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문화원

특집 - 육전의 난중일기 남긴 반곡 정경달선생 

이순신 장군의 종사관으로 종횡무진한 정경달 선생

 

 

 

장흥 출신의 명장이자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장군의 종사관으로 종횡무진한 반곡 정경달(盤谷, 丁景達)선생의 ‘육전의 난중일기’가 학계에서 귀중한 자료로 이용하고 있다.

이 난중일기는 임진년(1592) 4월 13일부터 무술년(1598) 2월 17일까지 약 7년동안의 전쟁 기록을 담은 일기에는 당시 평안도 용천, 정주, 곽산에서 난을 맞은 기록이 있어 학계에서는 왜란 당시 남도의 상황을 상세하게 알 수 있는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정경달(丁景達:1542∼1602)선생은 1542년 전남 장흥군 장동면 반산리에서 태어났다.

1570년(선조 3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여 병조정랑, 가평현감, 남원부사, 청주목사, 함경도백, 통정대부에 이르렀으며 본관은 영광, 자는 이회(而晦), 호는 반곡(盤谷), 아버지는 정몽응(丁夢鷹)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산부사로서 의병을 모으고 관찰사 김성일(金誠一), 병마절도사 조대곤(曺大坤)·정기룡(鄭起龍)·이해(李垓) 등과 함께 기략(奇略)을 써서 적을 경북 금오산 전투에서 왜적 415명을 참수하며 크게 승리하였다.

◇정경달 선생의 임진왜란의 활약상을 살펴봤다.

1592년 4월 28일 상주가 함락되자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은 싸움을 포기하고 달아났다. 정경달 선생은 잠시 몸을 피신한 후 흩어져 있는 관군과 군민을 모았다.

지략을 겸비한 군민 허설(許說)과 김유일(金惟一)로 하여금 금오산에 진을 치게 하고 종일 적과 싸워 많은 병기를 노획하였다.

8월에 서산 각암으로 출전하였으며 9월에 감사 학봉 김성일(金誠一)이 전공을 기리는 서찰을 보내왔다.

뒤이어 창석 이준(李埈), 백사 이항복(李恒福), 임당 정유길(鄭惟吉)이 의병을 일으켜 합세하니 10월 15일 선산 의병은 상주 죽현으로 옮겨 진지를 구축하고 지형과 지세를 가리며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17일에는 해평으로 의병 진지를 이동하였다. 11월에는 대둔사(大芚寺)로 이동하여 진지를 구축하였다. 이듬해 2월초에 이준 형제가 이끄는 의병과 합류하여 무등곡에서 적을 섬멸하고 4월에 금오산 도선굴로 돌아왔다.

5월에 김산(金山 김천)에 주둔하니 일 년 간 적을 죽인 것이 수천명 이었고 많은 병기를 노획하였다.

명나라 군의 영남 진격에 따라 각 고을에서 식량을 공급해야 하는데 고을마다 식량이 바닥이 났다.

그래서 정경달이 도선굴에 비축하여 두었던 양곡으로 일부 명나라 군사의 군량미로 충당하니 명나라 장수 유총병(劉總兵)이 식리장군(識理將軍)이라 하며 치하하는 글과 금빛 부채를 주어 선산 의병의 공적을 찬양하였다.

어사 윤경립(尹敬立), 순찰사(巡察使) 김근(金勤)이 선산 의병의 전공을 나라에 알려 크게 치하하는 서찰이 왔다. 선산의 의병 활동은 왜군을 위협하여 조령을 경유하는 주력 부대의 진출을 견제하고 후방을 교란하는 힘이 되었다.

1594년 당시, 장기전이 된 전쟁으로 수군은 굶주림과 역병(疫病)으로 인해 많이 죽어나갔고 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도 손을 쓸 수 없었다.

또한 이순신의 호령이 고을 수령에게 시행되지 않았고, 여러 장수가 서로 화합하지 않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1594년에는 이에 조정에서 명망 있는 문관을 종사관으로 삼아 보낼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마침 유성룡이 이순신 장군의 계청(啓請)을 받아들여 전 부사(府使) 정경달(丁景達) 선생을 이순신 장군의 종사관으로 삼았다.

그는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행정, 징모업무, 군수조달, 시찰, 전령, 명 장수들과의 외교 등을 담당했다.

특히 선산부사(善山府使) 재직시 능력을 발휘한 정경달 선생으로 인해 이순신 장군이 지방에 주둔한 군대의 군량이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병사가 경작하던 토지인 둔전(屯田)을 맡겨 성공을 거두니 병기와 군량이 풍족하고 새로 만든 병선이 배(倍)가 되었다.

조정에 장계를 올리고, 한산도 부근 해평농장, 순천 돌산도 흥양의 도양장(전남 고흥군 도양면 도덕리), 해남의 황원곶(전남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 강진의 화이도(전남 완도군 고금면) 등에서 둔전을 시작하였다.

돌산도는 군관 송성(宋晟), 도양장은 이기남, 화이도와 황원곶은 종사관 전 부사 정경달(丁景達) 선생을 감독으로 보냈다.

또한 항만 내 평탄한 간석지에는 염전을 경영케 하며 도기도 굽게 했고, 해운업의 길도 열어줘 피난민 중 상업가를 지휘하여 무역을 행하는 이도 생겼다.

이렇게 군민이 단결하여 나중에는 양곡, 어염, 포목 할 것 없이 구하지 못하는 것이 없게 돼 저장된 곡식이 수만 석에 달했다. 이순신 장군으로선 일류 병참참모를 곁에 둔 것이었다.

정경달 선생은 이때의 공적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정경달 선생의 아들인 정명열(丁鳴說)도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에게 쌀과 배를 보태고 명량해전에 함께 참전하였다.

정경달 선생은 사후에 예조참판에 증직되었고 선무원종훈에 올랐다. 어찌되었건 그의 부자는 이순신 장군의 뒤에서 병참보급을 훌륭히 지원해, 최상의 전투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한, 최고의 보급참모였다.

1597년 3월 이순신 장군이 원균(元均)의 모함으로 투옥 되자, 정경달(丁景達) 선생은 조정에 나아가

탄원서를 내고 직접 선조 임금을 독대하여 그의 석방을 위해 종횡무진으로 노력하였다.

나이도 이순신 장군보다 3살이나 많았고 높은 벼슬도 먼저 하였건만 아랑곳 하지 않고 솔선수범하며 상사를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1597년 4월경 이순신 장군이 참소를 당해 옥중에 있을 때 공(公)이 서애(西厓) 유성룡, 백사(白沙) 이항복 두 분을 찾아갔더니, 그들이 묻기를, “그대가 남쪽에서 왔으니 원균과 이순신의 옳고 그름(是非)에 대해 말해 줄 수 있겠는가?”라고 하므로, 공(公)이 말하기를, “누가 옳고 그른가는 말로써 해명할 게 아니라, 다만 보니 이순신이 붙잡혀가자 모든 군사들과 백성들이 울부짖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이(李) 공(公)이 죄를 입었으니 이제 우리들은 어떻게 살꼬.” 할뿐이었소. 이것을 보면 그 시비를 알 수 있을 것이오. 라고 대답 하였다.

또한 “이순신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적을 방어하는 재주는 일찍이 그 예를 찾을 수 없다. 장수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기회를 엿보고 정세를 살피는 것을 가지고 싸움을 주저한다고 몰아 죄를 물을 수는 없다. 왕께서 통제사를 죽이게 되면 사직을 잃게 된다”고 임금께 고하였다.

이러한 기록에서 알 수 있듯, 이순신 장군과 정경달 선생은 서로 존경하고 신뢰한 사이였다.

19세기 다산 정약용은 적을 방어한 수령의 모범 사례로 정경달 선생을 높이 평가해 <목민심서> ‘어구(禦寇)’ 항목에 수록했고, 강진 유배시절에는 정경달의 난중일기들을 모아 <반곡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정경달 선생이 남긴 『난중일기』『진법(陳法)』과 『광국공신계회도(光國功臣契會圖)』『흉배(胸背)』『공신록권(功臣錄券)』등이 1988년도에 지방유형문화재 제164호로 지정되었다.

장동면 반산리 반계사에 배향되었다. 반계사에 모셔진 조선 선조 때의 정경달(1542∼1602)선생의 관련된 자료들이다.

반계사는 숙종 40년(1714)에 영광 정씨 문중이 중심이 되어 건립한 것으로, 영광 정씨의 정인걸, 정경달, 정명설, 정남일 네 사람과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큰 공을 세운 이순신, 임영립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건물이다.

고종 5년(1868) 훼손 되었던 것을 1957년 지금의 자리에 강당을 새로 짓고, 1959년에 탑을 세워 사우로서의 기능을 대신케 하였다.

유물과 유품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반곡의 『난중일기』는 정경달 선생이 임진왜란 초에 참전했던 일기와 명군접반사로 재직할 당시의 일기로, 제2의 ‘난중일기’로 평가되고 있다.

필사본 『반곡일기』하권 1책과『반곡년기』1책이 여기에 해당한다. 본래 정경달 선생의『난중일기』는 2책이었으나 선조 31년(1598)부터 1602년까지의 내용만이 현재 남아있다. 이를 순조 15년(1815) 정약용 선생이『반곡집』에 수록하였다.

진법은 옛 책의 필사본으로 채색된 진법도가 함께 들어 있다. 군영, 군률, 진법이 그림으로 수록되어 있어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군의 전략, 전술을 살피는데 도움이 된다.

광군공신계회도는 구전으로 궁궐도라 불려져 왔던 계회도인데 비단 바탕에 채색하였으며, 상태가 심하게 훼손되었다. 이 공신계회도는 선조 24년(1591)의 것으로 윗쪽 반면에 어전 건물 및 참여 인물도가 있고 하단에는 공신 14명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흉배는 2매로 정경달의 관복유품이며, 학배이다. 공신녹권은 공이 있는 신하에게 나라에서 공신으로 임명하여 내리는 인정서로, 「광국원종공신록권」은 1591년에 발행된 것으로 1책이며, 「선무원종공신록권」은 1603년에 발행되었으며, 1책이다. 그 외에 1760년의 「호남갑자막의록」과 「불갑사간」1책, 교지 등 다수의 고문서 자료가 있다.

참고로 정경달 선생과 같이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활약했던 장흥출신은 마하수(馬河秀), 김몽성(金夢成), 선세신(宣世臣), 신용범(申龍虎), 신용준(申龍俊), 임영립(林英立), 김성원(金聲遠) 마성룡(馬成龍), 마위용(馬爲龍), 박은복(朴銀福) 등이다.

 

http://www.jgy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4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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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구 감찰서. 이때 감찰서에서는 5개군 경찰서를 감리했다. 1946년도 경찰관 모집 전형도 시행 인사관계 전반 관리했다.

 

 

●읍면장과 지서장 합동회의(1949. 9. 26)

 

 

●1946. 4. 11
제 19관구 장흥경찰서 경찰로 조직된 토벌대. 6.25빋범 M1 소총과 박격포로 무장

 

 

●당시 장흥경찰서 유치장,이때는 장흥,강진,영암,해남,완도 5개군 미결수를 수용하는 현재 교도소 역할을 했다.

 

 

●1934.3.5 신축되어 1987.6.2가지의 장흥경찰서 전경

 

 

●제4기동 경비대

 

 

●당시 제19관구 경찰서인 장흥경찰서

 

 

●해방 직후 장흥에 창설된 제 19관구 경찰서 기마대(구서칠 기마대장) 1951년 9월 28일 밤 공비 습격으로 기마대 청사가 전소하고 말도 불에 타 죽었다.

 

 

●관내 기관단체장이 인권주간 행사 후 유치장 방문(1960)

 

 

 

●5개군(장흥, 강진, 완도, 보성, 영암)의 수형인을 수감했던 유치장

 

 

 

 

●6.25전쟁 말기의 경찰서 직원( 김영봉 서장 때 오희수 경무계장 송별 기념)(1952. 7. 27)

 

 

●1950년대 경찰관 복장 및 무기

 

 

 

 

 

●구청사를 헐고 1972년 8월 9일 착공하여 1973 7월 1일 준공된 검찰청사
검찰지청은 1909년 10월 1일 장흥 강진 해남 영암 완도 보성 등 6개 군을 관할하는 광주지방검찰청 장흥지청으로 개설되었다. 1948년 6월 12일 합의지청으로 승격되었고, 1982년 2월 1일 보성이 순천지청, 1982년 9월 1일 해남 완도는 해남지청으로, 1983년 2월 1일 영암은 목포지청으로 분할되었다(초대 지청장은 황천수)

 

 

●1957.3.20 장흥검찰청에서 관할 경찰서장 및 수사주임 회동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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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동헌 자리, 당시 군청으로 활용(장흥읍 동동리)

 

 

●구 군청 李昌奎에서 4번째) 군수시절(1949. 7. 31~1951. 12. 7재임)
(1951년 12월에 현위치인 장흥읍 건산리로 옮기다.)

 

 

●장흥군 里行政사무연구회 제1회 기념(1952. 10. 31)黃道益 군수때(1952. 7. 5~1954. 3. 17재임)

 

 

●동동리 옛 돈헌에서 1949년 현위치로 옮겨온 장흥군청

 

 

●황도익 군수 때 군민의 숙원사업으로 건립된 군청

 

 

●1951년 12월 25일 부산면사무소 직원 촬영

 

 

●군자치제 2주년을 맞아 군내 선행자에게 감사장 수여

 

 

●일제때 대덕면사무소 전경

 

 

●1934년도에 건립된 장흥읍사무소는 1991년까지 존속하다가 현대식으로 다시 고쳐 지었다.

 

 

 

●최근 읍사무소

 

 

●영산포 헌병대 장흥분견대 병력.
당시 헌병 보조원을 두고 통변(통역)을 두고 무단 침략을 했다.

 

 

●대덕면사무소 회의실 배경(1937년경). 앞줄 좌에서 3. 이세옥 4. 조대현(순사부장)
7. 이형백 8. 박기봉,뒷줄 좌에서 4. 김서오 5. 김형기(의사)

 

 

●안양지서. 해방 후 처음으로 입은 경찰제복(1947. 3. 16)

 

 

●장흥경찰서 앞 기념사진 (이용기 서장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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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기간: 2019년 6월 4일(화) ~ 2019년 9월 1일(일)

전시장소: 국립나주박물관 기획전시실

이번 특별전에서는 선사부터 현대까지의 문화유산과 인물, 역사적 사건 등을 정리하여 장흥군의 역사·지리적 유래와 정체성, 장흥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재조명하고 널리 알리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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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은 학생답게' 학풍을 세우기 위해 서있는 규율부 학생들

 

● 1956년 초대 용산면 의원일동

 

●대덕면 사무실 6.25후 청사

 

●1950년 5월 30일 선거에서 고영완의원 국회의원 당선(2대)축하를 기념하기 위해 모인 

핵심 당직자들

 

●헌법 제6장을 개정하라 외치는 군민대회(개헌추진 군민대회에 동조하는)

 

●헌법 제6장을 개정하라는 외침

 

 

●10대 총선 신민당 연설회 장면(예양강변. 1978

 

3. 주민을 이끌고 학생을 가르치고/기관

 

●이장용군수 산양군수로 전임, 관기와 관속들, 그리고 관인을 들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1905.2~1907. 4재임)


●조선후기 장흥도호부 동헌의 상량문,1809년 당시 부사 신석유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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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3일 제 8회 신문의 날 행사, 장흥극장에서(1962)

 

●군청내 공회당에서 열린 대한부인회 조직대회(청내에 공회당이 있었다.)

 

●장흥군청안에 신축공사중인 공회당 건물, 지금은 헐리고 없다.

 

●반공웅변대회 ' 반공을 국시로 교육은 반공에서'

 

●제8회 대통령배 반공웅변대회 장흥예선(1971. 3. 11)

 

●청소년선도 및 보호의 달 시가행진(장흥읍 건산3구의 장안약방 앞. 1964. 8.1)(동교통 장흥아케이드가 서있다

 

●청소년 보호 및 선도행사를 매년 연례행사로 했었다.(자유당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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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없는 휴전반대'를 외치고 있다.

 

●유치국민학교에서 열린 유치면민대회

 

●휴전반대 장흥읍민대회(칠거리에서, 대한청년단 장흥군단부 등 참석)

 

●부녀자들의 휴전반대

(장흥서초등학교에서, 자유당 장흥군당부, 북진통일 국민 총궐기위원회 장흥군 위원회 등 참석)

 

●칠거리

 

●신덕관 앞

 

●5.16 후 국시를 반공으로 삼아 잦은 시가행진을 했었다.

 

●5.16 이후 재건국민운동 본부 장흥군 지부(지부장 김도순) 단합체육대회

 

●1960년대에는 '반공', '승공'이 일종의 국시처럼 되어 각종 궐기대회, 행사 등이 줄을 이었고
중고생은 물론 국민학생까지 참여했다. 시가행진은 보통 장흥국교-동동리-경찰서 앞- 남외리-
남국교- 석대바위- 서국교앞- 칠거리- 동교로 이어졌다.

 

●예양강변과 동교에 운집한 주민, 학생

 

●여중고생의 시가행진(칠거리)

 

●국교생 가장행렬

 

●북한의 실정을 가장한 행렬(동교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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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5월 14일 대덕면 유지 대표들이 장흥 봉림지구에서 토벌작전에 임하는 대덕지서를 위문

 

●사복입은 경찰토벌대

 

●6.25가 발발하자 국민방위군을 조직, 지역을 지킨 국민방위군을 움직인 단위 간부들

(앉아있는 사람 좌에서 길민식, 정상섭, 위윤환, 박내현)

 

 

●장흥경찰서 앞 도치카. 경찰은 1950년 10월 6일 장흥수복 즉시 장흥읍사무소를 중심으로

성안 일대를 대발로 막았다.

 

●부산면지서 직원과 전투대원들(1951. 9. 10)

 

●1950년부터 53년까지 소탕작전중 기습을 당해 전시한 일들이 허다했다.

 

●읍사무소 뒤뜰의 장례식

 

●당시 저편이 이편을, 이편이 저편을 죽여야 하는데 젊은이의 죽엄(주검)이 너무나 애처로웠다.

 

●1952년 10월경 UN군 장흥진주를 환영하고 있는 군민들(칠거리)

 

●기양리 향토방위대들이 유엔군 환영 기장행렬을 끝내고 찍은 기념사진(1952. 10)

 

●국민회 부녀회장 결의문 낭동(각 단체모임)
1953년 6.25전쟁 말기에 휴전논의가 있자 '통일없는 휴전은 결사 반대'라는 궐기대회가 곳곳에서 일어났다.

 

●장흥읍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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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마경찰의 입회하에 실시한 장흥읍 향보단 훈련(장흥초등학교에서,1948. 5. 9)

 

 

 

●독립촉성국민회 조직위원회에 기념촬영. 진남용 연설 다수 여성회원 참석
1946 2월 결성된 대한독립촉성 국민회의 조직위원회 장흥군 결성대회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원래 1946년 2월 8일에 조직된 국민운동단체이다. 반탁운동과 미.소 공동위원회의 반대, 좌익의 봉쇄 등의 광범한 운동을 전개하다가 같은해 6월 하순<민족통일본부>로 개편하여 재발족했다. 총재에 이승만, 부총재가 김구,김규식 등이 추대되었다.

 

●민주국민당 당원대회, 김정현, 진남용, 고영완, 이자산, 최종민, 최동희, 김영기, 주장오, 곽동식. 주축당원이었다(창랑정에서 1949년)

 

 

 

●1946. 7월 결성된 민족청년단원의 훈련 후 기념사진
조선민족청년단은 1946년 10월 이범석이 조직한 우익청년단체로 '族靑'이라 했다. 창립 당시 300명이었으나 2년 후 120만으로 확대되었다. 처음에는 <비군사><비정치>를 표방했으나 정치운동에 가담하다가 1949년 모든 청년단체를 통합 단일화하라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대한청년단에 흡수 해체되었다.

 

 

●조선민족청년단 장흥군단부 제11기 수료생 기념(수강약국 뒷마당)
광복전 일정때에 장흥화물역이 있었다. 이 창고는 화물하치장으로 사용하였다.
광복 후 이 터에서 당시 활동하는 단체들의 공동 자취장으로 쓰여져 수백명이 침식을 한 곳이다.

 

 

●대한청년단 용산면단부
대한청년단은 대한청년단, 청소년조선총동맹, 국민회의 청년단, 대한독립청년단, 서북청년회 등 20여개 우익단체가
1949년 12월 19일 통합된 조직이다. 총재 이승만, 최고위원 장택상, 지청천, 전진한, 유진산, 신성모, 200만 단원
으로 이승만 지지세력으로 활동 했다. 뒤에 국민방위군으로 개편했다.

 

 

●용산초등학교

 

 

●각 면에까지 여자청년단을 조직 훈련(1949)

 

 

●장흥서초등학교

 

 

●유치면 여자청년대

 

 

●동교 대한 청년단 부녀계원들이 종합훈련을 마치고(1949. 11. 28)

 

 

●문경구 유치면장과 면,지서직원(1950.10)

 

 

●부산면 심천 주재 병력이다.

 

 

●조선민족청년단이 해체되고 대한청년단이 조직된 후 정예부대로 ‘특공대’를 조직하여 훈련수료를 마치고 (1952. 2. 24)

 

 

●1946년 9월 창립된 현 의용소방대 전신의 방공단(첫째줄 왼쪽 6번째 당시 단장 손석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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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장흥의 경제를 주도했던 상공인들
김대준 장순남 이춘선 김의택 오부장 안부장 노무라 구니고 김남식 박제국 문재환

 

 

●1928(단기 4261) 광주 무덕전 앞, 장흥 각면 행정주무유지 지도자 기념

 

 

 

●일제시대 장흥읍 위원
일제 강점기에 최하금 행정기관인 邑의 의결기관으로 邑議會를 두었다.
1917년에 面중에서 비교적 인구가 많고 상공업이 발달하여 도시적인 면모를 갖춘 곳을
指定面이라 하다가 1931년 총독부령 제11호로 邑面制를 실시하면서 책임자를 읍장이라고 의결기관으로 邑會가
구성되었다. 근대적인 의미에서 읍의회 구성은 1952년 〈지방자치법〉에서이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 축하행렬(木炭車)
(1948.8.15 장흥읍사무소 앞}
1945년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자 포츠담 선언데 의하여 광복되었다. 얄타협정에 의하여 북위
38도선을 두고 북한은 소련군, 남한은 미군이 진주하여 국토는 양단되고 군정이 실시되었다. 미국의 제의로
1947년 11월 제2회 유엔총회에서 우리나라 독립문제를 토의하게 되자, 유엔한국위원단을 조직하여 이 위원단의
감시하에 자유선거를 실시랗ㄹ 것을 결의 하였다. 북한의 소련 점령 지역에서는 이를 거부하여 남한에서는 유엔
 감시하에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실시,5월 31일 국회가 열리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내외에 선포
하였으며 초대 대통령에는 이승만이 취임했다. 전국 각지에서 정부수립기념 축하행사가 열렸고 장흥에서는 장흥
읍사무소앞(칠거리)에서 열렸다. 중앙의 차량은 드럼통에 든 숯을 태워 그 힘으로 움직였다.

 

 

 

 

●장흥초등학교에서 열린 이승만 대통령취임 축하대회(1948.8)
유엔의 결의에 의해 1948년 8월 15일 남한지역만의 총선거가 실시되고, 5월 31일 최초의 국회가 개원, 7월 17일
헌법을 공포했다. 7월 20일 국회에서 실시한 정,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영이 당선, 7월 24일
취임식을 갖고 거국내각을 구성했으며 8월 15일 광복 3주년을 맞아 정부수립 선포식을 했다.

 

 

 

●국회 뿌락치 사건 설명회와 군민성토대회(1945. 5. 20 장흥읍사무소 앞)
1949년 4월 이른바 남로당 프락치(공작원)로 제헌국회에 침투 첩보 공작을 한 혐의로 당시 국회부의장 김약수 등
13명이 체포된 사건,이들 진보적 소장파들은 외국군의 완전 철수, 남북정치회의 개최 등<평화통일방안> 7원칙을
제시했는데 평화통일, 자주통일을 불온시하고 북진통일만 주장하던 이승만 정권은 이들이 남로당 공작원과 접촉,
정국을 혼란시키려했다는 혐의를 씌워 검거했고 전국적으로 성토대회를 유도했다.

 

 

 

 

 

●장흥중학교 교정에서 열린 "국민회의 북진통일결의대회"(국민회 회장 김정현 부회장 진남용)
광복직후 남한에서 좌우익의 대립을 결정적으로 격화시킨 것은 신탁통치문제로서 이를 둘러싸고 이승만계열은
신탁통치반대, 남한단독정부수립을, 김구계열은 신탁통치반대, 남북통일정부수립을, 좌익계열은 신탁통치찬성,
신탁통치보류, 통일된 임시정부수립을 각각 주장했다. 특히 이승만 중심의 우익세력은 1946년 6월 3일 '정읍발언'
이후 남한단독정부수립을 본격화했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 반군 소탕작전을 위한 군병력(유치 송정리에서)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20일 여수에 주둔중이던 국군 제 14연대에서 일어난 반란사건이다. 그해 4월 3일 제주도에서
남한 단독정부수립을 위한 5.10선거에 반대하는 무장봉기가 일어나자 이를 진압키 위해 여수주둔 14연대를 파견키로
하자 좌익계 군인들이 출동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었으며 반란군은 지리산일대로 들어가
본격적인 유격대(빨치산Partizan)활동을 전개해것이 소설 태백산맥이다.

 

 

 

●1948년 여순사건직후 11월 국군 20연대 1중대원들이 반군 소탕작전을 위해 장흥에 왔다(읍사무소 뒤 예양강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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