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문화원

전통문화의 보고 ‘방촌마을’...名山 정기 받아 길게 흥하다

 

깨끗하게 잘 정리된 신와고택 안채 뒤툇마루. 튀어나온 큰 바위 때문에 안채와 사랑채의 좌향이 조금 어긋나게 됐다고 한다.

 

방촌(傍村)은 통일신라 때 정안현, 고려 때 장흥부의 치소였다. 조선조에 장흥 위씨가 들어와 살기 시작해, 오늘날 12뜸에 위씨 110가구가 살고 있다. 작은 마을에 팔경이라면 과한 느낌인데, 방촌 팔경 두 대목만 소개한다. 2경 상잠만하(觴岑晩霞), 저녁밥 짓는 연기가 방촌의 주산 상잠산에 띠 허리를 두른다. 8경 금당귀범(錦塘歸帆), 고깃배가 해질녘 황혼의 기운을 받고 만선으로 돌아온다. 풍요로운 고장이다. 장흥 관산읍은 고려 말 원나라가 왜를 정벌할 때 조선소였다. 천관산의 아름드리 소나무를 수 만 그루 베어 신월마을에서 900척 전선을 짓고, 군마등, 마장골에서 군마를 훈련시켰다. 조선조 들어 신월마을은 염전이 되어 부를 창출하니, 문자 그대로 장흥(長興, 길게 흥하다)이다. 장흥군 관산읍 방촌마을의 주산은 상잠산, 멀리 천관산을 바라본다. 천관산은 지리산, 내장산, 월출산, 변산과 함께 호남 5대 명산으로 꼽힌다. 천자의 면류관 닮았다는 설도 있고, 삼국 통일의 영웅 김유신의 첫 사랑인 기생 천관에서 연유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버림받은 천관이 머리 깎고 옛 애인 잘 되기 빌던 자리라는 것이다. 기생 천관설이 훨씬 애달프고 가슴 저민다.

■ ‘존재 고택’과 외로운 실학자 존재 위백규… 정약용 선생은 위백규에게 영감을 얻었나?
존재(存齋) 고택은 방촌마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아, 경관이 아름답고 여름에 시원하다. 18세기 지어졌다는데, 대문간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앙증맞은 별당 겸 서재가 백미다. 안마당으로부터 돌아앉았다고 표현해야 좋은 좌향이다. 남과 동에 퇴를 두고, 각각 영이재(詠而齋) 위덕문, 존재(存齋) 위백규 부자의 호를 당호 편액으로 내 걸었다. 별당 지붕은 반쪽은 팔작지붕이고 다른 반쪽은 안채 지붕과 겹치지 않게 맞배지붕의 특이한 구조다.

고택의 주인공은 단연 실학자 존재 위백규다. 만언봉사, 정현신보(政絃新譜)에서 존재는 제도의 취지와 연혁, 폐단과 부작용을 예를 들어 설명하고 대책을 논했다. 존재는 학교, 용인(用人), 군현, 조운, 전결, 관직, 노비, 공물(貢物) 등 30여 분야에 걸쳐 문제를 진단하고 처방을 제시했다. 여유당 정약용 선생의 경세유표를 연상케 해 흥미롭다.

더 재미난 것은 존재가 <茶山書堂>을 열어 시골 아이들을 가르쳤고, 여유당과 학문적 대화를 나눈 백련사 혜장스님과도 교분이 깊었다는 사실이다. 혹시나 여유당이 직, 간접적으로 존재에게서 영감을 얻지는 않았을까, 발칙한 생각을 해 본다. (여유당의 어떤 저술에도 존재에 대한 언급은 없다.)

존재고택의 툇마루. 남도에서도 바다에 면한 지역에서는 툇마루를 널찍하게 잡아 햇살도 피하고 비도 피하면서 시원한 공간을 확보했다.

 

■ 질서와 조화의 ‘죽헌 고택’… 여유로운 남도의 삶 ‘신와 고택’
죽헌(竹軒) 고택은 담장과 사랑채, 안채의 지붕면이 위계(位階) 있고 정연하다. 집 앞 계단을 올라 서향한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다시 높은 계단이 눈앞을 막는다. 계단을 직진하면 안채로 통하는 문간채요, 사랑채는 왼쪽 쪽문으로 꺾어야 한다. 직진하면 사랑채, 꺾으면 안채의 일반적인 배치와는 사뭇 다르다. 대문, 안채문, 안채가 동일 축선상이니, 다분히 안채 중심의 건축이다.

쪽문으로 사랑채에 들어서면 잘 꾸며진 일본풍의 음지 정원이다. 북쪽으로 연못을 파고 섬을 만들어 양지 식물을 심었다. 사랑채는 4칸 전후툇집으로 전면 처마를 길게 빼내 여름철 저녁 햇살을 가리고, 북쪽에 누마루를 들였다. 사랑채 높은 툇마루에 앉으면 멀리 천관산 환희대가 눈에 들어온다. 조경(造景)과 차경(借景)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남도 고택은 좌향과 상관없이 퇴가 영남이나 경기보다 퇴의 폭이 2배 가까이 넓다. 서향이 많은 방촌만이 아니라 북향인 영광 연안 김씨 종택도 마찬가지다. 햇살도 피하고 잦은 큰비도 피하지만, 덥고 답답한 방보다 마루가 쾌적하지 않을까?

신와고택은 위영형(魏榮馨)이 처음 터잡고, 손자 신와(新窩) 위준식이 고쳐 지금의 형태가 됐다. 안채, 사랑채, 사당, 곳간채, 헛간채, 문간채 등 6동으로 당당한 살림을 과시한다. 공동우물을 연상케 할 정도로 널찍한 우물과 어린이 놀이터로 쓰이던 문간채 다락, 사랑채(정면 5칸)보다 훨씬 크고 웅장한 안채(정면 6칸)가 특징이다. 위기환 씨(72)는 거대한 바위를 피해 안채를 들이다 보니 안채와 사랑채의 좌향이 약간 비스듬해졌다고 설명한다.

겹처마를 길게 달아 서향집 특유의 따가운 저녁햇살을 가리고, 남도의 잦은 비도 피할 수 있게 한 죽헌고택 사랑채. 전통시대라면 겹처마는 일반 민가에서는 쉽게 쓰지 않는 대담한 수법이었을 것이다. 활주 역시 일반 민가에서 쉽게 보기 어려운 수법이다.

 

■인간과 공간의 공진화 ‘오헌고택’… 국난 극복과 판서공파의 전통
오헌(梧軒) 고택은 오헌 위계룡이 중건한 전통가옥이다. 원래 원취당 위도순이 자리 잡았는데, 사랑채에는 세거 인물의 아호 겸 건물의 당호가 편액으로 나란히 걸려 인간과 공간의 공진화(共進化)를 보여준다. 翠軒(읍취헌), 願醉(원취), 素庵(소암), 壺亭(호정), 春坡(춘파), 梧軒(오헌), 後溪(후계), 壺谷(호곡), 觴山(상산)…….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는 의주로 피난을 간다. 명색이 임금의 피난인데, 호종팀이 서애 유성룡 등 십여 명에 불과했다. 먹을 것이 떨어져 갓 무과급제한 말단 무관이 민가에서 서숙밥을 구해 바쳤다. 선조가 ‘정말로 맛있는 밥을 구해왔다’고 치하하고 즉석에서 언양 현감에 제수한다. 그 무관은 임란 호종으로 공훈록에 두 번 등재되고, 호조판서에 추증된다. 판서공 위덕화의 유래다. 판서공 종택은 안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 창고 등 여덟 채가 입 구(口)자를 이룬다. 1624년 지었다는 사당의 쇠꺾쇠는 녹았지만, 밤나무 기둥은 아직 생생하다. 해마다 음력 10월 중순, 전국의 장흥 위씨가 방촌으로 몰려들어 2박 3일 시제를 지내고 계취를 즐기며 우의를 다진다. 볼 만 하겠다.
 

오헌고택 입구는 무겁고 폐쇄적으로 보이지만, 거기 사는 이들은 매우 개방적이고 친절하다.

 

김구철 시민기자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출처_[명가와 고택을 찾아서] 14. 전남 장흥, 존재-신와-오헌 고택 - 경기일보 - 1등 유료부수, 경기·인천 대표신문 (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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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백산재 (長興 栢山齋)

종 목 문화재자료 제272호
명 칭 장흥백산재 (長興 栢山齋)
분 류 유적건조물/정치국방/궁궐·관아/관아
수량/면적 정면 6칸, 843㎡
지정(등록)일 2009-03-20
시 대 조선시대

장흥 백산재는 문중재실이다가 장흥위씨 문중의 사우인 하산사(霞山祠)의 강당으로 함께 활용되고 있는 건물이다. 원래 조선후기 장흥부의 관아건물을 2차 이건을 통해 1936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온 것이다. 당시 이건 과정에서는 거의 원형 그대로 옮겼다고 전하고 있다. 백산재는 건축 부재나 결구수법 등으로 보아 조선후기인 19세기경의 건물로 보인다.
건물은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된 본 건물은 비록 이축과정에서 다소 변형된 구조 기법을 보이기는 하나 넓은 대청과 온돌방 등 조선후기 관아건물 구조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대들보 등 사용부재도 매우 장대하고 견실하며 기둥은 모두 두리기둥을 사용하였다. 기둥은 5량가구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백산재는 조선시대의 행정관아의 건물이 거의 없는 터에 보존이 잘 되어 있어서 관아 건물 연구 자료에 도움이 되고 장흥부 관아의 복원 측면, 공공기관 건물이 장소와 시간의 변화에 따라 용도가 변화되는 점을 알 수 있는 측면 등에서 건축 및 역사적 가치가 있다.

 

자료출처: http://search.cha.go.kr/srch_org/search/search_top.jsp?home=total&subHome=0&sort=&searchField=&page=1&query=%EB%B0%B1%EC%82%B0%EC%9E%AC

https://blog.naver.com/mallarmel/10120758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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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탑산사지금동여래입상 (長興 塔山寺址 金銅如來立像)

종 목 문화재자료 제270호
명 칭 장흥탑산사지금동여래입상 (長興 塔山寺址 金銅如來立像)
분 류 유물/불교조각/금속조/불상
수량/면적 1점
지정(등록)일 2008-12-26
시 대 삼국시대

장흥 탑산사지금동여래입상은 대좌부분이 떨어져나갔지만 불신과 대좌가 같은 개체임이 금속성분 분석 결과 확인된 것이다. 불상의 외모상에서 나타난 양식의 특징 또한 7세기경 삼국시대의 전통적인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계란형의 얼굴과 사발형의 육계, 행인형의 눈두덩, 길게 내려온 U자형 대의주름, 7~8세기경 유행한 시무외, 여원인의 수인 등이 모두 고졸한 양식임을 알 수 있다.
더구나 금동불상 대좌 하단의 평면이 7각인 점도 주목된다. 불신과 대좌가 분리되어 있다는 결함이 있긴 하나 같은 동체임이 확인되었으며 연대 또한 7세기후반 늦어도 8세기 초반에 걸쳐있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자료출처: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31,02700000,36&pageNo=5_2_1_0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3&aid=0002467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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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덕암리암각매향명 (長興德巖里巖刻埋香銘)

종 목

문화재자료 제252호

명 칭

장흥덕암리암각매향명 (長興德巖里巖刻埋香銘)

분 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수량/면적

일원(100㎡)

지정(등록)일

2004-09-20

시 대

조선시대

장흥 덕암리 암각매향명은 조선시대 초기(1435년, 세종 17)의 매향사실을 기록한 비석이다.
매향(埋香)이란 향나무(香木)를 묻는 민간불교 신앙의례이다. 향나무를 민물과 갯물이 만나는 지역에 오래 묻었다가 약재나 불교의식용으로 썼으며, 그 매향의 시기와 장소, 관련 인물들을 기록한 것이 매향비(또는 암각)이다.
자연암반에 음각된 매향의 명문 순서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새겨져 있어 통례적인 오른쪽에서부터 읽는 것과 다르다. 글자수는 총 6행 21자로 되어 있다. 자형(字形)은 아주 정서(精書)된 것 같지는 않고 투박한 편이다. 그 내용은 '1435년 10월에 많은 사람이 발원하여 남남동향에 (향목을)묻어 두었는데 주도한 향도는 홍신이다.'라고 정리할 수 있다.
장흥 덕암리 암각매향명은 조선초기(태종∼세종대)에 억불정책이 가장 심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의식이 촌락사회에서 계속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자료로서 조선시대 불교사, 사회사, 향촌문화 연구에 매우 귀한 자료가 되고 있다.

 

자료출처: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5_2_1_0&ccbaCpno=34136025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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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탑산사지석등 (長興塔山寺址石燈)

종 목 문화재자료 제196호
명 칭 장흥탑산사지석등 (長興塔山寺址石燈)
분 류 유적건조물/종교신앙/불교/석등
수량/면적 1기
지정(등록)일 1994-12-05
시 대 미분류

탑산사터에서 위쪽으로 1km쯤 오르다 보면 이 석등을 만나게 된다.
석등은 일반적으로 등불을 켜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3단의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려 놓는데, 이 석등은 현재 받침의 일부와 화사석이 없어진 상태이다. 남아있는 아래받침돌, 가운데기둥, 지붕돌은 모두 8각을 이루고 있으며, 아래받침돌은 윗면에 8잎의 연꽃무늬를 두었다. 지붕돌은 윗면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데, 처마의 윗선과 여덟 모서리선이 밋밋한 곡선을 이루고 있다.
고려 전기에 세운 것으로 추측되며, 비록 거의 절반정도가 없어지기는 하였으나, 현재 해남 대둔사로 옮긴 탑산사동종(보물 제88호)과 함께 옛 탑산사의 불교조각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자료출처: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31,01960000,36&pageNo=5_2_1_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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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석불좌상 (彌勒寺石佛坐像)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196호
명 칭 미륵사석불좌상 (彌勒寺石佛坐像)
분 류 유물/불교조각/석조/불상
수량/면적 1구(軀)
지정(등록)일 2002-11-15
시 대 고려시대

이 불상은 1930년대까지 야산의 산 속에 묻혀 머리부분만 노출되어 있던 것을 그 후 미륵사의 법당 안에 모셔 봉안하고 있다. 거대한 자연석을 다듬어 앞부분에는 불상을 조각하고 뒷면은 조각없이 그대로 처리하였는데, 높이 280㎝, 어깨폭 148㎝, 앉은 높이가 3m에 달하는 거불(巨佛)이다.
워낙 거대한 자연석을 이용하여 조각하여서인지 전체적으로 둔중한 느낌을 주는 한편 얼굴과 옷자락의 조각은 사실적인 수법을 보여준다.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고, 소라 모양의 머리칼인 나발이 표현된 흔적이 있으나 현재는 많이 마멸되었다.
신체는 어깨가 넓어 장대한 편이며, 오른쪽 무릎 아래부분이 일부 떨어져 나갔다. 양어깨에 걸쳐 흘러내린 평행의 옷주름은 무릎 아래까지 유려한 옷주름을 이루고 있으며, 드러난 가슴 사이로는 군의를 묶은 띠가 표현되었다. 손 모양은 오른손은 배 부근으로 모아 손가락을 펴고 있으며 왼손은 옷자락을 잡고 있으나 손가락이 떨어져 나갔다. 결가부좌한 왼쪽 다리의 아래 부분도 일부 떨어져 나갔다.
이 불상은 거대한 자연석을 이용하여 조각한 석불로서, 특히 고려 전기에 조성된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보물 제48호)과 유사성을 보여준다. 즉 거대한 신체표현이라든가 다소 살찐 듯한 양감이 풍부한 얼굴, 큼직한 이목구비의 표현, 유려하게 표현된 평행 옷주름 등에서 북미륵암 불상과 유사하지만 조각수법이 다소 투박하고 괴체화된 점에서 고려시대 후기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자료출처: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21,01960000,35&pageNo=5_2_1_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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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정 (冬柏亭)

종 목 문화재자료 제169호
명 칭 동백정 (冬柏亭)
분 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조경건축/누정
수량/면적 1동
지정(등록)일 1988-12-21
시 대 미분류

장동면 장항마을 옆으로 흐르는 강가의 동산에 자리잡고 있는 정자이다.
조선 숙종 41년(1715)경부터 마을 사람들이 참석한 대동계의 집회소로 이용하던 마을 정자이다.
처음 지은 것은 세조 4년(1458) 동촌 김린(1392∼1474)이 관직에서 은퇴한 뒤, 은거하기 위해 지은 가정사(假亭舍)로부터 시작된다.
가정사는 선조 17년(1584) 후손인 김성장이 고쳐 지었고 김린이 심어 놓았던 동백나무가 울창하여 정자의 이름을 ‘동백정’이라 고쳤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85년 후손들이 다시 고쳐 지은 것이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였는데, 1985년 다시 고쳐 지을 때 옆면에 1칸을 더 내어 현재는 앞면이 4칸인 형태가 되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구성은 왼쪽부터 앞면에 누마루 1칸, 뒷면에 방 1칸, 가운데칸은 앞뒤로 툇마루를 두고 중앙에 방 1칸, 그리고 끝으로는 계속 마루를 설치하여 정자 치고는 다소 복잡한 구조이다.
해마다 정월 보름이면 인근 주민들이 모여 강에서 별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자료출처: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31,01690000,36&pageNo=5_2_1_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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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고영완가옥[]

지정종목

문화재자료

지정번호

전남문화재자료 제161호

지정일

1988년 03월 16일

시대

조선

종류/분류

가옥

 

1988년 3월 16일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161호로 지정되었다. 고영완의 할아버지 고재극이 1852년 건립하였다. 원래 이곳에는 정화사()라는 절이 있어 정화사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자형 겹집으로 남부지방에 흔한 목조 기와집이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에 전퇴를 둔 목조 기와 팔작지붕집이다. 1m 가량의 높은 축대 위에 외벌대의 기단으로 자리를 잡고 다듬은 원형 주춧돌을 놓았으며 바깥기둥인 평주()는 원형으로, 안기둥인 고주()는 사각으로 세웠다. 기둥 위에는 첨차와 소로, 보아지, 주두 등으로 결구하였으며 그 위에는 다시 장혀와 팔각형 도리를 얹어서 서까래를 받쳤다.
양쪽 고주를 대들보로 연결하였고 그 위에 동자주를 세우고 중종보를 얹었으며 다시 판대공을 얹고 위에다 장혀와 종도리를 놓아 지붕을 받쳤다. 가구()는 2고주반() 8량가()로 전형적인 주거 건축이나 주택의 뒷면에 툇간없이 전퇴 부분만 이용하여 툇마루를 깔았다.
마을의 정면에는 장흥군 수목군락지로 지정되어 있는 고영완 소유의 원림이 있다. 원림에는 연못이 있고 가운데는 섬이 있으며 둘레에는 소나무·느티나무·배롱나무·대나무 등이 숲을 이룬다. 수목군락지를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남쪽에 낮은 산이 있는데 그 앞에 본채가 북향으로 서 있다. 경사가 급한 대지에 건축되어서 기단이 3단으로 되어 있다. 제일 아래에는 대문과 하인 방을, 그 다음 단에는 마당·창고·관리사를, 맨 윗단에는 본채·양옥(예전에는 재실이었다고 함)을 배치하였다.

 

자료출처:[네이버 지식백과] 장흥 고영완가옥 [長興高永完家屋]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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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흥회령진성 (長興會寧鎭城)

 

종 목

문화재자료 제144호

명 칭

장흥회령진성 (長興會寧鎭城)

분 류

유적건조물/정치국방/성/성곽

수량/면적

일원

지정(등록)일

1987-01-15

시 대

미분류

 

장흥군 회진면 회진리 마을의 뒷산을 이용하여 쌓은 부정형 성으로. 현재는 육지에 이어진 덕도와 노력도, 대마도 등의 섬들로 둘러싸여 있다. 회령진성은 성종 21년(1490) 4월에 쌓은 만호진 성으로 남해에 출몰하는 왜구를 소탕하는 수군진이었다.
회령진이 처음 설치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조선 초기에 진이 설치되었다. 전쟁시에는 수군의 집결장소로 사용되었고, 평상시에는 군량과 군기를 쌓아두는 보급기지의 역할을 하였다.
남아있는 성벽의 총 길이는 616m이며, 동벽은 벼랑 위에 쌓았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졌고, 다만 동문터가 확인되었다.
북벽은 높이 2.3∼2.5m, 너비 1.5∼2m로, 돌로 쌓은 성벽 150m와 흙과 돌을 섞어 새로 쌓은 성벽 220m로 이루어져 있으며, 너비 4.4m의 북문터가 남아있다. 서벽은 흙과 돌을 섞어 쌓았는데, 지금 안쪽높이 2m, 밖높이 3.5m, 너비 2.2m, 길이 122m 정도이다. 남벽은 대부분 없어지고 길이 40m, 너비 2∼4m 정도의 석축이 남아있을 뿐이다.

 

자료출처: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31,01440000,36&pageNo=5_2_1_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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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산재 (月山齋)

종 목 문화재자료 제69호
명 칭 영석재 (永錫齋)
분 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사우
수량/면적 일곽
지정(등록)일 1984-02-29
시 대 미분류

월산재는 영광 김씨들이 중심이 되어 후손들의 교육과 인재양성을 위해 조선 순조 4년(1824)에 지은 건물이다. 사당인 용강자, 강당인 월산재, 내삼문, 외삼문, 관리사, 창고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적인 모습은 가장 윗부분에 용강사가 있고 아래로 월산재가 있으며 월산재 앞으로 관리사와 창고가 대칭으로 자리잡고 있다.
고종 19년(1882)에 사림들이 지은 용강사는 나옹 김광범·우수당 김성범·죽옹 김정서·우수 김상범·학남 김정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앞면 3칸·옆면 1칸 크기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규모가 큰 편인 월산재는 앞면 6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인데, 현재는 강당으로 쓰인다.

 

자료출처: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31,00730000,36&pageNo=5_2_1_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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