만호진을 설치했다는 사실은, 회령포에 처음 병선을 정박시킨 3년 후인 세종 7년(1425)의 회령포진의 병선을 주포(周浦)로 옮겼다는 기사의 머리에 ‘회령포만호’라는 관직명이 이미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더라도, 적어도 세종 4년(1422)과 세종 7년(1425) 사이 3년 내외간에 이미 회령포에 수군 진포가 설치되어 만호가 주둔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조선 초기의 수군의 근무방식과 관련기록들을 종합하여 판단해 보면 회령포에 병선 4척을 정박하여 세워두었다〔泊立〕는 세종 4년(1422)의 기록을 회령포의 최초 설진 기록으로 보는 견해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다음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을 위시한 모든 장흥부 관련 지지·도서에 나타나고 있는 회령포진이 장흥부의 남(南)쪽에 위치하였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장흥부 남거(南距) 또는 남지(南至) 50∼77리’라고 표시한 회령포진의 위치는 모든 기록상에 변동이 없고, 1871년의『호남읍지중장흥도호부』와 1872년에 그린 것으로 알려진「장흥부회령진지도」의 표제 또한 최초 설진 당시의 회령포 위치를 장흥부의 동(東)쪽 60리로 표시하고 있음은 물론, 관련 기록 중에『세종실록지리지』를 제외하고 가장 빠른 시기인 1530년에 간행된 지리지인『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고려시대에 회령포를 관장했던 회령폐현지(會寧廢縣址)의 위치를 ‘장흥부의 동(東)쪽 32리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해 보더라도, 회령포진의 이진(移鎭)은 적어도 세종 14년(1432)년에 완성된「신찬팔도지리지」전라도조에 “관방(關防)의 수어(守禦)는 회령포가 장흥부의 남(南)쪽 주포에 있다”라고 기록한 때보다 빠른 시기에 이미 이루어 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또한 세종 4년(1422)에 설진한 회령포 만호진을 세종 7년(1425) 이설하였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뒷받침해 주고 있는 기록이라 하겠다.

세 번째로, 부적절한 사료(史料)의 선택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앞에서 언급한 1989년에 발간된『장흥군의 문화유적』중「장흥군의 연혁」의 회령포 관련 기록은 회령포진이 명종 9년(1554)에 보성군 회령면에서 장흥군 대덕면으로 옮겨왔다는『장흥지』기록의 기초 위에, 그 이전 시기인 성종 21년(1490)에 회령포진성이 축조되었다는『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2차적으로 수렴함으로써 진의 이설과 축성의 시기를 시간대별로 정리하여 명종 9년(1554)이전에는 회령포진성이 보성군 회령면에 소재했을 것이라고 추론하면서, 그 이전 시기의 사료인 세종 4년(1422)과 세종 7년(1425)의 기록에 대한 일체의 언급이 없었다.

더 나아가 이후에 계속적으로 발간된 지지·지도의 기록내용과도 배치되는 입증하기 어려운『장흥지』의 기록을 손쉽게 1차 사료로 선택함으로써 사실의 혼란을 초래 하고 회령포진이 소재했던 두 지방자치단체인 보성군과 장흥군의 지방사 연구에 큰 걸림돌로 작용되기에 이른 것이다.

회령포진 1488∼1491 4년간 축성

회천면 전일리‧봉강리 일대 회령포진성은 ‘폐현’

회령포진 등 연안 진포의 축성은 왜구의 침입이 줄어들어 수군의 ‘장재선상수어’의 원칙이 무너지기 시작한 성종 9년(1478) 부터 논의되기 시작하여, 성종 15년(1484) 사헌부 집의 조숙기(曺淑沂)의 건의와 성종 16년(1485) 4도 순찰사 홍응(洪應)의 서계에 따라 전라좌수영 관하의 7개소와 경상도의 3포 등 9개소가 1차적인 축성대상지로 선정되어 성종 19년(1488)부터 성종 22년(1491)까지 4년간에 걸쳐 축성되었다. 회령포진성은 이들 중 비교적 빠른 시기인 성종 21년(1490) 4월에 높이 13척, 둘레 1,990척 규모로 축성이 완료되었다.

이러한 회령포진성의 축성시기에 대한 고찰을 통해 명종 9년(1554)의 이진설에 입각하여 전남 보성군 회천면 전일리와 봉강리 일대에서 회령포진성 관련 유적으로 추정되고 있는 ‘회령포성(귀두산성)’과 ‘구미영지 등의 기록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문제의 제기가 가능해졌다.

나아가 관련 지지·지도의 기록을 참고하여 보면 회천면 봉강리 지역의 ‘회령포성’은 고려시대에 존재했던 회령폐현의 관련 유적〔城池府城〕이고 전일리 군학마을에 소재하여 ‘구미영지’라 불리는 석축열(石築列)은 회령포진성 축성 이전 시기에 회령포 만호가 운영했던 여사(廬舍)의 유적이거나, 아니면 이후 어떤 시기에 왜구를 방비하기 위하여 일종의 엄폐물로 사용되었던 임시 방책(防柵)이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제시할 수 있게 되었다.

‘구미영지’에 대한 이러한 가능성은『보성군사』집필자의 의견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군학마을’ 유래에는 ‘구미영성’으로 나와 있는 ‘구미영지’에 대하여, 보성군사편찬위원회가펴낸 『보성군사(전)』639쪽에서 집필자인 순천대학교 최인선 교수는 “…… 후대에 없어졌다고 해도 현재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점이 수긍하기 어려워서, 혹시 성이 아니라 바다에 상륙하는 왜적을 공격하기 위한 일종의 엄폐물로서 사용되었던 소규모 석축열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김선욱 기자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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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독립운동가 고영태 김한상 김한원 김한태 이종기 선생 등 5명




고영태 선생

 

 

장흥독립운동가 발굴, 기록작업을 3년째 진행하고 있는 장흥문화원(고영천 원장)은 이번 순국선열의 날 계기로 5명이 독립유공자로 포상 받았다고 밝혔다. 이로써 2019년부터 2020년까지 23명(이 가운데 항일의병으로 활동하다 옥고를 치른 오일록 선생은 가족이 신청함)이 새로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는 성과를 낳았다.

이번에 독립유공자 추서를 받은 장흥의 독립운동가들은 고영태(1917~1988 안양면 모령), 김한상(1897~1978 용산면 원등), 김한원(1893~1982 용산면 원등), 김한태(1903~1980 용산면 원등), 이종기(1908~1953 용산면 접정) 선생 등이다.

고영태 선생은 1934년 독립운동 당시 용산면 운주마을에 거주하며 고희석(高喜錫 당시 26세, 아직 독립유공자 미포상)선생과 함께 활동했다. 김한상, 김한원, 김한태 선생은 김두환(金斗煥1990년 독립유공자 포상) 선생과 함께 활동했다. 이종기 선생은 용산면 접정리에서 유재성(劉載星 당시 31세, 아직 독립유공자 미포상) 선생과 활동했다. 젊은 이들은 1933년 사회주의 독립운동 비밀결사 ‘전남운동협의회’에 가입하여, 농민조합과 농민야학을 통해 독립운동을 펼치다 1934년 1월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한편 장흥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이영권 회장)은 장흥독립운동가들을 선양하기 위한 조례 제정과 선양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기념사업회 관계자는 장흥 해동사 안중근 의사와 장흥의 독립지사들이 함께 선양되고 이들을 기념하는 조형물이 설치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독립운동가들의 신원과 후손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각 읍면에서 제적등본을 교부 받도록 협조를 바란다고 말했다.

장흥독립운동가 발굴, 기록작업을 마을현장에서 진행하고 있는 문충선 이사와 김상찬 이사는 아직 후손을 찾지 못해 생애사 기록과 포상 신청을 못하고 있는 장흥독립지사들이 100여명 있다고 말했다. 특히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했던 문명렬(文明烈 당시 21세, 유치면 오복리) 선생과 김종선(金鍾善 당시 23세, 용산면 인암리) 선생의 소재를 찾고 있었다.

장흥문화원은 젊은 활동력이 풍부한 장흥문화공작소(이웅기 이사장)와 협력하여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에 머물지 않고 장흥독립운동가들의 생애사를 기록하는 일도 모색하고 있다. 이는 지역사를 다시 쓰는 작업이자, 문림의향의 역사를 더하는 일이며 학생들에게 좋은 교재가 되어 장흥에 사는 자긍심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출처_ http://www.jhtoday.net/news/articleView.html?idxno=4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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