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장흥100년사(146p~160p)
●도로개설시의 울력(장흥-남포선 구간의 자울재에서)
●지게와 달구지는 우리 고향을 생각나게 하고
장평면 청룡리 소류지 공사. 장평면 청룡리 마을 주민들은 이렇게 땀흘려 일했다. 순수한 노력, 이때만 해도 농기구외 특별한 장비가 없었다.
●용산 덕암보 설치를 역설하는 김미식씨, 김용관 지사와 군수가 듣고 있다.
●덕암보 공사 시공현장. 1963. 4. 3 착공
●대덕면 율지리 100여정보가 홍수로 매몰된 농지를 피해복구하는 광경(사라호)
●사촌 분배식 끝나고 대덕사업이 시작된다. 1954년도 안양 사촌 장재도 연륙공사 현장
●흥업회에서는 부모형제가 없는 난민을 위해 따뜻한(전인표, 황만일 혼주가 돼서)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1950년대 말 군청내에 있는 공회당에서 장흥군 지활 정착단원 45쌍의 합동결혼식.
●행사장 근경
●행사장 뒤로는 아직도 초가집이 즐비했다.
●5.16이후 국토확장 사업의 일환으로 활발하게 전개된 간척사업(대덕자조정착사업 조성농지 분배식에 박정희 대통령 권한대행과 미국 버거대사 참석하였다.)(1962.11.27)
●안양 사촌 난민정착지 농지분배식. 1954년 시작해 1957년 완공 이후 대덕사업이 시작된다.)
●대덕 난민 정착사업장 제방 준공
●대덕 덕촌 간척사업장의 군수실에서 당시의 상황을 설명받는 김용관 지사. 당시 본군 출신 김용관 지사에게 관계들은 장흥에 대한 부탁도 잊지 않았다.
●선임 김용관 도지사 초도순시중 가내수공업 공장 시찰
●흥업회 가내수공업 공장을 보고 나오는 김용관 지사, 김수남 군수
●군내 기관장들이 덕촌 자활 정착 사업장을 시찰
장흥읍 송암리( 강진 군동과 경계) 사인바위앞 도로의 범람. 이 곳은 작천 발원의 강줄기가 유치 발원의 본류와 만나는 지점으로 유량이 많았으나 지금은 직강공사로 메워져 버렸다. 당시 주막집이 보이며 아래 사진에서는 방앗간까지 침수되었다.(1971.8)
●새암바위 앞 물방앗간이 침수
●군계지역인 새암바위앞 도로가 폭우로 침수된 장면
●폭우로 인하여 범람된 관산 고읍천 전경
●관산 고읍천이 범람 물바다가 됐다.
●부산 유량리의 전파가옥과 세간살이
●대덕읍 연지리 세월교의 침수(1971)
●장동 구시 방죽 붕괴직전 관련인사들의 현지 확인
7. 시대따라 변한 농자천하지대본/ 산업
●장흥보통학교 학생들이 벼를 베는 실습을 하고(1912)
●1920년대 만해도 일본인 지주는 흔했다. 우리땅을 빼앗기고 품팔이 하고 있는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 여기에 두 사람은 일인지주, 이 때 우리 품삭이 쌀 반되였다. (건산리 장흥농협 뒤)
●일본인 酒井(사가이) 농장(1915과수원 조성되기 이전)
●50년대 비료가 없던 시절 분뇨는 농가의 중요한 거름이었다.
●농기계가 없던 시절 농부에게 소는 유일한 재산이었다.
●제초제가 없던 시절 한 여름 땡볕에서 논메기하는 아낙들
●바쁜 하루중에도 농주 한 잔 곁들인 후 바지게를 침대삼아 피로를 풀던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