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문화원

시도지정 기념물 제 68호

용호정원림 (龍湖亭圓林)

분 류 자연유산/천연기념물/생물과학기념물/생물상
수량/면적 일원
지정(등록)일 1985.02.15
소 재 지 전남 장흥군 부산면 용반리 545번지
시 대
소유자(소유단체)
관리자(관리단체) 낭주최씨종중

용호정은 비가 와 강물이 넘치면 강 건너 부친의 묘에 성묘를 하지 못하고, 바라만 보며 명복을 빌던 아버지 최영택을 위해 최규문이 조선 순조 28년(1828)에 지은 정자로, 최규문의 부친에게는 ‘부친을 바라보는 정자’요, 최규문에게는 ‘부친을 위로하는 정자’라 하였다.
정자는 느티나무 목재로 만든 8개의 원형 기둥을 세우고, 밤나무와 느티나무 목재만을 사용하여 지은 목조 기와집이다. 특히 사방에 놓여있는 마루는 못을 사용하지 않는 특수공법으로 조립되었다. 현재의 정자는 1947년에 고쳐 지은 것으로 원래보다 2칸 더 넓어진 것이라 한다.
깎아세운 듯한 벼랑 위에 세워진 용호정은 숲과 물과 한데 어울려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자료출처: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region=1&searchCondition=%EC%9A%A9%ED%98%B8%EC%A0%95%EC%9B%90%EB%A6%BC&searchCondition2=&s_kdcd=00&s_ctcd=00&ccbaKdcd=23&ccbaAsno=00680000&ccbaCtcd=36&ccbaCpno=2333600680000&ccbaCndt=&stCcbaAsno=&endCcbaAsno=&stCcbaAsdt=&endCcbaAsdt=&ccbaPcd1=99&culPageNo=1&chGubun=&header=view&returnUrl=%2Fheri%2Fcul%2FculSelectViewList.do&sCond=%EC%9A%A9%ED%98%B8%EC%A0%95%EC%9B%90%EB%A6%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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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기념물 제 67호

부춘정원림 (富春亭園林)

 

분 류 자연유산/천연기념물/생물과학기념물/생물상
수량/면적 일원
지정(등록)일 1985.02.15
소 재 지 전남 장흥군 부산면 부춘길 79 (부춘리)
시 대
소유자(소유단체)
관리자(관리단체) 청풍김씨종중

 

부춘정은 임진왜란(1592), 정유재란(1597) 때 혁혁한 공을 세운 문희개 선생이 고향으로 돌아와 선조 31년(1598)에 지은 정자로 원래는 문희개의 호를 따서 ‘청영정’이라 하였으나 후에 부춘정으로 비뀌었다.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2칸의 온돌방과 2칸의 대청을 두고 앞뒤로 반칸의 툇마루를 두었다.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정자가 서 있는 절벽 밑으로 물에 잠긴 바위에는 옥봉 백광훈이 썼다는 ‘용호(龍湖)’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부춘정은 주변 소나무숲과 어울려 조화를 이룸이 매우 아름다워 부춘정원림을 기념물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자료출처: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5_2_1_0&culPageNo=1&searchCondition=%EB%B6%80%EC%B6%98%EC%A0%95%EC%9B%90%EB%A6%BC&region=1&s_kdcd=00&s_ctcd=00&ccbaCncl=2&ccbaKdcd=23&ccbaAsno=00670000&ccbaCtcd=36&ccbaCpno=2333600670000&ccbaPcd1=99&returnUrl=%2Fheri%2Fcul%2FculSelectViewList.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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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수인산성 (長興修仁山城)

종 목 시도기념물 제59호
명 칭 장흥수인산성 (長興修仁山城)
분 류 유적건조물/정치국방/성/성곽
수량/면적 일원
지정(등록)일 1982-10-15
시 대 미분류

전라남도 장흥군과 강진군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해발 561m의 수인산 산마루를 이어 돌로 쌓아 만든 산성이다.
성벽은 직사각형으로 다듬은 돌을 이용하여 이물려쌓기(돌의 단을 조금씩 들여 넣으면서 쌓는 일)를 하였는데, 총 연장 길이 6㎞, 높이 약 5m, 너비 4m로 남문, 북문, 동문이 있다.
성의 동쪽부분은 2중으로 성벽을 쌓았는데, 이러한 방식은 백제 때 나타나는 수법으로 미루어 백제의 성으로 추정된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말에 도강·탐진·보성·장흥·영암지역 백성들이 이곳에 들어와 왜구를 피했으며, 조선 태종(재위 1440∼1418) 때에 성을 고쳐 쌓았다고 한다.
지금 성 안에는 봉화를 올리던 봉수대, 수인사, 창고터 건물 흔적이 남아있다. 또한 성벽 안의 물이 흘러 나가게 만든 수구(水口)의 형태가 남아 있는데, 성벽 중간을 통하는 형식이어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에 있는 옛 산성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자료출처: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23,00590000,36&pageNo=5_2_1_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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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이조백자도요지[]

유형

유적

성격

도요지

건립시기·연도

조선시대

소재지

전라남도 장흥군 용산면 월송리

문화재 지정번호

전라남도 시도기념물 제30호

문화재 지정일

1977년 10월 20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30호. 월송리 재홍마을의 동쪽 골짜기를 ‘사그점골’이라 하는데, 백자요지는 이 골짜기에 있는 월송저수지 동쪽 500m 지점에 위치한다.현재 완만한 자연 경사면에 약 100여m의 간격을 두고 2기의 가마가 노출되어 있다. 가마는 정남향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2기 모두 여러 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칸가마이다.두 가마 모두 노출된 상황으로 보아 4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가마 끝의 격벽( : 칸을 막은 벽)의 상황으로 보아 5칸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가마는 봉통 부분쪽인 1실이 가장 좁고 위로 오를수록 점차 넓어지는데, 저수지와 보다 멀리 떨어진 2호가마의 경우 1실의 너비가 가로 260㎝, 세로 120㎝인 반면, 4실은 가로 420㎝, 세로 260㎝이다. 각 실의 천장은 궁륭형()이며 가마바닥은 경사져 있다.각 실을 나누는 칸벽의 두께는 25㎝∼30㎝ 정도이며 칸벽 아래에 불창 구멍을 냈다. 불창 수는 각 실의 크기에 따라 그 수도 많아져 1실과 2실의 사이는 11개이지만, 3실과 4실과의 사이는 14개 또는 18개나 된다.각 실의 천장 또한 위로 오를수록 높아져 남아 있는 1실의 높이가 약 80㎝, 3실은 180㎝이다. 현존 가마의 길이는 약 8.5m이며 봉통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흙덩어리를 이용하여 가마를 축조하였으며 안쪽벽에는 백토가 발라져 있다.이곳에서 출토된 백자는 발·대접·접시·보시기 등과 같은 일상생활용의 식기류이며, 제기도 함께 제작되었다. 유태()는 회색을 띠는 것이 많고 청색이 감도는 회색 또는 짙은 회색도 있다. 기벽()이 두껍고 선이 단조로워 전체적으로 둔중한 느낌을 주는데 이러한 점은 조선시대 말에서 근대에 이르는 지방백자의 공통적인 특징이다.구연()은 직립되거나 안으로 굽었으며, 기벽의 선은 사선이나 수직으로 경직되고 그릇의 밑이 넓다. 굽은 내경()된 다리굽이며 굽 안 중심이 모두 볼록하게 돌출되었다. 굽은 단정하게 깎였으며 접시 등과 같은 작은 그릇은 크기에 비하여 굽지름이 매우 넓다.모든 그릇들은 가마 안에서 포개구이되었는데 그릇들이 높은 열에서 서로 붙지 않도록 그릇 사이의 받침을 두었다. 받침으로는 흙모래빚음이 이용되었으며, 그 수가 매우 많아 안바닥과 굽 접지면에 둥글게 그 흔적이 남아 있다.가마의 운영 시기는 이곳에서 생산된 백자의 양식으로 보아 19세기에 들어와 개요()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가마가 폐쇄된 시기는 이 마을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1900년대 초로 여겨진다.

 

자료출처:[네이버 지식백과] 장흥이조백자도요지 [長興李朝白磁陶窯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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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 유형문화재 제 304호]

장흥 신흥사 소장 정방사명 동종 (長興 新興寺 所藏 井方寺銘 銅鐘)

  

분 류 유물/불교공예/의식법구/의식법구
수량/면적 1구
지정(등록)일 2009.12.31
소 재 지 장흥읍 연산리 89-8번지 신흥사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장흥 신흥사에 소장된 “海南 井方寺銘 銅鐘”은 조선후기[1751년, 영조 27년, 乾隆十六年 辛未 五月日]에 제작되었지만 고려시대 걸작인 탑산사종(보물 88호, 1233년 추정)과 상당한 친연성이 느껴진다.
신흥사 동종은 고려 종에 비해 구경이 넓고 상대와 유곽사이에 범자문이 있으며 유곽사이에 보살입상이 있고 단아한 몸체와 정교한 문양, 그리고 아름다운 용뉴의 표현은 조선종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좋은 작품이다.
종을 제작한 도편수 윤취오(尹就五)와 수재(手才) 장흥(長興) 윤광형(尹光衡)은 사장(私匠)계열의 주종장으로서 17-18세기에 여러 종을 만들었던 집안의 장인으로 보인다. 이들은 장흥 장평면과 장동면 지역에서 거주하면서 17세기부터 18세기까지 윤씨 집안에서 사승(師承)관계를 이어가면서 꾸준히 주조물을 조성하여 수준 높은 동종과 금고 등을 생산한 집단이다.
따라서 장흥 신흥사 종은 작품으로서의 가치 이외에도 주조의 절대연대와 관련 인물과 장소도 도 알 수 있고 종장의 연구 등 한국 금속공예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됨으로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할만한 가치를 지닌다.

 

자료출처: https://blog.naver.com/mallarmel/10120467232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21,03040000,36&pageNo=5_2_1_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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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연곡서원노봉선생문집목판 (長興淵谷書院老峯先生文集木板)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218호
명 칭 장흥연곡서원노봉선생문집목판 (長興淵谷書院老峯先生文集木板)
분 류 기록유산/전적류/목판본/사간본
수량/면적 298판
지정(등록)일 1999-07-05
시 대 미분류

조선 숙종 때의 문신이자 학자인 노봉 민정중(1628∼1692)의 시문집을 새긴 목판이다. 정조 8년(1784)에 판을 새겼으며, 298매가 남아 있다.
민정중은 송시열의 문인으로, 효종 즉위년(1649)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 예조좌랑, 홍문관수찬와 각 도의 암행어사의 벼슬을 지냈다. 그후 성균관대사성, 이조참판, 우의정, 좌의정 등을 지내고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노론의 여러 사람들과 함께 벼슬을 빼앗기고 벽동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위패가 여러 서원에 모셔졌으며, 시호는 ‘문충’이다.
없어진 목판이 몇 개 있으나 연대가 앞서고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그 가치가 있다. 현재 전남 장흥의 연곡서원에 소장되어 있다.

 

자료출처: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21,02180000,36&pageNo=5_2_1_0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457625&cid=46669&categoryId=46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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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지정 유형문화재 제 18호

장흥연곡서원 (長興淵谷書院)

분 류 유적건조물/교육문화/교육기관/서원
수량/면적 일원
지정(등록)일 1974.12.26
소 재 지 전남 장흥군 장흥읍 연곡길 31 (원도리)
시 대
소유자(소유단체)
관리자(관리단체) 연곡서원

노봉 민정중(1628∼1692)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민정중은 조선 후기 문신으로 호조·공조판서 등 여러 벼슬을 거쳐 우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한 분이다. 숙종 원년(1675) 당쟁으로 장흥에 유배되었을 때 이 지방 선비들을 가르쳤는데 지금 있는 서원 자리에서 강회를 열었다고 전한다.
장흥 연곡서원은 숙종 24년(1698)에 세웠으며 숙종 42년(1716) 민정중의 동생인 민유중을 추가로 모셨다. 영조 2년(1726)에 나라에서 인정한 사액서원으로 ‘연곡’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에 폐쇄되었다가 그 뒤 점차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연곡마을 뒷산 경사지에 있는 이 서원은 앞쪽에 교육 공간을 마련하고 뒤쪽에 제사 공간을 배치하였다. 교육 공간으로는 강당인 연곡당이 있는데 교육 장소와 유림의 회합장소로 이용하였다. 뒤편의 높은 단 위에 세운 사당은 민정중과 민유중의 위패를 모셔둔 곳이다. 왼쪽으로는 부속 건물을 마련하였는데 관리인의 숙소와 영조의 친필 현판을 보관하고 있는 어필각 등이 있다. 해마다 3월에 제사를 지낸다.

 

자료출처: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23,00180000,36&pageNo=5_2_1_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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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흥구룡리마애여래좌상 (長興九龍里磨崖如來坐像)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193호
명 칭 장흥구룡리마애여래좌상 (長興九龍里磨崖如來坐像)
분 류 유물/불교조각/석조/불상
수량/면적 일원(1,000㎡)
지정(등록)일 1998-02-05
시 대 고려시대

 

전라남도 장흥군 부산면 구룡리 자미 마을 뒤편 높이 20m가량 되는 병풍 바위에 새긴 마애불이다. 지상에서 약 6m 높이에 선으로 새겨 표현하였는데, 바위면이 평평하지 않아 전체 윤곽을 파악하기 힘들다.
민머리의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높이 솟아 있고, 얼굴에는 콧등만이 유난히 돌출되어 있어 인상적이다. 옷은 양 어깨에 걸치고 있는데 무릎 밑으로 옷주름이 흘러 내려와 있다. 아랫부분으로 내려오면서 마모가 심해 정확한 윤곽을 알 수 없다. 오른손은 손등을 보이며 손끝이 땅을 향하게 하고 있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한 채 무릎 위에 얹혀 있다.
이 마애불은 고려시대의 원감국사 충지(1226∼1292)를 새긴 것으로 전해진다. 충지는 바로 이 고장 출신으로 과거에 급제한 후 출가하였으며, 당시 일본과 원나라를 다녀온 적도 있다.『원감국사집』에 의하면 장흥군 부산면 구룡리에 국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바위면에 국사의 상을 조각했다 한다. 충지가 입적한 후 그를 따르는 문하생들이 국사를 숭상하는 마음에서 조각하였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충지와 관련된 내용과 더불어 조각 기법이 형식적인 점으로 보아 고려 후기인 13세기경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자료출처: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21,01930000,36&pageNo=5_2_1_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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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흥전의상암지석불입상 (長興傳義湘庵址石佛立像)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191호
명 칭 장흥전의상암지석불입상 (長興傳義湘庵址石佛立像)
분 류 유물/불교조각/석조/불상
수량/면적 1구
지정(등록)일 1998-02-05
시 대 통일신라시대
 

원래 전라남도 장흥읍 제암산 중턱에 있는 의상암 절터에 있던 것인데, 1994년부터 보림사로 옮겨 모시고 있다. 몸 뒤의 광배(光背)와 목 부분에 약간의 파손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양호한 편이다.
민머리 위에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높게 표현되었고 얼굴은 계란형이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가슴 위까지 U자형 주름을 이루고 있다. 양 팔에 걸쳐진 옷자락은 물결 모양의 주름을 만들면서 무릎까지 길게 드리워졌다.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를 맞대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아마타여래를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원만한 얼굴, 높은 머리묶음, 상체의 옷주름 등으로 보아 9세기 후반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자료출처: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5_2_1_0&ccbaCpno=21136019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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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계사유물일괄 (盤谿祠遺物一括)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164호
명 칭 반계사유물일괄 (盤谿祠遺物一括)
분 류 유물
수량/면적 5종 8점
지정(등록)일 1988-12-21
시 대 미분류

반계사에 모셔진 조선 선조 때의 정경달(1542∼1602)과 관련된 자료들이다.
반계사는 숙종 40년(1714)에 영광 정씨 문중이 중심이 되어 건립한 것으로,영광 정씨의 정인걸, 정경달, 정명설, 정남일 네 사람과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큰 공을 세운 이순신, 임영립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건물이다. 고종 5년(1868) 훼손 되었던 것을 1957년 지금의 자리에 강당을 새로 짓고, 1959년에 탑을 세워 사우로서의 기능을 대신케 하였다.
유물과 유품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반곡의『난중일기』는 정경달이 임진왜란 초에 참전했던 일기와 명군접반사로 재직할 당시의 일기로, 제 2의 `난중일기´로 평가되고 있다. 필사본『반곡일기』하권 1책과『반곡년기』1책이 여기에 해당한다. 본래 정경달의『난중일기』는 2책이었으나 선조 31년(1598)부터 1602년까지의 내용만이 현재 남아있다. 이를 순조 15년(1815) 정약용이『반곡집』에 수록하였다.
진법은 옛 책의 필사본으로 채색된 진법도가 함께 들어 있다. 군영, 군률, 진법이 그림으로 수록되어 있어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군의 전략, 전술을 살피는데 도움이 된다.
광군공신계회도는 구전으로 궁궐도라 불려져 왔던 계회도인데 비단 바탕에 채색하였으며, 상태가 심하게 훼손되었다. 이 공신계회도는 선조 24년(1591)의 것으로 윗쪽 반면에 어전 건물 및 참여 인물도가 있고 하단에는 공신 14명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흉배는 2매로 정경달의 관복유품이며, 학배이다.
공신녹권은 공이 있는 신하에게 나라에서 공신으로 임명하여 내리는 인정서로, 「광국원종공신록권」은 1591년에 발행된 것으로 1책이며, 「선무원종공신록권」은 1603년에 발행되었으며, 1책이다.
그 외에 1760년의 「호남갑자막의록」과 「불갑사간」1책, 교지 등 다수의 고문서 자료가 있다.

 

자료출처: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21,01640000,36&pageNo=5_2_1_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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