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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문화와역사/시도지정문화재

[명가와 고택을 찾아서] 14. 전남 장흥, 존재-신와-오헌 고택

by 장흥문화원 관리자 2021. 6. 1.

전통문화의 보고 ‘방촌마을’...名山 정기 받아 길게 흥하다

 

깨끗하게 잘 정리된 신와고택 안채 뒤툇마루. 튀어나온 큰 바위 때문에 안채와 사랑채의 좌향이 조금 어긋나게 됐다고 한다.

 

방촌(傍村)은 통일신라 때 정안현, 고려 때 장흥부의 치소였다. 조선조에 장흥 위씨가 들어와 살기 시작해, 오늘날 12뜸에 위씨 110가구가 살고 있다. 작은 마을에 팔경이라면 과한 느낌인데, 방촌 팔경 두 대목만 소개한다. 2경 상잠만하(觴岑晩霞), 저녁밥 짓는 연기가 방촌의 주산 상잠산에 띠 허리를 두른다. 8경 금당귀범(錦塘歸帆), 고깃배가 해질녘 황혼의 기운을 받고 만선으로 돌아온다. 풍요로운 고장이다. 장흥 관산읍은 고려 말 원나라가 왜를 정벌할 때 조선소였다. 천관산의 아름드리 소나무를 수 만 그루 베어 신월마을에서 900척 전선을 짓고, 군마등, 마장골에서 군마를 훈련시켰다. 조선조 들어 신월마을은 염전이 되어 부를 창출하니, 문자 그대로 장흥(長興, 길게 흥하다)이다. 장흥군 관산읍 방촌마을의 주산은 상잠산, 멀리 천관산을 바라본다. 천관산은 지리산, 내장산, 월출산, 변산과 함께 호남 5대 명산으로 꼽힌다. 천자의 면류관 닮았다는 설도 있고, 삼국 통일의 영웅 김유신의 첫 사랑인 기생 천관에서 연유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버림받은 천관이 머리 깎고 옛 애인 잘 되기 빌던 자리라는 것이다. 기생 천관설이 훨씬 애달프고 가슴 저민다.

■ ‘존재 고택’과 외로운 실학자 존재 위백규… 정약용 선생은 위백규에게 영감을 얻었나?
존재(存齋) 고택은 방촌마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아, 경관이 아름답고 여름에 시원하다. 18세기 지어졌다는데, 대문간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앙증맞은 별당 겸 서재가 백미다. 안마당으로부터 돌아앉았다고 표현해야 좋은 좌향이다. 남과 동에 퇴를 두고, 각각 영이재(詠而齋) 위덕문, 존재(存齋) 위백규 부자의 호를 당호 편액으로 내 걸었다. 별당 지붕은 반쪽은 팔작지붕이고 다른 반쪽은 안채 지붕과 겹치지 않게 맞배지붕의 특이한 구조다.

고택의 주인공은 단연 실학자 존재 위백규다. 만언봉사, 정현신보(政絃新譜)에서 존재는 제도의 취지와 연혁, 폐단과 부작용을 예를 들어 설명하고 대책을 논했다. 존재는 학교, 용인(用人), 군현, 조운, 전결, 관직, 노비, 공물(貢物) 등 30여 분야에 걸쳐 문제를 진단하고 처방을 제시했다. 여유당 정약용 선생의 경세유표를 연상케 해 흥미롭다.

더 재미난 것은 존재가 <茶山書堂>을 열어 시골 아이들을 가르쳤고, 여유당과 학문적 대화를 나눈 백련사 혜장스님과도 교분이 깊었다는 사실이다. 혹시나 여유당이 직, 간접적으로 존재에게서 영감을 얻지는 않았을까, 발칙한 생각을 해 본다. (여유당의 어떤 저술에도 존재에 대한 언급은 없다.)

존재고택의 툇마루. 남도에서도 바다에 면한 지역에서는 툇마루를 널찍하게 잡아 햇살도 피하고 비도 피하면서 시원한 공간을 확보했다.

 

■ 질서와 조화의 ‘죽헌 고택’… 여유로운 남도의 삶 ‘신와 고택’
죽헌(竹軒) 고택은 담장과 사랑채, 안채의 지붕면이 위계(位階) 있고 정연하다. 집 앞 계단을 올라 서향한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다시 높은 계단이 눈앞을 막는다. 계단을 직진하면 안채로 통하는 문간채요, 사랑채는 왼쪽 쪽문으로 꺾어야 한다. 직진하면 사랑채, 꺾으면 안채의 일반적인 배치와는 사뭇 다르다. 대문, 안채문, 안채가 동일 축선상이니, 다분히 안채 중심의 건축이다.

쪽문으로 사랑채에 들어서면 잘 꾸며진 일본풍의 음지 정원이다. 북쪽으로 연못을 파고 섬을 만들어 양지 식물을 심었다. 사랑채는 4칸 전후툇집으로 전면 처마를 길게 빼내 여름철 저녁 햇살을 가리고, 북쪽에 누마루를 들였다. 사랑채 높은 툇마루에 앉으면 멀리 천관산 환희대가 눈에 들어온다. 조경(造景)과 차경(借景)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남도 고택은 좌향과 상관없이 퇴가 영남이나 경기보다 퇴의 폭이 2배 가까이 넓다. 서향이 많은 방촌만이 아니라 북향인 영광 연안 김씨 종택도 마찬가지다. 햇살도 피하고 잦은 큰비도 피하지만, 덥고 답답한 방보다 마루가 쾌적하지 않을까?

신와고택은 위영형(魏榮馨)이 처음 터잡고, 손자 신와(新窩) 위준식이 고쳐 지금의 형태가 됐다. 안채, 사랑채, 사당, 곳간채, 헛간채, 문간채 등 6동으로 당당한 살림을 과시한다. 공동우물을 연상케 할 정도로 널찍한 우물과 어린이 놀이터로 쓰이던 문간채 다락, 사랑채(정면 5칸)보다 훨씬 크고 웅장한 안채(정면 6칸)가 특징이다. 위기환 씨(72)는 거대한 바위를 피해 안채를 들이다 보니 안채와 사랑채의 좌향이 약간 비스듬해졌다고 설명한다.

겹처마를 길게 달아 서향집 특유의 따가운 저녁햇살을 가리고, 남도의 잦은 비도 피할 수 있게 한 죽헌고택 사랑채. 전통시대라면 겹처마는 일반 민가에서는 쉽게 쓰지 않는 대담한 수법이었을 것이다. 활주 역시 일반 민가에서 쉽게 보기 어려운 수법이다.

 

■인간과 공간의 공진화 ‘오헌고택’… 국난 극복과 판서공파의 전통
오헌(梧軒) 고택은 오헌 위계룡이 중건한 전통가옥이다. 원래 원취당 위도순이 자리 잡았는데, 사랑채에는 세거 인물의 아호 겸 건물의 당호가 편액으로 나란히 걸려 인간과 공간의 공진화(共進化)를 보여준다. 翠軒(읍취헌), 願醉(원취), 素庵(소암), 壺亭(호정), 春坡(춘파), 梧軒(오헌), 後溪(후계), 壺谷(호곡), 觴山(상산)…….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는 의주로 피난을 간다. 명색이 임금의 피난인데, 호종팀이 서애 유성룡 등 십여 명에 불과했다. 먹을 것이 떨어져 갓 무과급제한 말단 무관이 민가에서 서숙밥을 구해 바쳤다. 선조가 ‘정말로 맛있는 밥을 구해왔다’고 치하하고 즉석에서 언양 현감에 제수한다. 그 무관은 임란 호종으로 공훈록에 두 번 등재되고, 호조판서에 추증된다. 판서공 위덕화의 유래다. 판서공 종택은 안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 창고 등 여덟 채가 입 구(口)자를 이룬다. 1624년 지었다는 사당의 쇠꺾쇠는 녹았지만, 밤나무 기둥은 아직 생생하다. 해마다 음력 10월 중순, 전국의 장흥 위씨가 방촌으로 몰려들어 2박 3일 시제를 지내고 계취를 즐기며 우의를 다진다. 볼 만 하겠다.
 

오헌고택 입구는 무겁고 폐쇄적으로 보이지만, 거기 사는 이들은 매우 개방적이고 친절하다.

 

김구철 시민기자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출처_[명가와 고택을 찾아서] 14. 전남 장흥, 존재-신와-오헌 고택 - 경기일보 - 1등 유료부수, 경기·인천 대표신문 (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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