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문화소식] "마하수는 명량대첩 장흥 해상의병의 주역이었다"
10월 4일, ‘이순신 회령포 축제’서 마하수 학술 심포지엄 개최
“회령포 없었으면 조선 명운을 건져 올린 명량대첩도 없었다”
제장명‧김강식‧노승석‧조인희‧최인선등 이순신 전문가들 총집결
‘마하수(馬河秀) 오부자’를 주제로 열린 학술심포지엄에서 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마하수 의병장은 정유년 장흥해상 의병의 주역이었다”고 논증했다.
10월 4일, 오후 1시부터 오후 4시까지 3시간 동안 회진종합복지관 2층에서 열린 ‘마하수(馬河秀) 오부자의 명량해전 참전 의의’를 주제로 개최된 학술심포지엄은 제장명‧김강식‧노승석‧김태만‧최인선 등 국내 이충무공 연구 전문가들이 총집결한 가운데 개최됐다.
김성 군수, 마상빈 이사장 - 마하수는 영웅이었다. 마하수 정신, ‘통일 시작의 땅, 장흥’으로 이어져
이날 김성 장흥 군수는 축사에서 “장흥 회령포는 명량해전 승리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라고 전재하고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 장군은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수임 된 후 회령포로 끌고 온 12척의 판옥선으로 전열을 다시 정비했고, 이때 장흥 회령포 주민들은 결사적인 노역과 지원으로 조선 수군의 재건을 도왔다”고 강조했다. 이어 김 군수는 “결사항전의 명량대첩에서 활약한 영웅이 바로 장흥의 마하수였다. 그는 60세 고령에도 불구하고 아들 넷과 함께 전장에 몸을 던졌다. 위급한 상황에 처함 충무공을 구하기 위해 왜선을 향해 돌진해 싸우다 장렬히 순절했다. 혼돈의 그 전투 현장에서 마하수 공은 자신의 장수를 지키고 나라를 구하겠다는 ‘마하수 정신’, 곧 ‘영웅 마하수 정신’을 만든 것이다. 이는 오늘날 ‘의향 장흥’을 있게 한 위대한 정신이었다.”고 회고하고 “의향 장흥’의 깊은 뿌리는 석대들 동학농민혁명운동과 안중근 의사를 기린 해동사로 이어졌다. 동학농민혁명운동의 최후의 격전지 석대들은 충(忠)을 지향하는 관군과 의(義)를 가치로 삼은 농민군의 전투가 벌어진 곳이었다. 또 이러한 장흥의향의 정신은 한국 독립의 위대한 영웅 안중근 의사의 위패와 영정을 전국에서 유일하게 모신 해동사의 정신으로 이어졌고, 이러한 장흥의 나라사랑 정신은 ‘통일 시작의 땅, 장흥’으로 그 가치와 폭을 넓혀가고 있다.”고 강조했다.
장흥의병장마하수기념사업회 마상빈 이사장은 기념사에서 “마하수 의병장은 명량해전의 현장에 아들 넷을 대동한 채 100여 척의 후원세력과 함께 포진해 있다가 이충무공이 왜선으로 포위되며 아주 위급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그 100여 척의 후원세력 중 유일하게 홀홀단선으로, 왜선들을 행해 돌진하여 왜군과 싸우다 정렬히 순절하였던 조선의 영웅이엇다.”고 회고하고 “마하수 의병장의 그 결행은, 당신의 목숨은 물론 네 아들과 향선에 탑승한 수많은 가솔들의 목숨까지도 담보한 대단한 결기요, 빛나는 호국·절의 정신으로 빚어진 결행이었다.”고 강조하며 “회령포와 이충무공을 계기로 촉발된 ‘의병의 고을 장흥’의 그 빛나는 충절과 절의 정신의 전통을 재확인하고, 더불어 위대한 회령포의 역사성과 마하수 의병장 등 명량해전에 참전한 모든 장흥 의병들의 고귀한 호국·절의 정신도 장흥 군민 모두가 기억하고 계승하여, 위대한 회령포의 역사성이 보존‧승화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고 당부했다.
백광철 의원은 축사에서 “제가 군정질의 등으로 누차 반곡 정경달과 함께 마하수 의병장을 장흥의 대표적인 의병으로 조명, 현창되어야 한다고 주창했는데, 오늘 마하수 심포지엄을 개최하게 돼 감개 무량이다.”고 말하고 “오늘을 계기로 마하수 절의‧충절이 길이 장흥인 모두에게 기억되고 삶의 지표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고, 장흥군도 마하수 현창 사업에 적극 후원하는 계기가 이루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날 학술심포지엄은 ▶발제1 : 명량해전과 장흥의병 | 제장명(순천향대 교수‧이순신연구소 소장) / 토론1 ; 김선욱(『조선의 영웅 마하수』 저자) / 토론2 : 정경성(전 전라남도 학예연구관) ▶발제2 : 마하수와 마하수 5부자 | 김강식(국립한국해양대학교 교수‧국제해양문제연구소 소장)/토론1 : 노승석(동국대학교 교수‧『난중일기』완역) / 토론2 : 조인희(한국국학진흥원 선임연구원) ▶발제3 : 해양인문 문화유산과 문화예술관광 콘텐츠 | 김태만(국립한국해양대학교 교수‧전 국립해양박물관장) / 토론 : 구자형(해남문화관광재단 대표) ▶종합토론 좌장 : 최인선(국립순천대학교 사학과 교수)” 등의 내용으로 진행됐다.
“마하수가 콘텐츠다. 회령포가 없었으면 명량대첩도 없었다”
좌장 최인선 교수의 진행으로 시작된 종합 토론에서 ▶김선욱은 회령포에서 확보된 판옥선 12척의 수습·수리 여부, 이충무공이 8월 15일 보성 열선루에서 ‘내게는 배 12척이 있습니다’ 고 장계를 올렸다고 했는데, 왜 그 장계가 8월 15일 열선루에서였는지에 대해서 ▶정경성은 기존 논문 등에서는 회천면 군학리를 군영구미로 비정했는데, 왜 장흥부 선소가 있는 해창을 군영구미로 비정했는지에 대해서 ▶노승석은 마하수 등에 자료로 활용한 1934년 4간본 『이충무공전서』 「동의록」은 신뢰성에 대해 문제가 있는데, 이에 대한 생각을 말해 달라고 질문했으며, 이어 마하수 오부자에 대한 연구가 어느 정도 진행됐는지에 대해서 질문했고 ▶조인희는 임진란·정유란 때 의병 구분(즉 근왕병, 항보의병, 국가방위의병 등)에 대한 보충 설명을 부탁한데 이어 조선후기 의병들에 대한 현창 계보 등에 대한 추가 설명을 부탁했다. ▶구자형은 ‘회령포가 명량해전 승첩의 시작점이었다’는 키워드를 전제, 회령포의 이순신 관련 문화상품에 대해서 다른 지역과 차별화된 상품 창출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이점에 대해서 어찌 보는지에 대한 내용으로 질문을 폈다.
▶제장명 교수는, 회령포에서 판옥선 수리를 기록한 이항복의 기록에 대한 신뢰성이 부족하고, 충무공이 회령포 머믄 시간이 고작 3일뿐이어서 회령포에서 판옥선 수리는 불가했다고 추정된다, 또 이순신의 『난중일기』 중 8월 경 보성 열선루에서 장계를 올렸다는 기록이 유일하므로, 열선루에서 今臣戰船尙有十二 장계를 올린 것으로 이해한다고 답변했다. 또 기존에는 대체적으로 회천면 군학리가 군영구미로 비정돼 왔으나, 이수경 박사가 현장 답사를 통해 밝힌 논문에서 ‘장흥부 선소가 있던 해창이 군영구미였다’는 주장에 전적으로 수긍한다고 답변했다.
▶김강식 교수는, 노승석 교수가 제기한 ‘1934년 4간본 『이충무공전서』 「동의록」’에 대한 신뢰성 문제는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체 마하수 및 마하수 네 아들에 대한 전거가 열악해서 부득불 「동의록」도 자료로 활용했다면서, 향후 관련 자료에 대한 교차검증과 고증에 노력하겠다 말하고, 또 마하수 및 마하수 네 아들에 대한 연구는 이번 학술 시포지엄이 시작점이라고 생각한다고 답변했다. 또 임진란·정유란 때 의병 구분에 대해 추가적으로 설명했고, 마하수 관련 의병 계보는 시간상 미흡했음을 인정하고, 차후 마하수 등의 원전(原典) 확보와 검토에 노력하겠다고 답변했다.
▶김태만 교수는, “회령포 이순신 축제는 ‘이순신 속의 마하수’ 콘텐츠로 가야 한다. 회령포 축제는 ‘회령포가 없었으면 명량대첩도 없었다’는 기본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순신의 키포인트는 ‘패자가 부활하는 축제’ ‘패잔병이 승리하는 축제’로의 발상 전환도 필요하다. ‘마하수가 콘텐츠’이므로 마하수 동상의 경우도 바라보는 동상(조형물)이 아니라 사람들과 대화하고 소통하는 즉 말하는 마하수 동상으로 조성할 필요도 있다. 전국에서 개최되는 이순신 관련 축제만 30여 개나 된다. 장흥의 회령포 이순신 축제가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는 관(官) 주도가 아닌, 주민이 주체가 되는 축제로, 젊은이들이 실질적으로 소통하고 공감하는 축제로의 발상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날 주제발제에 나선 연사들의 강연 요지는 다음과 같다.
제장명 교수 : 명량해전과 장흥 의병의 활동
“이순신은 앞에서 조선 수군을 정비하면서 현직 휘하 인물들뿐만 아니라 당시 전라도 연해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의병들을 규합하여 열세한 전력을 보충하는 노력도 기울였다. 이 해상의병들의 활동은 대체로 두 가지 방향에서 전개되었다. 하나는 전방에서 직접 실전에 참여하는 전투 활동이었고, 다른 하나는 전투를 지원하는 병참 활동이었다. 전투 활동에서는 수군후방에서 이루어진 각종 병참활동으로 주로 군량이나 군기류를 지원·공급하는 역할이었지만, 전직(前職) 관리나 무관사인(無官士人)들 중에는 수군 지휘부의 측근에서 갖가지 군무를 보좌하거나 통신·연락의 업무를 행한 예도 있었다. …명량해전에 참전한 장흥 출신 인물들은 마하수(馬河秀), 백진남(白振南), 정명열(丁鳴說), 김택남(金澤南), 문영개(文英凱), 김성원(金聲遠), 임영개(任永凱) 등이었다. 또 초계변씨 집안 인물들로서 변국형의 아들인 변홍원(卞弘源)‧변홍제(卞弘濟)‧변홍주(卞弘洲), 변국간(卞國幹)의 아들로서 변홍건(卞弘建)‧변홍달(卞弘達)‧변홍적(卞弘迪), 변홍진(卞弘進)이 있었고 이중 변국경(卞國經)의 아들인 변홍량(卞弘亮, 1565~1597)도 명량해전에 참전한 것으로 파악된다.
장흥 의병들의 참전 규모를 보면 의병의 우두머리는 마하수를 비롯한 10여 인이었으며, 총 병력은 300인이 되었다. 향선은 10척보다 약간 넘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둘째 장흥 의병들의 참전 동기는 대부분 이순신에 대한 존경심을 가진 가운데 이순신 휘하에서 전라도를 침공한 일본군을 격퇴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장흥 출신 의병들은 이순신이 복직하여 장흥 지역으로 왔을 때 이순신에게 적극적으로 힘을 보태고자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이순신 역시 열악한 수군 형편에서 의병들의 합류는 큰 힘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하여 합류한 장흥 출신 의병들은 명량해전에 참전하게 된다.” (논문 발제 요약.)
김강식 교수 : 마하수와 마하수 오부자의 의병 활동
장흥마씨 가문의 의병 활동은 통제사 이순신의 활동과 연계되어 전개되었다. 정유년에 다시 왜적이 창궐하자 마하수는 고을 사람 송호 백진남, 제암 정명열, 휴암 문영개 등과 배를 준비해서 자제와 종과 군량과 기계를 싣고 기회를 타서 함께 가기로 계획을 짰다. 8월에 통제사 이순신이 다시 임명된 것을 듣고 회령포로 가 이충무공을 만나니 이순신은 “내가 나라가 어지럽고 흔들리는 때에 임무를 맡아 세력이 궁하고 힘이 부족하니 자네가 향선을 모아서 나의 후원이 되어 군의 위용을 갖추도록 해 달라.”고 부탁하였고 마하수는 “제가 비록 늙고 쇠약하지만 가슴 속에 오직 의(義)라는 글자 하나를 가졌습니다. 마땅히 공과 함께 죽고 살 것입니다.”고 말했다.
명량해전이 펼쳐졌던 9월 16일, 이충무공은 배를 남김없이 이끌고, 명량에서 적을 맞아 싸웠고. 마하수는 멀리서 이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적이 공(이충무공)을 포위하여 위급하였다. 휘하의 여러 장수가 다 먼 곳에 물러나 있어서 그 왜적을 막지 못하였다. 이때 마하수 혼자 분격하여 칼을 빼들고 노를 치며, “대장부는 죽을 뿐이지, 어려움을 당하여 어찌 구차하게 면할 것이냐.” 하고, 네 아들 마성룡, 마위룡, 마이룡, 마화룡과 함께 왜의 진중에 뛰어들어 오랫동안 힘껏 싸우니, 적의 세력이 크게 허물어지고 베고 노획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 마침내 탄환에 맞아 죽으니, 곧 9월 16일이었다. (이어 마하수 네 아들에 대한 행적도 소개하였다.)
…장흥 마하수 가문의 의병 활동은 임진왜란 전쟁 중에 가장 절체절명의 전투였던 명량해전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요인이 되었다. 이순신 장군의 지휘 아래 진행된 전투에서 자발적인 의병의 소모와 향선의 지원 등은 전투에서 승리를 가져올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 활동이었던 것이다. (논문 발제 요약.)
김태만 교수 : 해양문화유산이 어떻게 컨텐츠가 되는가
“마하수는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다시 통제사(統制使)가 되어 회령포에 이르렀을 때, 네 아들과 향선(鄕船)10여 척을 거느리고 통제사 이충무공의 진영을 찾아가 인사하고 이순신의 지원세력으로서 배후에서 이순신의 해전 지원을 약속했다. 공은 이후, 백진남·정명열·문영개 등 십여 사람과 함께 먼 바다에 배를 늘어놓고 마치 군선(軍船)처럼 보이게 하여 명량싸움을 응원하였다.
이충무공이 적들에게 포위되었음을 알았을 때 마하수는 “대장부가 죽는도다.”하고 네 아들과포위망 속에 깊숙이 들어가 힘껏 싸우다 탄환을 맞고 순절했다. 마하수는 사후에 병조참판에 추증되고, 장흥군 학송리 경기도 충현사에 배향되었다.
해남 우수영 관광지에서는 마하수 오부자 동상을 조성하고 “마하수 일가 5부자”를 언급하며 의병항쟁의 승리를 기리고 있으나, 정작 ‘해상의병장 마하수’의 출신지인 ‘장흥 회령포’에서 전가족과 함께 ‘향선 10척’을 이끌고 명량해전에 참전한 ‘장흥의병장’이라는 설명이 없는 점을 ‘장흥’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장흥 회령포의 문화 콘텐츠가 있어야 한다면 “마하수가 콘텐츠다”는 사실에서 출발되어야 한다. 즉 마하수(또는 마하수 일가 5부자) 자체를 ‘지역문화유산’의 핵심 포인트 삼고, 여기에 회령포 결의,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今臣戰船 尙有十二’, 해상 의병장 마하수, 장흥 해상 의병 향선 10척, 마하수 오부자 동상 등을 조성하여 마하수 콘텐츠를 창출시켜야 한다.“
마하수 콘텐츠의 취지, 기본 정신에서 마하수의 충절 정신을 부각시킬 필요도 있다. 즉 마하수의 ‘절의(節義)와 기개(氣槪)로 충만한 애국정신’ 그리고 ‘자식까지 전장으로 내 보낼 만큼 절박한 항전의식(4男 : 마성룡馬成龍, 마위룡馬爲龍, 마이룡馬而龍, 마화룡馬化龍’도 고취시킬 필요가 있을 것이다. (발제 논문 요약)
출처 : http://www.jhtoday.net/news/articleView.html?idxno=14060 장흥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