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문화원

강성서원 (江城書院)

   

종 목

문화재자료 제70호

명 칭

강성서원 (江城書院)

분 류

유적건조물/교육문화/교육기관/서원

수량/면적

일곽

지정(등록)일

1984-02-29

시 대

미분류

삼우당 문익점(1329∼1398)과 풍암 문위세(1534∼1600)를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문익점은 고려시대의 문신으로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들여와 우리나라 의생활을 크게 변화시켰다.
문위세는 문익점의 9대손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 때 많은 왜적을 물리쳤다.
원래 문위세를 추모하기 위해 인조 22년(1644)에 월천사를 지었는데, 영조 10년(1734)에 문익점의 위패를 모시면서 그를 중심으로 하고 문위세를 추가로 모시게 되었다. 정조 9년(1785) 임금으로부터 ‘강성’이라는 현판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그 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가 1905년에 강당을 중수하고, 1929년에 사당인 숭덕사를 다시 세웠다.
감성서원에는 숭덕사를 비롯해 배우는 공간인 강당, 내삼문, 외삼문이 있다. 숭덕사는 앞면 3칸·옆면 1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강당은 앞면 5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숭덕사 안쪽 중앙에 문익점의 위패가 있고 왼쪽에는 문위세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으며, 해마다 9월 9일에 제사를 지낸다.

자료출처: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31,00700000,36&pageNo=5_2_1_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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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자료 제69호

영석재 (永錫齋)

종 목 문화재자료 제69호
명 칭 영석재 (永錫齋)
분 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사우
수량/면적 일곽
지정(등록)일 1984-02-29
시 대 미분류

청강 이승(1556∼1628)을 추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건물로, 약 300여년 전 인천 이씨 후손들이 주체가 되어 지금 있는 자리에 세운 것으로 전한다.
건물은 강당, 사당, 내삼문, 문간채, 관리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석재’라고 부르는 강당은 중앙에 있으며 사당은 별도로 담에 둘러싸여 있다. 강당 앞쪽으로 문간채가 있고 관리사와 창고는 오른쪽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강당은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12년 새로 지은 것이다. 이승 선생을 중심으로 9인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은 1962년 세운 것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1칸 반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자료출처: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31,00690000,36&pageNo=5_2_1_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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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민속문화재 제46호

장흥 방촌리 근암고택 (長興 傍村里 勤庵古宅)

분 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수량/면적 887㎡
지정(등록)일 2010.08.27
소 재 지 관산읍 방촌리(내동마을) 504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관리자(관리단체)

장흥 방촌리는 선사시대 유적이 다수 분포해 있고 백제시대 이래 고려시대까지 정안현-장흥부-회주목으로 이어지는 고을이 있던 지역이다. 고려시대 말기에 왜구로 인해 치소를 옮긴 뒤, 고읍으로 불리게 되며 임진왜란이 지난 뒤 장흥위씨가 입향하여 집성촌을 이룬다. 전통 반가는 물론 사당과 서재를 갖추고 있고 존재 위백규 등 학자들이 활동하여 문집, 고문서, 전적류와 민속문화재가 잘 남아 있다.
이러한 역사 전통을 가진 방촌리의 입향 선조가 초기에 정착한 현 근암고택의 터는 역사공간으로서도 의미가 있고, 1905년에서 1907년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확인되어 방촌에 소재한 현존 가옥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점에서도 역사적 가치가 있다. 방촌마을의 독특한 경관 속에 자리 잡은 이 주택은 조선후기 혹은 근대 초기의 이 지역 주택 유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2고주 5량가의 구조를 갖춘 반가 건물로서의 위상도 있다.

 

자료출처: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5_2_1_0&culPageNo=1&searchCondition=%EA%B7%BC%EC%95%94%EA%B3%A0%ED%83%9D&region=1&s_kdcd=00&s_ctcd=00&ccbaCncl=2&ccbaKdcd=24&ccbaAsno=00460000&ccbaCtcd=36&ccbaCpno=2443600460000&ccbaPcd1=99&returnUrl=%2Fheri%2Fcul%2FculSelectViewList.do

https://hanok21c.blog.me/221101600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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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호계리별신제와동계문서 (長興 虎溪里 別神祭와 洞契文書)

분 류 기록유산/문서류/문서류/문서류
수량/면적 동계문서 등 18건, 별신제
지정(등록)일 2008.04.11
소 재 지 전남 장흥군
시 대
소유자(소유단체)
관리자(관리단체)

호계리에서 전승되어 온 마을 공동체 의례와 별신제 관련 기록물이다. 조선시대 후기(별신제 1702년 무렵, 대동계[동계] 1715년)부터 전해오는 동계안, 집강록, 제관록, 홀기, 풍물 부의책 등 관련 문적 17책과 상서 2건, 절목 1건 등으로 구성되어 있어, 동계 창설 및 운영 등 마을사의 변천과 공동체 제의인 별신제의 운영에 관하여 자세히 알 수 있다. 특히 동계문서는 조선시대 후기부터 현재까지도 매년 기록하고 있어 살아 있는 역사자료이며 마을공동체 의례의 연혁과 변천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별신제는 호계리 지역에서 해마다 행하는 마을제사이다. 전라남도 지역의 당산제와는 달리 제의()를 유교식으로 진행하는데 제차, 제물, 제관 등이 <국조오례의>의 길례에서 볼 수 있는 관제()의 형식을 그대로 보여주어 관제가 민간화 되어가는 양상을 알 수 있다. 호계리에서는 별신제와 당산제를 병행해왔으나 당산제는 폐지되었고 별신제는 1700년대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남도문화제 등을 통하여 민속예술성을 인정받았으며 조사보고서와 논문 등이 작성되어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정리되었다.
2008년 4월 11일 전라남도 민속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되었으며 장흥호계리별신제보존회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다.

 

 

자료출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336310&cid=40942&categoryId=39201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5_2_1_0&culPageNo=1&searchCondition=%EB%B3%84%EC%8B%A0%EC%A0%    9C&region=1&s_kdcd=00&s_ctcd=00&ccbaCncl=2&ccbaKdcd=24&ccbaAsno=00430000&ccbaCtcd=36&ccbaCpno=2443600430000&ccbaPcd1=99&returnUrl=%2Fheri%2Fcul%2FculSelectViewList.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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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위성탁가옥 (長興魏聖卓家屋)

종 목

시도민속문화재 제7호

명 칭

장흥위성탁가옥 (長興魏聖卓家屋)

분 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수량/면적

일곽

지정(등록)일

1986-02-07

시 대

미분류

위계환 가옥(중요민속자료 제161호)과 위성룡 가옥(전라남도민속자료 제6호) 맞은 편 마을에 자리잡고 있는 집이다. 안채와 사랑채는 1910년대에 지은 것으로 보이며 나머지 건물들은 후대에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바깥마당에 연못을 파 정원시설을 꾸미고 있는 이 집은 안채, 사랑채, 곳간채, 아래채, 사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안쪽에 안채가 있고 사랑채는 안마당 사이로 축을 맞추어 배치하였다. 안채로 통하는 대문을 사랑채의 한 문을 이용해 좌우로 2번 꺾어 들어가 안마당에 이르도록 꾸민 점이 특이하다. 안마당 남서쪽에 곳간채, 동쪽에 아래채가 있다.
안채는 一자형 평면을 가지고 있으며 왼쪽부터 방·대청·방·부엌과 부엌방으로 구성되어 있고 사랑채 역시 一자형 평면으로 누마루, 방, 대문, 광을 두었다. 지붕은 모두 옆면에서 볼 때 지붕선이 여덟 팔(八)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대체로 전통 민가 건축 형식을 잘 갖추고 있는 집이다.

 

자료출처: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24,00070000,36&pageNo=5_2_1_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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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위성룡가옥[]

지정종목 시도민속문화재
지정번호 전라남도 민속문화재 제6호
지정일 1986년 02월 07일
시대 대한제국
종류/분류 가옥
크기 면적 1,455㎡

1986년 2월 7일 전라남도 민속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었다. 면적은 1,455㎡이다. 방촌리 계춘동 마을의 장흥 위계환가옥의 아랫편에 있다. 집앞 솟을대문에 남아 있는 상량문에 ‘숭정기원후오회갑기축 삼월초칠일임자무신시주립십구일 갑자기사시상량(’이라 기록되어 1949년에 건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안채와 사랑채는 그 이전인 20세기 초에 건축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집 앞에는 2그루의 노거수가 있고 뒤의 계단을 오르면 솟을대문이 서향하여 있다. 대문 좌측으로 사랑채가 있으며 안채로 들어가는 입구는 대문에서부터 상당히 많은 계단을 오르도록 하였다. 그리고 입구를 문 없이 담 사이를 비워 놓고 통행하도록 하였다. 안마당 뒤에 안채가 입구와 축을 맞추도록 배치하였다. 안마당 북쪽에는 광채가 세로로 배치되고 안채 남쪽 후면에 단을 달리하여 사당을 두었다.
사랑채 후면과 안마당 사이에는 나즈막한 담을 쌓고 계단을 두어 사랑채에서 안마당으로 바로 진입토록 하였다. 사랑채 북쪽에는 조그마한 사각형 연못이 있으며 연못 가운데 섬을 만들어 소나무와 버드나무를 심었다. 구릉지에 축조되었기 때문에 담장과 사랑채, 안채의 지붕면이 위계()가 있으며 정연한 느낌이다. 안채는 자형 6칸 전후툇집이며 겹집이다. 간살이는 북쪽 앞 2칸은 부엌이며 뒤 2칸은 좌우 방이다. 다음이 큰방이고 중앙은 2칸 대청, 맨 끝이 작은방이며 우퇴가 시설되어 있다. 구조는 2고주 5량으로 납도리에 장여를 받쳤다. 대공은 판대공인데 둥글게 어깨를 굴렸다. 주춧돌은 화강암 가공석으로 네모꼴이며 그 위에는 사각기둥을 올렸다. 기단은 다듬돌 바른층쌓기 세벌대 높이이며 장대석 마감을 하였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사랑채는 4칸 전후툇집으로 간살이는 북쪽에서부터 앞칸은 방이고 뒤칸은 헛간으로 되어 있다. 다음 2칸의 앞칸에는 크게 방을 두고 뒷칸에도 좌우로 방을 두었다. 맨 끝칸은 대청이며 각 툇간에는 창고방이 만들어져 있다. 사랑채 전면에 햇볕을 막는 시설이 있으며 북쪽에는 누마루를 시설하였다. 구조는 2고주 5량으로 기둥에 창방을 돌리고 보아지를 끼웠으며 그 위에 주두를 놓았다. 도리의 모서리는 면으로 접고 장여를 받쳤다. 보이는 곳만 원형기둥이고 나머지는 사각기둥이며 낮은 덤벙주춧돌을 놓았다. 사당은 안채 오른쪽 뒤편 높은 곳에 별도로 두었고 주변의 숲이 우거져 자연의 정취가 느껴지는 가옥이다

 

자료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장흥 위성룡가옥 [長興魏聖龍家屋]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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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 기념물 제 238호

장흥신북구석기유적 (長興 新北 舊石器遺蹟)

분 류 유적건조물/유물산포지유적산포지/육상유물산포지/선사유물
수량/면적 일원70,586㎡(34필지)
지정(등록)일 2008.04.11
소 재 지 장동면 북교리 신북마을 일원(9-19번지 외)
시 대 석기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관리자(관리단체)

장흥 신북 구석기유적은 장흥군 장동면 북교리 신북마을이 자리한 검은둥이 언덕(해발 190~165m)의 남쪽에 있다. 신북유적의 규모는 유물이 확인된 범위를 기준하면 약 12만여㎡으로 추산되고, 유물이 들어있는 지층의 분포 범위로 보면 신북마을을 포함한 언덕 전체가 해당되어 약 30여만㎡으로 추정된다. 2002년 8월에 국도2호선 장흥-장동간 도로 확포장 구간도로 건설 구간의 교량 터파기 공사 때 문화층이 드러나면서 발견되어 2003년-2004년 사이 7개월간의 발굴조사(조사기관 : 조선대학교 박물관, 조사 면적18,000여㎡) 결과 3만여 점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그래서 2004년 5월 11일 지역 주민들을 중심으로 “장흥 신북구석기유적 보존회”가 결성되었고, 2004년 6월 22~24일 “동북아시아의 후기구석기문화와 장흥 신북유적”이란 제목으로 국내외 저명한 구석기학자들이 참여한 국제학술회의가 개최된 바 있다.
장흥 신북유적은 한국에서 보고된 후기 구석기시대 유적 가운데 가장 크고 유물의 밀집도도 높다. 그리고 신북유적을 중심으로 반경 12㎞ 범위에 20여개의 구석기유적들이 유적군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 신북유적은 거점 유적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화덕자리가 6개 이상 드러났고, 대표되는 뗀석기로는 좀돌날(세형돌날)몸돌, 새기개, 밀개, 슴베찌르개, 창끝찌르개 등이 있으며, 유적의 중심 연대는 22,000년 전(방사성탄소연대)으로 재어져 후기구석기 후반의 석기발달상을 잘 보여주는 유적이다.
특히 국부 마제석부를 포함한 새로운 종류의 간석기들이 소량이지만 대부분 문화층의 중간과 아래에서 드러나서, 이제까지 ‘타제기법은 구석기시대’, 그리고 ‘마제기법은 신석기시대’라는 고정 관념을 재검토해야할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국부마제석부는 일본열도에서 약 35,000년 전에 나온 예가 많아 구석기시대에 마제석기의 출현 가능성은 충분하다.
한편 이 유적 흑요석의 성분분석(PIXE) 결과 그 원산지가 백두산과 일본(큐슈 등)으로 추정되었다. 이 점은 유베쯔기법의 좀돌날몸돌, 슴베찌르개와 함께 신북유적의 후기구석기인들이 일본열도와 교류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라고 생각된다.
이처럼 장흥 신북유적은 후기구석기시대의 생활상과 문화상을 잘 보여줄 뿐 아니라, 우리나라 후기구석기유적 중 가장 크고 유물의 밀집도도 높은 유적이다. 그리고 일본, 중국, 시베리아 등을 비롯한 동북아시아 후기구석기문화와의 연관성을 풀 수 있는 귀중한 유적으로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아주 크다고 하겠다.

자료출처: https://blog.naver.com/brucelee55/221054387845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23,02380000,36&pageNo=5_2_1_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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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풍길리청자요지 (長興豊吉里靑瓷窯址)

종 목 시도기념물 제221호
명 칭 장흥풍길리청자요지 (長興豊吉里靑瓷窯址)
분 류 유적건조물/산업생산/요업/도자기가마
수량/면적 일원(2필지, 3,000㎡)
지정(등록)일 2004-02-13
시 대 고려시대

고려시대 초기 청자 가마터로 지정구역 면적은 3,000㎡이다. 마을 뒤 두암저수지 주변, ‘도둑골’이라고 부르는 남동향의 급경사지로, 저수지 상류로 가는 농로를 따라 약 500m 가면 있다. 가마 방향은 남-북으로 추정된다. 퇴적층은 일부만 확인되는데 갑발() 등 요도구()와 청자 일부가 발견되었다.
요도구는 가마에서 번조() 때 사용하던 원통형 갑발과 ㅠ자형 갑발 받침 등이 발견되었다. 갑발은 크기가 다양하며 형태는 원통형인데, 윗면 중심부가 낮은 M자 형이다. 청자는 조각으로 발견된 것이 대부분이며 그릇의 형태를 알 수 있는 것은 소수이다. 그릇의 종류는 햇무리굽완, 대접, 접시, 병, 항을 비롯하여 흑유와 도기도 소량 출토되어 초기 청자요지의 특징을 보인다.
요도구와 만들어진 그릇 종류, 입지 조건 등이 자기 발생기의 특징을 잘 갖추고 있으며, 유적의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여 학술적인 가치가 크다. 2004년 2월 13일 전라남도기념물 제221호로 지정되었으며, 장흥군에서 관리하고 있다.

 

자료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장흥 풍길리 청자요지 [長興豊吉里靑瓷窯址] (두산백과)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23,02210000,36&pageNo=5_2_1_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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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장흥교당 (天道敎長興敎堂)

종 목

시도기념물 제218호

명 칭

천도교장흥교당 (天道敎長興敎堂)

분 류

유적건조물/종교신앙/민족종교/천도교

수량/면적

1동

지정(등록)일

2003-05-27

시 대

일제강점기

장흥 천도교당은 원래 1906년 4월에 동학의 후예인 교구장 강봉수(姜琫秀) 등이 중심이 되어 천도교인에게 모금운동을 전개하여 지어졌다. 천도교장흥군교구역사〉와 교당 내부에 걸린 〈교구실기(敎區室記〉(1920년)를 통하여 당시 개축에는 전남의사원(全南議事員) 신명희(申明熙), 장흥교구장 김재계, 수령 강봉수, 윤세현 등이 주도하였다는 것과 1917년(포덕오십육년정사(布德五十六年丁巳) 11월부터 한달여에 걸쳐 2,300원(圓)을 모금하여 1918년 2월 15일에 건축을 시작하여 6개월만인 8월 26일 준공한것 그리고 건축 실비가 1,600원이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금에 참여한 연조인(捐助人) 169인, 목역인(木役人) 104인, 토역인(土役人) 34명으로 명단이 확인되었다. 토역인은 기숙소(寄宿所) 건립을 주로 하였다. 이처럼 1906년과 1918년의 건립에 발기인과 연조인, 목역인, 토역인까지 기록되고 건축 금액이나 건립 기간까지 알 수 있어 중요하다.
장흥지방에 동학(1905년 천도교로 개칭)이 포교된 연대는 대략 1891년 경이었는데 이인환, 이방언, 문남택 등이 동학에 입문하게 되었다.
천도교당 건물로서 남아 있는 흔하지 않은 건축물이라는 점, 삼일운동 등 항일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들과 연계되는 공간구조로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리고 구조 양식에 있어서 전통 한옥이 개화기의 여러 문화가 변용되면서 공적 근대화 과정을 표상하는 등 근대 이행기의 공공기관의 건물의 변모과정을 알 수 있다는 점 등에서 역사적, 학술적, 향토문화사적 가치가 있다.

 

자료출처: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23,02180000,36&pageNo=5_2_1_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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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기념물 제 134호

장흥방촌리지석묘군 (長興傍村里支石墓群)

분 류 유적건조물/무덤/무덤/지석묘
수량/면적 일원(90여기)
지정(등록)일 1990.12.05
소 재 지 전남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 588-1번지
시 대
소유자(소유단체)
관리자(관리단체) 장흥군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 놓은 탁자식과, 땅 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전라남도 지방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 곳으로 지금까지 2만기 이상이 알려져 있다. 전라남도 장흥군에서도 210여 군데 2250여 기가 확인되었는데, 이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방촌리 고인돌이다. 관산읍 방촌리의 내동 마을 입구 부근 ‘벅수골’이라 부르는 소나무 숲 속에 94기의 고인돌이 남북으로 타원형의 무리를 이루고 있다.
수량은 많으나 고인돌의 규모는 크지 않으며, 대부분 숲 속에 만들어진 관계로 보존이 잘 되어 있는 편이다. 주변에서 민무늬토기와 돌화살촉 등이 발견되었다.

 

자료출처: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region=1&searchCondition=%EC%9E%A5%ED%9D%A5%EB%B0%A9%EC%B4%8C%EB%A6%AC%EC%A7%80%EC%84%9D%EB%AC%98%EA%B5%B0&searchCondition2=&s_kdcd=00&s_ctcd=00&ccbaKdcd=23&ccbaAsno=01340000&ccbaCtcd=36&ccbaCpno=2333601340000&ccbaCndt=&stCcbaAsno=&endCcbaAsno=&stCcbaAsdt=&endCcbaAsdt=&ccbaPcd1=99&culPageNo=1&chGubun=&header=view&returnUrl=%2Fheri%2Fcul%2FculSelectViewList.do&sCond=%EC%9E%A5%ED%9D%A5%EB%B0%A9%EC%B4%8C%EB%A6%AC%EC%A7%80%EC%84%9D%EB%AC%98%EA%B5%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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