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문화원

■이사람/ 용화사 주지 서응스님
불상전문 사진작가 안장헌 - “불상 상호의 아우라 너무나 강렬”
국내 최고전문가 정영호박사-“석불 복원-국가 지정 적극 추진”
관계기관 무관심-석불 재조명, 용화세계 꽃불 언제 피어오를까
 

동면 용화사 전경

 

 
신라 말 고려초기의 용화사 석조여래좌상(사진-안중헌)

 

 
용화사(龍華寺)는 장동면 북교리 산 43번지(장동면 석교상방이길 89-114)에 위치한 신라 말 고려초기의 약사여래불을 모신 사찰이다.
아직은 사찰로서 번듯한 대웅전도 구비되어 있지 않아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영험하다고 잘 알려진 천년된 석불 약사여래가 있어 전국 각처에서 참배 불자들의 기도행이 줄을 잇고 있다.
최근에는 용화사 진입도로가 개설되어 대형 관광버스를 동원한 단체 기도참배객들이 줄을 이을 정도다. 올 가을에도 관광버스 5대의 참배가 예약되어 있다고 한다.

 

■용화사의 기원은 불자사로부터

 

용화사의 시원은 불자사(佛者寺)이다.
<장흥읍지>(1747년 간행 정묘지) 장동방 불우조(佛宇條)에 “佛子寺 在盃山西 今有遺止”라는 내용, 즉 ‘불자사는 배산 서쪽에 있었으나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현재의 약사여래좌상이 위치한 용화사가 예전의 불자사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런데 1953년경 모인(某人)이 폐사지 방죽에 넘어져 있던 약사여래좌상을 일으켜 세우고 석불 주위로 작은 움막 같은 보호각을 지었으니, 이 석불과 작은 움막 같은 보호각으로부터 용화사는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2003년 서응 스님이 용화사 주지로 부임해오며, 용화사는 일대 변혁기를 맞이한다. 서응 스님은 약사여래좌상이 안치된 허름한 보호각을 개축한 데 이어, 설선당, 심검당, 다향각, 화장실 등을 복원하며 어느 만큼 사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서응 스님- 약사여래불에 큰 감화받았다

 

서응 스님은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던 용화사로 이적하게 된 계기를 묻는 기자의 말에 스님은 당시 움막 같은 곳에 갇혀 있던 석불에 큰 감화를 받았다고 한다.
“저의 게으른 선수행을 질타하는 듯 활짝 열어젖힌 눈매며 기상이 넘치는 듯 우뚝 솟은 콧날, 자애가 넘치는 듯한 도톰한 입술...저는 이런 천년고불인 약사여래불을 보고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거기서 하룻밤을 유하는데 부처님이 현몽하기도 했고, 새벽에 몸이 그렇게 가뿐해질 수가 없었습니다. 용화사의 기운이 범상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약사여래불을 모셔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용화사로 온 이후 서응 스님은 첫째로 콘크리트 좌대 위에 앉아 있고 상당히 훼손 되어 있는 석불을 복원하는 불사를 추진하였다고 한다. 그러다 2003년 매미 태풍 때 약사여래불 보호각이 무너지는 참변을 당했고, 이후 군의 긴급 복구사업으로 보호각을 재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동안 서응 스님은 스스로 수십 번 체험하기도 했지만, 약사불을 참배한 수많은 불자들로부터 약사여래부처님의 영험함을 전해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불교 미술사학의 거목인 정용호 박사가 용화사를 다년간 2015년 이후, 약사불의 예술적, 문화적 가치를 거듭 확인하고는 약사여래불의 복원사업과 국가지정 문화재인 국보, 보물 지정운동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용화사의 약사여래좌상은 1974년 9월 24일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된 바 있다)
서응 스님은 석불의 복원에 이은 또 한 가지 꿈을 가지게 되었다. 새로운 당우에 약사불을 본존불로 모시는 대웅전 불사를 추진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불사의 꿈은 2016년 8월 2일, 전 단국대 석주선박물관장으로 한국 고고미술사학계 거목인 정영호 박사가 용화사를 방문하고 나서였다.

 

■미술사학계 거목 정용호 박사 용화사 방문

 

▲정영호박사(좌측에서 두번째)가 석불을 관찰하고 있다.(사진-안중헌)

 
▲정영호박사(우측에서 두번째)가 석불 복원, 국보지정을 주창하고 있다.(사진-안중헌)
 
정영호 박사는 1950년대부터 수백여 점의 유적 및 유물 발굴에 앞장섰던 국내 최고의 미술 사학계의 거봉이었다. 그가 발굴한 단양신라적성비(국보 제198호), 중원고구려비(국보 제205호) 발굴 등은 특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또 양양군 진전사지의 6차례 발굴조사를 통해 부도(보물 제439호)와 석탑(국보 제122호) 발굴 등으로 국내 첫 폐사지 복원의 역사를 일궈내는 큰 기여를 했으며, 1977년 이후 2016까지 200여 회에 걸쳐 일본 대마도를 방문, 왕인 박사를 비롯한 선현들의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그 정영호 박사가 용화사를 방문한 것이다. 이때 동행한 분들이 문화재 전문 사진작가인 안장헌 씨, 박기선 박사(정영호 박사 제자), 순천대 사학과 교수 최인선 씨(순천대학교 박물관장) 등이었다.
특히 안장헌 사진작가의 경우, 국내의 불상 사진만 수십만 점을 보유할 정도로 불상에 대해서 세계적으로 탁월한 식견을 가진 지고 있었고 이런 이유로 용화사 석불과도 인연도 있었던 불상 전문 사진작가이기도 했다.

 

■안장현 불상 전문 작가도 용화사 방문

 

안장헌 씨는 2002년 3월 5일, 처음으로 용화사를 찾아갔을 때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용화사는 석불의 보호각을 법당으로 사용하고 있으면서 변변한 요사채마저 없는 자그마한 절이었다. …용화사의 석불은 광배(光背)와 불신(佛身)을 커다란 하나의 돌에 새겨놓은 좌불상이었다. …석불이 오른손은 잃었으나 항마촉지인을 맺고 있었을 여래좌상이 분명하고이목구비가 뚜렷한 상호는 그윽한 자비의 미소를 듬뿍 머금은 부드럽고 활달한 기운이 생동하고 있었다. 비록 손상되고 결실되기는 하였으나 입체감이 매우 좋은 당당한 몸매에서 원숙한 조각가의 불심을 읽을 수 있었으며 배 모양의 광배에는 조식이 화려하고 양감도 좋아 부처의 몸에서 발산되는 광채를 표현하였는데 둘레가 많이 결실되어 아쉬움이 컸다”(네이버 블러그-‘안장헌의 문화유산과 사진 이야기’)
그리고 안장헌 씨는 2003년 2월, <석불-돌에 세긴 정토의 꿈>(한길아트 발간)이라는 불상 사진집을 펴냈는데 여기서도 용화사 석불을 소개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서응 스님과 인연이 되었고, 이후에도 3회(2004년 10월, 2005년 7월, 2015년 10월)에 걸쳐 용화사를 더 찾았으며, 2016년 8월 2일 정영호 박사가 용화사를 찾았을 때도 용화사를 다시 방문했던 것이다.

 

■“용화사 석불-복원, 국가지정 문화재 추진할 터”

 

서응 스님은 “2016년 8월, 용화사 석불을 일견한 정용호 박사는 수많은 불상을 봐 왔지만 이처럼 대단히 훌륭해 뵈는 불상은 처음이다. 국보급 이상이다. 내 생애에서(당시 80세) 마지막으로 진선사 복원(예전 진선사지 발굴을 주도했다)과 함께 이 불상 복원도 추진해 보고 싶다, 더불어 이 석불의 국보급 지정 운동도 함께 추진하겠다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이때 정 박사와 함께 방문했던 안장헌 씨도 기자와 전화 통화에서 “석불을 참배하고 우러러 보면 불상이 주는 아우라(Aura:예술 작품 등에서, 흉내 낼 수 없는 고고한, 고유한 분위기나 기운)가 너무 강렬했다, 수십만 장의 국내 불상 사진을 찍은 내게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이후 용화사의 약사여래불의 복원과 국보급 지정 운동은 정영호 박사를 위시해서 본격 추진되는 듯했으나, 그 이듬해인 2017년 4월 27일 정영호 박사가 갑자기 별세, 용화사의 약사여래좌상의 복원과 국보급 지정 운동은 이후 정체되고 말았다.

 

■대웅전 불사 추진-용화세계 구현 기반

 

용화사(龍華寺)라는 절 이름은 미래의 불국정토가 실현된다는 용화(龍華)세계에서 따온 사찰 이름이다. 그런데 이 용화사에서 본존불은 미륵불도 아니고 약사여래불, 즉 약사여래좌상이다. 약사여래는 모든 중생의 질병을 고쳐주고 재앙을 소멸시키며 불자에게 무상보리(無上菩提)라는 최고의 깨달음을 얻게 해준다는 부처이다. 그러므로 장동 북교리의 용화사는 이상(理想)으로 불국토를 지향하지만 현실(現實)에서 중생의 아픔과 슬픔을 치유해주는 사찰인 것이다. 이상과 현실이 공존하지만 이상보다 현실을 더 중시하는 사찰이 장동 북교리의 용화사인 것이다.
최근 들어 서응 스님의 대웅전 불사와 약사여래 복원 불사에 대한 발원의식은 더욱 확고해지고 있다.
“전국에서 참배객들이 몰려드는 참배객이 연중 5백여 명이나 되는데, 보호각이 비좁아 겨우 10여명밖에 못 들어가니 기가 막히잖아요. 천년고불을 모신 법당도 너무 초라하잖아요. 그것도 절 입구 길에 떡 버텨있습니다. 바람 불면 먼지가 법당으로 들어와 1년 내내 문도 못열어 놓고 있습니다. 70-80년대에 철근 콘크리트로 만든 좌대가 부식되어 석불이 기울고 거기다 시멘트 독으로 석불이 백화현상으로 부식되고 있습니다. …하여 약사여래불을 제대로 복원도 하고, 제자리에 모시려고 대웅전 불사를 추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약사불에 대한 문화재적, 불교 미술사적인 가치에 대해 수많은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극찬하며, 국보급으로 지정되고 복원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도 전남도나 장흥군 등 관계 당국에서는 너무 무관심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도, 군 관계자들도 석불의 복원을 인정하면서도 에산문제로 이를 처리 못하고 있어 참배객들로부터 욕을 얻어먹고 있습니다.”
용화사 경호스님의 비원의 목소리였다.

 

■용화의 꽃불 피어나길 비원한다

 

“앞으로 대웅전 불사와 약사여래불 복원을 1차적으로 추진해야 하지만, 이와 함께 주차장도 정비해야 하고, 참배객들의 쉼터도 만들어야 하고, 종각도 신설해야하고 참, 할 일이 많습니다.”
서응 스님은 “출가한 이래 수십 년 동아 수행 정진해 오면서, 도솔암에서 천일기도 회향 후 단군 이래 국가 최대의 공사라는 새만금 간척공사 때 3회에 걸쳐 고사 및 천도재를 지낸 것을 비롯하여, 광양제절 제2컨테이너 항만, 부산 신고리 원자력발전소, 시흥 제3,4호기 화력발전소 공사 등 수많은 건설회사 공사 기도를 봉행한 것이 추억에 남는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서응 스님-무엇보다. 외진 산골에서 찬란한 용화세계를 꿈꾸며 그러나 지금은 만인 대중들의 지극한 아픔과 슬픔을 녹여주는 기도처로서 번듯한 도량을 꿈꾸는, 지극히 현대적이며 천진한 스님임에는 분명하다.
어느 시인은 용화사 방문기에서 용사화에 대해 “…당호하나 걸리지 않는 용화사에 천년을 이어오는 옛 불자사의 꽃불이 타오르고 있다”고 표현했다.
이 시인이 표현한 꽃불… 그 ‘꽃불’은 오욕과 번뇌로 가득찬 이 땅(現實)에 발 딛는 인간이 저 투명하고 공(空)한 하늘(理想)을 땅으로 끌어 내려 찬연히 빛나는 ‘용화(龍華)’의 꽃불일 게다./김선욱 기자

comment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