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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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림의향 장흥설화

ㅇ문림의향(文林義鄕)의 향맥을 이어가는 장흥의 매력적인 설화 발굴을 통해 장흥문화를 적극적으로 알리고 문화관광산업의 부가가치 창출ㅇ고령화로 사라져가는 설화를 시급히 발굴 및 보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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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문화의 보고 ‘방촌마을’...名山 정기 받아 길게 흥하다

 

깨끗하게 잘 정리된 신와고택 안채 뒤툇마루. 튀어나온 큰 바위 때문에 안채와 사랑채의 좌향이 조금 어긋나게 됐다고 한다.

 

방촌(傍村)은 통일신라 때 정안현, 고려 때 장흥부의 치소였다. 조선조에 장흥 위씨가 들어와 살기 시작해, 오늘날 12뜸에 위씨 110가구가 살고 있다. 작은 마을에 팔경이라면 과한 느낌인데, 방촌 팔경 두 대목만 소개한다. 2경 상잠만하(觴岑晩霞), 저녁밥 짓는 연기가 방촌의 주산 상잠산에 띠 허리를 두른다. 8경 금당귀범(錦塘歸帆), 고깃배가 해질녘 황혼의 기운을 받고 만선으로 돌아온다. 풍요로운 고장이다. 장흥 관산읍은 고려 말 원나라가 왜를 정벌할 때 조선소였다. 천관산의 아름드리 소나무를 수 만 그루 베어 신월마을에서 900척 전선을 짓고, 군마등, 마장골에서 군마를 훈련시켰다. 조선조 들어 신월마을은 염전이 되어 부를 창출하니, 문자 그대로 장흥(長興, 길게 흥하다)이다. 장흥군 관산읍 방촌마을의 주산은 상잠산, 멀리 천관산을 바라본다. 천관산은 지리산, 내장산, 월출산, 변산과 함께 호남 5대 명산으로 꼽힌다. 천자의 면류관 닮았다는 설도 있고, 삼국 통일의 영웅 김유신의 첫 사랑인 기생 천관에서 연유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버림받은 천관이 머리 깎고 옛 애인 잘 되기 빌던 자리라는 것이다. 기생 천관설이 훨씬 애달프고 가슴 저민다.

■ ‘존재 고택’과 외로운 실학자 존재 위백규… 정약용 선생은 위백규에게 영감을 얻었나?
존재(存齋) 고택은 방촌마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아, 경관이 아름답고 여름에 시원하다. 18세기 지어졌다는데, 대문간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앙증맞은 별당 겸 서재가 백미다. 안마당으로부터 돌아앉았다고 표현해야 좋은 좌향이다. 남과 동에 퇴를 두고, 각각 영이재(詠而齋) 위덕문, 존재(存齋) 위백규 부자의 호를 당호 편액으로 내 걸었다. 별당 지붕은 반쪽은 팔작지붕이고 다른 반쪽은 안채 지붕과 겹치지 않게 맞배지붕의 특이한 구조다.

고택의 주인공은 단연 실학자 존재 위백규다. 만언봉사, 정현신보(政絃新譜)에서 존재는 제도의 취지와 연혁, 폐단과 부작용을 예를 들어 설명하고 대책을 논했다. 존재는 학교, 용인(用人), 군현, 조운, 전결, 관직, 노비, 공물(貢物) 등 30여 분야에 걸쳐 문제를 진단하고 처방을 제시했다. 여유당 정약용 선생의 경세유표를 연상케 해 흥미롭다.

더 재미난 것은 존재가 <茶山書堂>을 열어 시골 아이들을 가르쳤고, 여유당과 학문적 대화를 나눈 백련사 혜장스님과도 교분이 깊었다는 사실이다. 혹시나 여유당이 직, 간접적으로 존재에게서 영감을 얻지는 않았을까, 발칙한 생각을 해 본다. (여유당의 어떤 저술에도 존재에 대한 언급은 없다.)

존재고택의 툇마루. 남도에서도 바다에 면한 지역에서는 툇마루를 널찍하게 잡아 햇살도 피하고 비도 피하면서 시원한 공간을 확보했다.

 

■ 질서와 조화의 ‘죽헌 고택’… 여유로운 남도의 삶 ‘신와 고택’
죽헌(竹軒) 고택은 담장과 사랑채, 안채의 지붕면이 위계(位階) 있고 정연하다. 집 앞 계단을 올라 서향한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다시 높은 계단이 눈앞을 막는다. 계단을 직진하면 안채로 통하는 문간채요, 사랑채는 왼쪽 쪽문으로 꺾어야 한다. 직진하면 사랑채, 꺾으면 안채의 일반적인 배치와는 사뭇 다르다. 대문, 안채문, 안채가 동일 축선상이니, 다분히 안채 중심의 건축이다.

쪽문으로 사랑채에 들어서면 잘 꾸며진 일본풍의 음지 정원이다. 북쪽으로 연못을 파고 섬을 만들어 양지 식물을 심었다. 사랑채는 4칸 전후툇집으로 전면 처마를 길게 빼내 여름철 저녁 햇살을 가리고, 북쪽에 누마루를 들였다. 사랑채 높은 툇마루에 앉으면 멀리 천관산 환희대가 눈에 들어온다. 조경(造景)과 차경(借景)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남도 고택은 좌향과 상관없이 퇴가 영남이나 경기보다 퇴의 폭이 2배 가까이 넓다. 서향이 많은 방촌만이 아니라 북향인 영광 연안 김씨 종택도 마찬가지다. 햇살도 피하고 잦은 큰비도 피하지만, 덥고 답답한 방보다 마루가 쾌적하지 않을까?

신와고택은 위영형(魏榮馨)이 처음 터잡고, 손자 신와(新窩) 위준식이 고쳐 지금의 형태가 됐다. 안채, 사랑채, 사당, 곳간채, 헛간채, 문간채 등 6동으로 당당한 살림을 과시한다. 공동우물을 연상케 할 정도로 널찍한 우물과 어린이 놀이터로 쓰이던 문간채 다락, 사랑채(정면 5칸)보다 훨씬 크고 웅장한 안채(정면 6칸)가 특징이다. 위기환 씨(72)는 거대한 바위를 피해 안채를 들이다 보니 안채와 사랑채의 좌향이 약간 비스듬해졌다고 설명한다.

겹처마를 길게 달아 서향집 특유의 따가운 저녁햇살을 가리고, 남도의 잦은 비도 피할 수 있게 한 죽헌고택 사랑채. 전통시대라면 겹처마는 일반 민가에서는 쉽게 쓰지 않는 대담한 수법이었을 것이다. 활주 역시 일반 민가에서 쉽게 보기 어려운 수법이다.

 

■인간과 공간의 공진화 ‘오헌고택’… 국난 극복과 판서공파의 전통
오헌(梧軒) 고택은 오헌 위계룡이 중건한 전통가옥이다. 원래 원취당 위도순이 자리 잡았는데, 사랑채에는 세거 인물의 아호 겸 건물의 당호가 편액으로 나란히 걸려 인간과 공간의 공진화(共進化)를 보여준다. 翠軒(읍취헌), 願醉(원취), 素庵(소암), 壺亭(호정), 春坡(춘파), 梧軒(오헌), 後溪(후계), 壺谷(호곡), 觴山(상산)…….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는 의주로 피난을 간다. 명색이 임금의 피난인데, 호종팀이 서애 유성룡 등 십여 명에 불과했다. 먹을 것이 떨어져 갓 무과급제한 말단 무관이 민가에서 서숙밥을 구해 바쳤다. 선조가 ‘정말로 맛있는 밥을 구해왔다’고 치하하고 즉석에서 언양 현감에 제수한다. 그 무관은 임란 호종으로 공훈록에 두 번 등재되고, 호조판서에 추증된다. 판서공 위덕화의 유래다. 판서공 종택은 안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 창고 등 여덟 채가 입 구(口)자를 이룬다. 1624년 지었다는 사당의 쇠꺾쇠는 녹았지만, 밤나무 기둥은 아직 생생하다. 해마다 음력 10월 중순, 전국의 장흥 위씨가 방촌으로 몰려들어 2박 3일 시제를 지내고 계취를 즐기며 우의를 다진다. 볼 만 하겠다.
 

오헌고택 입구는 무겁고 폐쇄적으로 보이지만, 거기 사는 이들은 매우 개방적이고 친절하다.

 

김구철 시민기자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출처_[명가와 고택을 찾아서] 14. 전남 장흥, 존재-신와-오헌 고택 - 경기일보 - 1등 유료부수, 경기·인천 대표신문 (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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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학자 심정섭 씨 안의사사우 모의계 취지서본보에 공개

19571월 전남 지역민들에게 발송한 안의사사우 모의계 취지서. 안중근 의사의 뜻을 받들고 추앙하는 마음으로 지역이 하나가 됐다.

 

민족혼을 북돋우고 태극기 휘날리는 자유대한의 터전을 빛나게 해 주신 의열사 고 안중근 선생 사우(祠宇) 완공은 우리 민족의 무한한 영광입니다.”

안의사사우 모의계장 고광찬 씨는 19571월 전남 지역민들에게 이런 내용의 모의계(慕義契) 취지서를 보냈다. 모의계는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따르는 모임이다. 취지서에는 계를 조직해 안 의사의 유혼을 길이 받들고자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같은 시기 보성군 조성면에 사는 강성규 씨 등에게 시군 책임자격인 유사(有司)로 추천한다는 천거장을 보냈다.

향토사학자 심정섭 씨(76·광주 북구 매곡동)는 경술국치일(1910829) 109주년을 앞두고 안의사사우 모의계 취지서와 천거장을 본보에 공개했다.


취지서가 발송되기 13개월 전인 195510월 장흥군 장동면 용두산(龍頭山) 자락에는 해동사(海東祠)가 건립됐다. 해동사는 국내 유일의 안 의사 사당이다. 안 의사는 190910월 중국 하얼빈역에서 조선 초대 총독으로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하고 다음 해 중국 뤼순(旅順) 감옥에서 순국했다.


안 의사와 연고가 없는 정남진 장흥에 사당이 창건된 것은 죽산 안씨 문중이 나서면서다. 죽산 안씨 문중은 1952년 용두산 자락 제각이 있던 곳에 조상들의 공덕을 기리는 사당인 만수사를 짓는다. 이후 같은 안 씨이지만 본관이 다른 순흥 안씨인 안 의사 후손이 제사를 지내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죽산 안씨 문중은 매년 음력 312일 해동사에서 안중근 의사 제향을 지내고 있다. 내년부터는 안 의사 순국일인 326일에 제향을 지낼 예정이다. 국내 유일한 안 의사 사당인 해동사는 1955년 창건됐고 2000년 중건됐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이에 장흥향교 전교를 지낸 의산(義山) 안홍천 씨(18951994)가 안중근 의사 사당 건립에 뛰어들었다. 안 씨는 성만 같을 뿐 혈연이나 지연, 학연도 없었다. 다만 안 의사를 추앙했다. 안 씨는 이후 광주공원에 안 의사 숭모비 건립에 참여했고 국립중앙도서관에 고서 2850점을 기증했다.

 

죽산 안씨 문중과 유학자들이 성금을 보태 한 칸짜리 사당을 세웠다. 만수사에 안 의사의 사당을 따로 지은 것이다. 해동사 건립식에는 안 의사의 큰딸 현생 씨(당시 대구가톨릭대 교수)가 의사의 영정을, 5촌 조카 춘생 씨(당시 육군 소장)가 의사의 위패를 들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해동명월(海東明月)’이라는 친필을 내렸다. 사당은 이 대통령의 글을 따 해동사로 명명됐다.

해동사가 건립될 당시는 6·25전쟁이 끝난 직후여서 생활이 모두 궁핍했다. 62년 전 전남 지역민들은 힘든 삶이었지만 안 의사를 추앙하는 데 한마음이 돼 나섰다. 안규옥 해동사 사무국장(79)지난해 현충시설로 지정된 해동사는 지역민들의 자긍심이라며 해동사가 정부의 지원을 받은 것은 몇 년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심정섭 씨는 안의사숭모회가 1971년 서울 남산광장에 기념관을 건립했지만 충의의 고장 전남 지역민들은 앞서 해동사를 창건했다해동사를 충의교육장으로 조성하는 것이 후손들의 도리라고 강조했다.

장흥군은 안 의사 숭모 열기를 감안해 2021년까지 70억 원을 투입해 해동사 주변을 역사교육 현장으로 만드는 역사관광 자원화 사업을 추진한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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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전남]안중근 의사 사당 해동사안내 표지판조차 없다니

지은지 55관리 허술

동아일보 2010-03-29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기를 맞았으나 안 의사의 국내 첫 추모공간이자 유일한 사당인 해동사는 안내 표지판조차 제대로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전남 장흥군 장동면 만년리 시골길을 1km 정도 따라가면 고려시대 안향 선생을 모시는 만수사가 나온다. 만수사 안에 10m²(5) 넓이의 또 다른 작은 사당이 있다. 이곳이 바로 국내에서 유일하게 안중근 의사를 모시는 사당인 해동사다.

 

해동사를 지은 죽산 안씨 문중은 28지난해부터 장흥군에 해동사 시설보수 등을 요청하고 있다고 밝혔다. 해동사 도로입구에 안내표지판 하나 없는 데다 석축 등 보수가 절실했기 때문.

 

해동사는 안씨 문중 사람들이 돈을 갹출해 19551027일 완공했다. 당시 안 의사 영정 봉안식에는 안 의사의 딸 현생 씨와 당질 춘생 씨(당시 육군 소장)가 참석했다. 현판은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썼다. 그러나 해동사가 완공된 지 55년이 지나도록 정부 지원이나 관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장흥군 문화원 부원장을 지낸 안종복 (72)“8년 전 만수사 보수비용을 받아와 해동사를 함께 보수한 적은 있지만 해동사 만을 위한 시설보수 지원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은 해동사 지원이나 관리강화를 위한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올해부터 대학생들의 해동사 탐방행사를 갖거나 보훈시설 지정을 장흥군 등에 제안할 것을 검토하고 있다. 기념관 관계자는 안 의사의 국내 첫 추모공간인 해동사를 체계적으로 관리해 역사 교육현장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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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육전의 난중일기 남긴 반곡 정경달선생 

이순신 장군의 종사관으로 종횡무진한 정경달 선생

 

 

 

장흥 출신의 명장이자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장군의 종사관으로 종횡무진한 반곡 정경달(盤谷, 丁景達)선생의 ‘육전의 난중일기’가 학계에서 귀중한 자료로 이용하고 있다.

이 난중일기는 임진년(1592) 4월 13일부터 무술년(1598) 2월 17일까지 약 7년동안의 전쟁 기록을 담은 일기에는 당시 평안도 용천, 정주, 곽산에서 난을 맞은 기록이 있어 학계에서는 왜란 당시 남도의 상황을 상세하게 알 수 있는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정경달(丁景達:1542∼1602)선생은 1542년 전남 장흥군 장동면 반산리에서 태어났다.

1570년(선조 3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여 병조정랑, 가평현감, 남원부사, 청주목사, 함경도백, 통정대부에 이르렀으며 본관은 영광, 자는 이회(而晦), 호는 반곡(盤谷), 아버지는 정몽응(丁夢鷹)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산부사로서 의병을 모으고 관찰사 김성일(金誠一), 병마절도사 조대곤(曺大坤)·정기룡(鄭起龍)·이해(李垓) 등과 함께 기략(奇略)을 써서 적을 경북 금오산 전투에서 왜적 415명을 참수하며 크게 승리하였다.

◇정경달 선생의 임진왜란의 활약상을 살펴봤다.

1592년 4월 28일 상주가 함락되자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은 싸움을 포기하고 달아났다. 정경달 선생은 잠시 몸을 피신한 후 흩어져 있는 관군과 군민을 모았다.

지략을 겸비한 군민 허설(許說)과 김유일(金惟一)로 하여금 금오산에 진을 치게 하고 종일 적과 싸워 많은 병기를 노획하였다.

8월에 서산 각암으로 출전하였으며 9월에 감사 학봉 김성일(金誠一)이 전공을 기리는 서찰을 보내왔다.

뒤이어 창석 이준(李埈), 백사 이항복(李恒福), 임당 정유길(鄭惟吉)이 의병을 일으켜 합세하니 10월 15일 선산 의병은 상주 죽현으로 옮겨 진지를 구축하고 지형과 지세를 가리며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17일에는 해평으로 의병 진지를 이동하였다. 11월에는 대둔사(大芚寺)로 이동하여 진지를 구축하였다. 이듬해 2월초에 이준 형제가 이끄는 의병과 합류하여 무등곡에서 적을 섬멸하고 4월에 금오산 도선굴로 돌아왔다.

5월에 김산(金山 김천)에 주둔하니 일 년 간 적을 죽인 것이 수천명 이었고 많은 병기를 노획하였다.

명나라 군의 영남 진격에 따라 각 고을에서 식량을 공급해야 하는데 고을마다 식량이 바닥이 났다.

그래서 정경달이 도선굴에 비축하여 두었던 양곡으로 일부 명나라 군사의 군량미로 충당하니 명나라 장수 유총병(劉總兵)이 식리장군(識理將軍)이라 하며 치하하는 글과 금빛 부채를 주어 선산 의병의 공적을 찬양하였다.

어사 윤경립(尹敬立), 순찰사(巡察使) 김근(金勤)이 선산 의병의 전공을 나라에 알려 크게 치하하는 서찰이 왔다. 선산의 의병 활동은 왜군을 위협하여 조령을 경유하는 주력 부대의 진출을 견제하고 후방을 교란하는 힘이 되었다.

1594년 당시, 장기전이 된 전쟁으로 수군은 굶주림과 역병(疫病)으로 인해 많이 죽어나갔고 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도 손을 쓸 수 없었다.

또한 이순신의 호령이 고을 수령에게 시행되지 않았고, 여러 장수가 서로 화합하지 않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1594년에는 이에 조정에서 명망 있는 문관을 종사관으로 삼아 보낼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마침 유성룡이 이순신 장군의 계청(啓請)을 받아들여 전 부사(府使) 정경달(丁景達) 선생을 이순신 장군의 종사관으로 삼았다.

그는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행정, 징모업무, 군수조달, 시찰, 전령, 명 장수들과의 외교 등을 담당했다.

특히 선산부사(善山府使) 재직시 능력을 발휘한 정경달 선생으로 인해 이순신 장군이 지방에 주둔한 군대의 군량이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병사가 경작하던 토지인 둔전(屯田)을 맡겨 성공을 거두니 병기와 군량이 풍족하고 새로 만든 병선이 배(倍)가 되었다.

조정에 장계를 올리고, 한산도 부근 해평농장, 순천 돌산도 흥양의 도양장(전남 고흥군 도양면 도덕리), 해남의 황원곶(전남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 강진의 화이도(전남 완도군 고금면) 등에서 둔전을 시작하였다.

돌산도는 군관 송성(宋晟), 도양장은 이기남, 화이도와 황원곶은 종사관 전 부사 정경달(丁景達) 선생을 감독으로 보냈다.

또한 항만 내 평탄한 간석지에는 염전을 경영케 하며 도기도 굽게 했고, 해운업의 길도 열어줘 피난민 중 상업가를 지휘하여 무역을 행하는 이도 생겼다.

이렇게 군민이 단결하여 나중에는 양곡, 어염, 포목 할 것 없이 구하지 못하는 것이 없게 돼 저장된 곡식이 수만 석에 달했다. 이순신 장군으로선 일류 병참참모를 곁에 둔 것이었다.

정경달 선생은 이때의 공적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정경달 선생의 아들인 정명열(丁鳴說)도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에게 쌀과 배를 보태고 명량해전에 함께 참전하였다.

정경달 선생은 사후에 예조참판에 증직되었고 선무원종훈에 올랐다. 어찌되었건 그의 부자는 이순신 장군의 뒤에서 병참보급을 훌륭히 지원해, 최상의 전투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한, 최고의 보급참모였다.

1597년 3월 이순신 장군이 원균(元均)의 모함으로 투옥 되자, 정경달(丁景達) 선생은 조정에 나아가

탄원서를 내고 직접 선조 임금을 독대하여 그의 석방을 위해 종횡무진으로 노력하였다.

나이도 이순신 장군보다 3살이나 많았고 높은 벼슬도 먼저 하였건만 아랑곳 하지 않고 솔선수범하며 상사를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1597년 4월경 이순신 장군이 참소를 당해 옥중에 있을 때 공(公)이 서애(西厓) 유성룡, 백사(白沙) 이항복 두 분을 찾아갔더니, 그들이 묻기를, “그대가 남쪽에서 왔으니 원균과 이순신의 옳고 그름(是非)에 대해 말해 줄 수 있겠는가?”라고 하므로, 공(公)이 말하기를, “누가 옳고 그른가는 말로써 해명할 게 아니라, 다만 보니 이순신이 붙잡혀가자 모든 군사들과 백성들이 울부짖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이(李) 공(公)이 죄를 입었으니 이제 우리들은 어떻게 살꼬.” 할뿐이었소. 이것을 보면 그 시비를 알 수 있을 것이오. 라고 대답 하였다.

또한 “이순신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적을 방어하는 재주는 일찍이 그 예를 찾을 수 없다. 장수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기회를 엿보고 정세를 살피는 것을 가지고 싸움을 주저한다고 몰아 죄를 물을 수는 없다. 왕께서 통제사를 죽이게 되면 사직을 잃게 된다”고 임금께 고하였다.

이러한 기록에서 알 수 있듯, 이순신 장군과 정경달 선생은 서로 존경하고 신뢰한 사이였다.

19세기 다산 정약용은 적을 방어한 수령의 모범 사례로 정경달 선생을 높이 평가해 <목민심서> ‘어구(禦寇)’ 항목에 수록했고, 강진 유배시절에는 정경달의 난중일기들을 모아 <반곡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정경달 선생이 남긴 『난중일기』『진법(陳法)』과 『광국공신계회도(光國功臣契會圖)』『흉배(胸背)』『공신록권(功臣錄券)』등이 1988년도에 지방유형문화재 제164호로 지정되었다.

장동면 반산리 반계사에 배향되었다. 반계사에 모셔진 조선 선조 때의 정경달(1542∼1602)선생의 관련된 자료들이다.

반계사는 숙종 40년(1714)에 영광 정씨 문중이 중심이 되어 건립한 것으로, 영광 정씨의 정인걸, 정경달, 정명설, 정남일 네 사람과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큰 공을 세운 이순신, 임영립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건물이다.

고종 5년(1868) 훼손 되었던 것을 1957년 지금의 자리에 강당을 새로 짓고, 1959년에 탑을 세워 사우로서의 기능을 대신케 하였다.

유물과 유품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반곡의 『난중일기』는 정경달 선생이 임진왜란 초에 참전했던 일기와 명군접반사로 재직할 당시의 일기로, 제2의 ‘난중일기’로 평가되고 있다.

필사본 『반곡일기』하권 1책과『반곡년기』1책이 여기에 해당한다. 본래 정경달 선생의『난중일기』는 2책이었으나 선조 31년(1598)부터 1602년까지의 내용만이 현재 남아있다. 이를 순조 15년(1815) 정약용 선생이『반곡집』에 수록하였다.

진법은 옛 책의 필사본으로 채색된 진법도가 함께 들어 있다. 군영, 군률, 진법이 그림으로 수록되어 있어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군의 전략, 전술을 살피는데 도움이 된다.

광군공신계회도는 구전으로 궁궐도라 불려져 왔던 계회도인데 비단 바탕에 채색하였으며, 상태가 심하게 훼손되었다. 이 공신계회도는 선조 24년(1591)의 것으로 윗쪽 반면에 어전 건물 및 참여 인물도가 있고 하단에는 공신 14명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흉배는 2매로 정경달의 관복유품이며, 학배이다. 공신녹권은 공이 있는 신하에게 나라에서 공신으로 임명하여 내리는 인정서로, 「광국원종공신록권」은 1591년에 발행된 것으로 1책이며, 「선무원종공신록권」은 1603년에 발행되었으며, 1책이다. 그 외에 1760년의 「호남갑자막의록」과 「불갑사간」1책, 교지 등 다수의 고문서 자료가 있다.

참고로 정경달 선생과 같이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활약했던 장흥출신은 마하수(馬河秀), 김몽성(金夢成), 선세신(宣世臣), 신용범(申龍虎), 신용준(申龍俊), 임영립(林英立), 김성원(金聲遠) 마성룡(馬成龍), 마위용(馬爲龍), 박은복(朴銀福) 등이다.

 

http://www.jgy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4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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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백산재 (長興 栢山齋)

종 목 문화재자료 제272호
명 칭 장흥백산재 (長興 栢山齋)
분 류 유적건조물/정치국방/궁궐·관아/관아
수량/면적 정면 6칸, 843㎡
지정(등록)일 2009-03-20
시 대 조선시대

장흥 백산재는 문중재실이다가 장흥위씨 문중의 사우인 하산사(霞山祠)의 강당으로 함께 활용되고 있는 건물이다. 원래 조선후기 장흥부의 관아건물을 2차 이건을 통해 1936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온 것이다. 당시 이건 과정에서는 거의 원형 그대로 옮겼다고 전하고 있다. 백산재는 건축 부재나 결구수법 등으로 보아 조선후기인 19세기경의 건물로 보인다.
건물은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된 본 건물은 비록 이축과정에서 다소 변형된 구조 기법을 보이기는 하나 넓은 대청과 온돌방 등 조선후기 관아건물 구조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대들보 등 사용부재도 매우 장대하고 견실하며 기둥은 모두 두리기둥을 사용하였다. 기둥은 5량가구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백산재는 조선시대의 행정관아의 건물이 거의 없는 터에 보존이 잘 되어 있어서 관아 건물 연구 자료에 도움이 되고 장흥부 관아의 복원 측면, 공공기관 건물이 장소와 시간의 변화에 따라 용도가 변화되는 점을 알 수 있는 측면 등에서 건축 및 역사적 가치가 있다.

 

자료출처: http://search.cha.go.kr/srch_org/search/search_top.jsp?home=total&subHome=0&sort=&searchField=&page=1&query=%EB%B0%B1%EC%82%B0%EC%9E%AC

https://blog.naver.com/mallarmel/10120758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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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탑산사지금동여래입상 (長興 塔山寺址 金銅如來立像)

종 목 문화재자료 제270호
명 칭 장흥탑산사지금동여래입상 (長興 塔山寺址 金銅如來立像)
분 류 유물/불교조각/금속조/불상
수량/면적 1점
지정(등록)일 2008-12-26
시 대 삼국시대

장흥 탑산사지금동여래입상은 대좌부분이 떨어져나갔지만 불신과 대좌가 같은 개체임이 금속성분 분석 결과 확인된 것이다. 불상의 외모상에서 나타난 양식의 특징 또한 7세기경 삼국시대의 전통적인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계란형의 얼굴과 사발형의 육계, 행인형의 눈두덩, 길게 내려온 U자형 대의주름, 7~8세기경 유행한 시무외, 여원인의 수인 등이 모두 고졸한 양식임을 알 수 있다.
더구나 금동불상 대좌 하단의 평면이 7각인 점도 주목된다. 불신과 대좌가 분리되어 있다는 결함이 있긴 하나 같은 동체임이 확인되었으며 연대 또한 7세기후반 늦어도 8세기 초반에 걸쳐있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자료출처: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31,02700000,36&pageNo=5_2_1_0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3&aid=0002467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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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덕암리암각매향명 (長興德巖里巖刻埋香銘)

종 목

문화재자료 제252호

명 칭

장흥덕암리암각매향명 (長興德巖里巖刻埋香銘)

분 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수량/면적

일원(100㎡)

지정(등록)일

2004-09-20

시 대

조선시대

장흥 덕암리 암각매향명은 조선시대 초기(1435년, 세종 17)의 매향사실을 기록한 비석이다.
매향(埋香)이란 향나무(香木)를 묻는 민간불교 신앙의례이다. 향나무를 민물과 갯물이 만나는 지역에 오래 묻었다가 약재나 불교의식용으로 썼으며, 그 매향의 시기와 장소, 관련 인물들을 기록한 것이 매향비(또는 암각)이다.
자연암반에 음각된 매향의 명문 순서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새겨져 있어 통례적인 오른쪽에서부터 읽는 것과 다르다. 글자수는 총 6행 21자로 되어 있다. 자형(字形)은 아주 정서(精書)된 것 같지는 않고 투박한 편이다. 그 내용은 '1435년 10월에 많은 사람이 발원하여 남남동향에 (향목을)묻어 두었는데 주도한 향도는 홍신이다.'라고 정리할 수 있다.
장흥 덕암리 암각매향명은 조선초기(태종∼세종대)에 억불정책이 가장 심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의식이 촌락사회에서 계속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자료로서 조선시대 불교사, 사회사, 향촌문화 연구에 매우 귀한 자료가 되고 있다.

 

자료출처: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5_2_1_0&ccbaCpno=34136025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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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탑산사지석등 (長興塔山寺址石燈)

종 목 문화재자료 제196호
명 칭 장흥탑산사지석등 (長興塔山寺址石燈)
분 류 유적건조물/종교신앙/불교/석등
수량/면적 1기
지정(등록)일 1994-12-05
시 대 미분류

탑산사터에서 위쪽으로 1km쯤 오르다 보면 이 석등을 만나게 된다.
석등은 일반적으로 등불을 켜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3단의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려 놓는데, 이 석등은 현재 받침의 일부와 화사석이 없어진 상태이다. 남아있는 아래받침돌, 가운데기둥, 지붕돌은 모두 8각을 이루고 있으며, 아래받침돌은 윗면에 8잎의 연꽃무늬를 두었다. 지붕돌은 윗면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데, 처마의 윗선과 여덟 모서리선이 밋밋한 곡선을 이루고 있다.
고려 전기에 세운 것으로 추측되며, 비록 거의 절반정도가 없어지기는 하였으나, 현재 해남 대둔사로 옮긴 탑산사동종(보물 제88호)과 함께 옛 탑산사의 불교조각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자료출처: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31,01960000,36&pageNo=5_2_1_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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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석불좌상 (彌勒寺石佛坐像)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196호
명 칭 미륵사석불좌상 (彌勒寺石佛坐像)
분 류 유물/불교조각/석조/불상
수량/면적 1구(軀)
지정(등록)일 2002-11-15
시 대 고려시대

이 불상은 1930년대까지 야산의 산 속에 묻혀 머리부분만 노출되어 있던 것을 그 후 미륵사의 법당 안에 모셔 봉안하고 있다. 거대한 자연석을 다듬어 앞부분에는 불상을 조각하고 뒷면은 조각없이 그대로 처리하였는데, 높이 280㎝, 어깨폭 148㎝, 앉은 높이가 3m에 달하는 거불(巨佛)이다.
워낙 거대한 자연석을 이용하여 조각하여서인지 전체적으로 둔중한 느낌을 주는 한편 얼굴과 옷자락의 조각은 사실적인 수법을 보여준다.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고, 소라 모양의 머리칼인 나발이 표현된 흔적이 있으나 현재는 많이 마멸되었다.
신체는 어깨가 넓어 장대한 편이며, 오른쪽 무릎 아래부분이 일부 떨어져 나갔다. 양어깨에 걸쳐 흘러내린 평행의 옷주름은 무릎 아래까지 유려한 옷주름을 이루고 있으며, 드러난 가슴 사이로는 군의를 묶은 띠가 표현되었다. 손 모양은 오른손은 배 부근으로 모아 손가락을 펴고 있으며 왼손은 옷자락을 잡고 있으나 손가락이 떨어져 나갔다. 결가부좌한 왼쪽 다리의 아래 부분도 일부 떨어져 나갔다.
이 불상은 거대한 자연석을 이용하여 조각한 석불로서, 특히 고려 전기에 조성된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보물 제48호)과 유사성을 보여준다. 즉 거대한 신체표현이라든가 다소 살찐 듯한 양감이 풍부한 얼굴, 큼직한 이목구비의 표현, 유려하게 표현된 평행 옷주름 등에서 북미륵암 불상과 유사하지만 조각수법이 다소 투박하고 괴체화된 점에서 고려시대 후기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자료출처: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21,01960000,35&pageNo=5_2_1_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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