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문화원

장흥고문집(DB)/■운암집(雲巖集) +1
운암 정두흠(雲巖 鄭斗欽) 선생(1)

예강칼럼(17)/박형상/변호사

승인 2018.05.04  11:58:22


운암 정두흠(1832~1910), 진주 鄭씨, 자 ‘응칠’로 유치 운월리 출신이다.

젊은 날에 능주 ‘개천사’ 등에서 공부하였고, 장흥부사 ‘김기석’의 눈에 띄었다. 16세에 남주독보(南州獨步)로 칭송받았으나, 1879년(48세)에 문과(을과7위)급제하였고, 1887년에 사헌부 지평, 종묘대제 대축관 등을 지냈다. 1892년(61세)에 ‘乞해골’로 사직을 구하고, ’歸田辭(귀전사)’와 더불어 은퇴하였다.

고향 운월리에 ‘망화대(望華臺), 망화정’을 세우고, 한양 조정과 나라를 걱정하며 인근에서 모인 제자들을 가르쳤다. 아마 운암(雲巖)선생이 역대 장흥출신들 중 중앙무대에 가장 접근하신 것으로 여겨진다.

<운암집>에 당대 명망가,판서,고관이 등장한다. ‘민영환’ 산정(山亭)에서 시회를 했다. ‘화서 이항로(1792~1868),조성하(1845~1881).이건창(1852~1898)’ 등과 종유 또는 교류하였다, 그 무렵 장흥부사 ‘이학래,이용태,박헌양’도 나온다. 몇 장흥출신 선비들과의 교류사정, 만시(挽詩)도 <운암집>에 등장한다. 그는 기울어가는 나라를 지켜보면서 “上만언소,請罷매관소,請엄방헌소” 등으로 그 나름 폐정개혁을 주장했고, 우국창의 비탄詩도 여럿 남겼다. <雲巖集>에는 6忠 만시(挽詩)가 실려 있다. 국난수습에 애쓰다 돌아가시거나, 을사조약 울분으로 자결한 선현들,‘신헌(1810~1884),조병세(1827~1905),민영환(1861~1905),송연재(1836~1905),홍만식(1842~1905),김봉학(1871~1905)등이다. 매천 황현(梅泉,1855~1910) 역시 ‘민영환.홍만식,조병세,최익현,이건창’을 기리는 ‘오애(五哀)시’를 남겼다.

雲巖은 1906년에 자결한 ‘면암 최익현(1833~1906)’에 대해 “憶면암연재 兩先生”도 남겼다. 雲巖 선생 당신도 결국 1910,10,25에 경술국치 치욕 앞에서 음독 자결하였다. 그 마지막 길에 ‘손명사(損命詞) 2수’를 남겼다, “國破難容 無救罪 莫如身死 逐先賢(국파망국을 용납할 수 없거늘, 罪를 구할 수도 없으니, 先賢 따라 죽는 것보다 나을 일 없네)”라고 하셨다. 그 부인 韓氏도 “國破夫死인데, 吾何獨生하리요”라면서 같은 방법으로 뒤따랐다.

雲巖의 ‘손명사(損命詞)’는 梅泉의 ‘絶命詩 4수’에 대비될 수 있다. 雲巖 선생은 문과급제자 國祿之臣으로 ‘제도권 관료’인 반면에, 梅泉 선생은 사마시에 그친 ‘초야 선비’라는 차이점이 있기에, 서로 지향점이 달랐던 것 같다. 雲巖은 군왕 측신으로서 忠君 輔國에, 梅泉은 지식인으로서 識者 仁義에 가치를 더 두었다. 어쨌거나 梅泉의 직설 필치와 <매천야록>의 명성을 감안하더라도 雲巖 선생과 손명사(損命詞)는 세간에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심지어 <장흥 마을유래지>는 운월리 인물로 “조선 중기 장원급제자 鄭호암”이라고 터무니없게 오기했을 정도다. 유치 운월리가 장흥읍에서도 워낙 멀리 떨어진 산촌이었고, 그 직손들이 고향을 떠났기 때문이겠다. 안타까운 일은 또 있다.

1905년,1910년 순신(殉身)자에 대해 시호추증 또는 사후존숭과 더불어 건국포장 수여 등이 있었지만, 雲巖은 별다른 대접을 받지 못하였다. 마침 장흥정자들에 관한 雲巖의 유문(遺文), ‘題동백정. 題부춘정, 동백정記, 부춘정記’ 등이 <운암집>에 있으니, 다시 살려 걸었으면 한다. 오늘도 장흥 땅에 여러 비석들이 세워지고 있지만, 진정 문림의향(文林義鄕)에 합당한 장흥인물은 ‘운암 정두흠’ 선생이라 생각해본다.


출처: http://www.jh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56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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