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문화원

●'통일없는 휴전반대'를 외치고 있다.

 

●유치국민학교에서 열린 유치면민대회

 

●휴전반대 장흥읍민대회(칠거리에서, 대한청년단 장흥군단부 등 참석)

 

●부녀자들의 휴전반대

(장흥서초등학교에서, 자유당 장흥군당부, 북진통일 국민 총궐기위원회 장흥군 위원회 등 참석)

 

●칠거리

 

●신덕관 앞

 

●5.16 후 국시를 반공으로 삼아 잦은 시가행진을 했었다.

 

●5.16 이후 재건국민운동 본부 장흥군 지부(지부장 김도순) 단합체육대회

 

●1960년대에는 '반공', '승공'이 일종의 국시처럼 되어 각종 궐기대회, 행사 등이 줄을 이었고
중고생은 물론 국민학생까지 참여했다. 시가행진은 보통 장흥국교-동동리-경찰서 앞- 남외리-
남국교- 석대바위- 서국교앞- 칠거리- 동교로 이어졌다.

 

●예양강변과 동교에 운집한 주민, 학생

 

●여중고생의 시가행진(칠거리)

 

●국교생 가장행렬

 

●북한의 실정을 가장한 행렬(동교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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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5월 14일 대덕면 유지 대표들이 장흥 봉림지구에서 토벌작전에 임하는 대덕지서를 위문

 

●사복입은 경찰토벌대

 

●6.25가 발발하자 국민방위군을 조직, 지역을 지킨 국민방위군을 움직인 단위 간부들

(앉아있는 사람 좌에서 길민식, 정상섭, 위윤환, 박내현)

 

 

●장흥경찰서 앞 도치카. 경찰은 1950년 10월 6일 장흥수복 즉시 장흥읍사무소를 중심으로

성안 일대를 대발로 막았다.

 

●부산면지서 직원과 전투대원들(1951. 9. 10)

 

●1950년부터 53년까지 소탕작전중 기습을 당해 전시한 일들이 허다했다.

 

●읍사무소 뒤뜰의 장례식

 

●당시 저편이 이편을, 이편이 저편을 죽여야 하는데 젊은이의 죽엄(주검)이 너무나 애처로웠다.

 

●1952년 10월경 UN군 장흥진주를 환영하고 있는 군민들(칠거리)

 

●기양리 향토방위대들이 유엔군 환영 기장행렬을 끝내고 찍은 기념사진(1952. 10)

 

●국민회 부녀회장 결의문 낭동(각 단체모임)
1953년 6.25전쟁 말기에 휴전논의가 있자 '통일없는 휴전은 결사 반대'라는 궐기대회가 곳곳에서 일어났다.

 

●장흥읍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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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마경찰의 입회하에 실시한 장흥읍 향보단 훈련(장흥초등학교에서,1948. 5. 9)

 

 

 

●독립촉성국민회 조직위원회에 기념촬영. 진남용 연설 다수 여성회원 참석
1946 2월 결성된 대한독립촉성 국민회의 조직위원회 장흥군 결성대회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원래 1946년 2월 8일에 조직된 국민운동단체이다. 반탁운동과 미.소 공동위원회의 반대, 좌익의 봉쇄 등의 광범한 운동을 전개하다가 같은해 6월 하순<민족통일본부>로 개편하여 재발족했다. 총재에 이승만, 부총재가 김구,김규식 등이 추대되었다.

 

●민주국민당 당원대회, 김정현, 진남용, 고영완, 이자산, 최종민, 최동희, 김영기, 주장오, 곽동식. 주축당원이었다(창랑정에서 1949년)

 

 

 

●1946. 7월 결성된 민족청년단원의 훈련 후 기념사진
조선민족청년단은 1946년 10월 이범석이 조직한 우익청년단체로 '族靑'이라 했다. 창립 당시 300명이었으나 2년 후 120만으로 확대되었다. 처음에는 <비군사><비정치>를 표방했으나 정치운동에 가담하다가 1949년 모든 청년단체를 통합 단일화하라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대한청년단에 흡수 해체되었다.

 

 

●조선민족청년단 장흥군단부 제11기 수료생 기념(수강약국 뒷마당)
광복전 일정때에 장흥화물역이 있었다. 이 창고는 화물하치장으로 사용하였다.
광복 후 이 터에서 당시 활동하는 단체들의 공동 자취장으로 쓰여져 수백명이 침식을 한 곳이다.

 

 

●대한청년단 용산면단부
대한청년단은 대한청년단, 청소년조선총동맹, 국민회의 청년단, 대한독립청년단, 서북청년회 등 20여개 우익단체가
1949년 12월 19일 통합된 조직이다. 총재 이승만, 최고위원 장택상, 지청천, 전진한, 유진산, 신성모, 200만 단원
으로 이승만 지지세력으로 활동 했다. 뒤에 국민방위군으로 개편했다.

 

 

●용산초등학교

 

 

●각 면에까지 여자청년단을 조직 훈련(1949)

 

 

●장흥서초등학교

 

 

●유치면 여자청년대

 

 

●동교 대한 청년단 부녀계원들이 종합훈련을 마치고(1949. 11. 28)

 

 

●문경구 유치면장과 면,지서직원(1950.10)

 

 

●부산면 심천 주재 병력이다.

 

 

●조선민족청년단이 해체되고 대한청년단이 조직된 후 정예부대로 ‘특공대’를 조직하여 훈련수료를 마치고 (1952. 2. 24)

 

 

●1946년 9월 창립된 현 의용소방대 전신의 방공단(첫째줄 왼쪽 6번째 당시 단장 손석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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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장흥의 경제를 주도했던 상공인들
김대준 장순남 이춘선 김의택 오부장 안부장 노무라 구니고 김남식 박제국 문재환

 

 

●1928(단기 4261) 광주 무덕전 앞, 장흥 각면 행정주무유지 지도자 기념

 

 

 

●일제시대 장흥읍 위원
일제 강점기에 최하금 행정기관인 邑의 의결기관으로 邑議會를 두었다.
1917년에 面중에서 비교적 인구가 많고 상공업이 발달하여 도시적인 면모를 갖춘 곳을
指定面이라 하다가 1931년 총독부령 제11호로 邑面制를 실시하면서 책임자를 읍장이라고 의결기관으로 邑會가
구성되었다. 근대적인 의미에서 읍의회 구성은 1952년 〈지방자치법〉에서이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 축하행렬(木炭車)
(1948.8.15 장흥읍사무소 앞}
1945년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자 포츠담 선언데 의하여 광복되었다. 얄타협정에 의하여 북위
38도선을 두고 북한은 소련군, 남한은 미군이 진주하여 국토는 양단되고 군정이 실시되었다. 미국의 제의로
1947년 11월 제2회 유엔총회에서 우리나라 독립문제를 토의하게 되자, 유엔한국위원단을 조직하여 이 위원단의
감시하에 자유선거를 실시랗ㄹ 것을 결의 하였다. 북한의 소련 점령 지역에서는 이를 거부하여 남한에서는 유엔
 감시하에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실시,5월 31일 국회가 열리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내외에 선포
하였으며 초대 대통령에는 이승만이 취임했다. 전국 각지에서 정부수립기념 축하행사가 열렸고 장흥에서는 장흥
읍사무소앞(칠거리)에서 열렸다. 중앙의 차량은 드럼통에 든 숯을 태워 그 힘으로 움직였다.

 

 

 

 

●장흥초등학교에서 열린 이승만 대통령취임 축하대회(1948.8)
유엔의 결의에 의해 1948년 8월 15일 남한지역만의 총선거가 실시되고, 5월 31일 최초의 국회가 개원, 7월 17일
헌법을 공포했다. 7월 20일 국회에서 실시한 정,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영이 당선, 7월 24일
취임식을 갖고 거국내각을 구성했으며 8월 15일 광복 3주년을 맞아 정부수립 선포식을 했다.

 

 

 

●국회 뿌락치 사건 설명회와 군민성토대회(1945. 5. 20 장흥읍사무소 앞)
1949년 4월 이른바 남로당 프락치(공작원)로 제헌국회에 침투 첩보 공작을 한 혐의로 당시 국회부의장 김약수 등
13명이 체포된 사건,이들 진보적 소장파들은 외국군의 완전 철수, 남북정치회의 개최 등<평화통일방안> 7원칙을
제시했는데 평화통일, 자주통일을 불온시하고 북진통일만 주장하던 이승만 정권은 이들이 남로당 공작원과 접촉,
정국을 혼란시키려했다는 혐의를 씌워 검거했고 전국적으로 성토대회를 유도했다.

 

 

 

 

 

●장흥중학교 교정에서 열린 "국민회의 북진통일결의대회"(국민회 회장 김정현 부회장 진남용)
광복직후 남한에서 좌우익의 대립을 결정적으로 격화시킨 것은 신탁통치문제로서 이를 둘러싸고 이승만계열은
신탁통치반대, 남한단독정부수립을, 김구계열은 신탁통치반대, 남북통일정부수립을, 좌익계열은 신탁통치찬성,
신탁통치보류, 통일된 임시정부수립을 각각 주장했다. 특히 이승만 중심의 우익세력은 1946년 6월 3일 '정읍발언'
이후 남한단독정부수립을 본격화했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 반군 소탕작전을 위한 군병력(유치 송정리에서)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20일 여수에 주둔중이던 국군 제 14연대에서 일어난 반란사건이다. 그해 4월 3일 제주도에서
남한 단독정부수립을 위한 5.10선거에 반대하는 무장봉기가 일어나자 이를 진압키 위해 여수주둔 14연대를 파견키로
하자 좌익계 군인들이 출동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었으며 반란군은 지리산일대로 들어가
본격적인 유격대(빨치산Partizan)활동을 전개해것이 소설 태백산맥이다.

 

 

 

●1948년 여순사건직후 11월 국군 20연대 1중대원들이 반군 소탕작전을 위해 장흥에 왔다(읍사무소 뒤 예양강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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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격동의 현장, 부침하는 인심/ 정치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때, 대덕, 관산, 회진 주민들이 해태를 팔아 성금을 모금하여 제작된 함상전투기.

군부(해군성)에서 엽서로 제작하여 보낸 사진.

1932년 경북도 평의원 문아무개가 육군기 1대를 헌납한 이래 '1군 1기 헌납운동'이 전개되어 강제기부로 돈을 모았고 일제는 중일전쟁
(1937. 7.7 개전)과 태평양전쟁(1941`. 12. 8개전)을 일으키면서 강제모금은 물론 물자 공출까지 실시한다.

 

●1937년 민심 선도를 목적으로 활동한 연극패

 

●태평양 전쟁 때 일본의 홍콩함락 축하 가장행렬을 하며 징병에 참여한 자들의 공훈을 추세기며 징병을 강요했다.
태평양전쟁은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미국의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함으로써 일어난 전쟁으로 일본과 미국 영국 네덜라늗 등의 연합국 사이에 일어났다. 주로 남서태평양과 남동아시아를 중심으로 싸웠고 일제는 우리나라에서 애국자 검거,징용,강제지원병, 공출,일본군 위안부(정신대)등 학정을 멋대로 일삼았다.

 

●일제는 태평양 전쟁 막바지에 내선일체를 내세우고 국민 총동원령을 내려 조상 대대로 쓰던 유기그릇까지 모두 공출시켰다
(기양리에서 공출시킨 유기들)


 

광복직후 청년단들
1945년 해방청년단원이 광주에서 개최한 씨름대회에 참가하여 황소 두마리를 부상으로 받았다, 장흥읍사무소 벽변에는
건국준비위원회의 간판이 붙어있고 현재까지 역사를 증명하는 당시의 소나무는 소년기였다.

 

●광복 이듬해 장흥초등학교에서 열린 3.1운동 기념행사(1946. 3.1)
1919년의 3.1운동은 일제지배하 한국민족 최대의 독립운도이었다. 이 운동을 통하여 우리민족은 한국민족의 독립의지를 내외에 과시하였다.
전국 210여군데서 수백만명이 참가했다. 전남지방에서도 수많은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는데, 다른 지역보다 약간 늦은 3월10일의 광주시위를
기점으로 전남 각지로 확산되었다. 장흥에서는 천도교;교구장인 김재계 선생이 교구원인 김재반, 황생주.황업주 등과 함께 시위를 직접준비하여
3월 15일 읍내시장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4월초까지 각 면에서도 시위가 전개 되었다. 사진은 광복직후인 1946녕의 3.1운동
기념식으로 당시는 좌우의 대립이 심하지 않았던지 함께 참여하였다. 지금은 세아름이 넘는 큰 프라타나스나무는 아주 작았고 담장이 둘러지지 않은 학교주변으로 구경꾼도 보이고 시내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금의 충혼탑자리에 기공식을 하고나서(남산공원)
신사란 일본 왕실의 조상이나 신대의 신을 모신 사당이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통치할 떄 종교와 사상자유를 억압하고 자국의 정책을 감행하기 위한 수단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이것을 반대한 많은 종교인, 우국지사가 참혹한 희생을 당했다. 보통 각 고을의 역사적인 상징물을 헐고 세웠다.

 

 

●우리는 이렇게 강요 당해야만 했다. 당시 공무원 신사참배 광경
태평양전쟁 기간중인39년부터 해방되던45까지 7년동안 일본등에 끌려간 한국인의 숫자는1백37만명.한국 국내에서 강제노동등에 동원된 수는
4백50마.군인.군속.정신대로 연행된 사람이 57만명등 6백만염명이 일제에 의해 동원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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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용산

●안양면 면소재지(운흥리)
고려시대 안양향이있었던 안양면, 안상면과 안하면이 합하여 1914년 안양면이 되었다.

●용산면 일대(어산,어동,접정 등)
부용산 정기를 품어 안은 용산면,1932년 남상면과 남하면을 합하여 남면이라 하다가 1940년 용산면이라 하였다.

 

 

장동/장평

●장동면 면소재지(배산, 북교리)
보성강의 첫 머리터 장동면, 옛 장택현의 동쪽에 위치해 1914년 현재와 같은 구역으로 장동면이 되었다.

 

●장평면 면소재지(용강리)
계수, 계천, 장택으로 이어지는 장평면,1936년 장서와 부평을 합하여 장평면이라 하였다.

 

유치/회진

●유치면 송정리 일대(면소재지)
천하 삼보림의 하나가 위치한 유치면, 고려시대부터 유치향이 있어 그 이름이 이어진다.

 

●회진면 회진리(회진만호가 있던 회진성과 이순신장군이 명량대첩을 준비하였던 곳)
남해의 섬들을 장악했던 수군발진지 회진면,1986년 대덕읍에서 분리되어 회진면이 되었다.

 

 

부산

●부산면 면소재지
지아비 바위가 있다하여 명명된 부산면,1914년 용계면과 부산면을 합하여 부산면이라 하였다.

 

●부산면 호계리 전경(1976년)

 

 

●1981년 1월 관산면

 

●1977년 장동 북교

 

●1984년 대덕시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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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흐르는 세월, 변하는 풍광

  ●1905년도 장흥읍성 동문안 주요시가지. 멀리 장원봉이 감싸고 있으며 지금의 경찰서 자리에는 누대가 보인다.

 

  ●1970년대의 장흥 시가지. 위의 사진과 거의 비슷한 지점에서 촬영했는데 70여년전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사자산과 제암산이 외호하고 있는 1960년대의 장흥읍 시가지 전경, 다리건너 우측 중간부분이 지금은 제일 번화가인 중앙로가

되었지만 당시는 허허벌판이었다.

  ●지금의 장흥시가지.

 

1912년경의 장흥읍 모습, 지금의 칠거리에서 경찰서쪽을 보고 찍은 사진이다.

1936년도 장흥공원을 중심으로 한 주요 시가지 내엔 일본식 건물이 보인다

 

 

●중앙로에서 장흥읍 시가지

 

관산/대덕

 

관산에서 바라본 관산읍

고려말기까지 장흥부의 치소였다가 왜구침입으로 내륙으로 피난했다가 조선개국과 동시에

 

장흥읍으로 옮겨 고읍이라 하다가 1932년 관산이 되었고 1980년 관산읍이 되었다

                    

 

●천관산에서 내려다본 대덕읍 일대

남해의 섬들을 끼어 안고 성장한 대덕.1980년 대덕읍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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