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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고문집(DB)49

[DB] 고문집 번역현황 및 총괄 (2017년~2022년) ■ 문림의향 장흥 고전국역총서 목록 (2017년~2022년) 1. 계서유고(溪西遺稿), 2017 2. 만수재유고(晩守齋遺稿), 2018 3. 청강유집(淸江遺集), 2019 4. 제암집(霽岩集), 2019 5. 방호선생문집(放湖先生文集), 2020 6. 간암선생문집(艮庵先生文集), 2020 7. 운암선생문집(雲巖先生文集), 2021 8. 송포유고(松浦遺稿), 2021 9. 반계사진법(盤谿祠陳法), 2021 10. 헌헌헌선생문집(軒軒軒先生文集), 2022 11. 사복재집(思復齋集), 2022 ■ 고문집 국역사업 개요 (2017년~2022년) ○ 사업명 : 제1차 정남진 고문집 국역사업 발간(2017) - 대상문집 : 계서유고(溪西遺稿) - 서지사항 : 5권 2책, 목활자본 - 관련인물 : 백진항(白鎭恒, 1.. 2023. 1. 25.
[사복재집] 표지 및 설명 송진봉 宋鎭鳳 (헌종6년1840~광무2년1898)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치승(致承). 호는 사복재(思復齋). 아버지는 송경옥(宋景玉)이며, 어머니는 언양김씨(彦陽金氏)로 김상수(金尙修)의 딸이다. 처음 이희석(李僖錫)에게 수학하고, 뒤에 김평묵(金平默)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명리를 따르지 않고 오로지 학문을 익히는 데에만 전념하여 여러 지구(知舊) 등과 강수계(講修契)를 세우고, 그의 고조부인 송익호(宋翼顥)가 지은 「추연백록동규(推演白鹿洞規)」를 강규(講規)로 삼고 강마(講磨)하는 데 힘썼다. 1888년(고종 25)에는 가평의 조종암(朝宗巖)을 내왕하면서 당시에 이름난 최익현(崔益鉉)·유중교(柳重敎) 등 여러 홍유(鴻儒)들과 교유하여 더욱 학문을 익혔다. 1895년에 을미사변이 일어나 안팎으로 .. 2022. 10. 31.
[사복재집]_1책 天 1p~34p 2022. 10. 31.
[사복재집]_1책 天 35p~74p 2022. 10. 31.
[사복재집]_1책 天 75p~107p 2022. 10. 31.
[사복재집]_1책 天 108p~136p 2022. 10. 31.
[사복재집]_2책 地 1p~30p 2022. 10. 31.
[사복재집]_2책 地 31p~61p 2022. 10. 31.
[사복재집]_2책 地 62p~81p 2022. 10. 31.
[사복재집]_2책 地 82p~112p 2022. 10. 31.
[사복재집]_3책 人 1p~27p 2022. 10. 31.
[사복재집]_3책 人 28p~54p 2022. 10. 31.
[사복재집]_3책 人 55p~79p 2022. 10. 31.
[사복재집]_3책 人 80p~111p 2022. 10. 31.
[사복재집]_3책 人 112p~134p 2022. 10. 31.
[헌헌헌유고] 표지 및 설명 ⟦軒軒軒先生文集⟧ 김여중 金汝重(명종11년1556~인조8년1630) 향년 75 조선 중기 의병장 ‧ 공신. 字는 자임(子任)이고, 號는 헌헌헌(軒軒軒)이다. 본관은 靈光이며 전라도 장흥부 남면방 금화(全羅道 長興府 南面坊 金華) 392번지에서 살았다. 고사 터 유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증조부는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월봉(月峯) 김광원(金光遠), 조부는 형조좌랑(刑曹佐郞) 김귀수(金龜壽)이다. 생부는 사근도 찰방(沙斤道察訪) 김척(金惕)이고 양부는 부사과(副司果) 김열(金悅)이다. 配는 貞敬夫人 竹山安氏 縣監 安彦龍의 딸이다. 젊어서는 領議政에 오른 思庵 朴淳에게 수업했다. 36세 때(선조24년1591) 辛卯 式年試 [進士] 1等 2位(2/100)했다. 우수한 성적이었으나 관직(官職)에 나아가지 않고 공.. 2022. 8. 24.
[헌헌헌유고] 1p~27p 2022. 8. 24.
[헌헌헌유고] 28p~52p 2022. 8. 24.
[자료]운암 정두흠(雲巖 鄭斗欽) 선생(1832~1910) 운암 정두흠(雲巖 鄭斗欽) 선생(1) 예강칼럼(17)/박형상/변호사 승인 2018.05.04 11:58:22 운암 정두흠(1832~1910), 진주 鄭씨, 자 ‘응칠’로 유치 운월리 출신이다. 젊은 날에 능주 ‘개천사’ 등에서 공부하였고, 장흥부사 ‘김기석’의 눈에 띄었다. 16세에 남주독보(南州獨步)로 칭송받았으나, 1879년(48세)에 문과(을과7위)급제하였고, 1887년에 사헌부 지평, 종묘대제 대축관 등을 지냈다. 1892년(61세)에 ‘乞해골’로 사직을 구하고, ’歸田辭(귀전사)’와 더불어 은퇴하였다. 고향 운월리에 ‘망화대(望華臺), 망화정’을 세우고, 한양 조정과 나라를 걱정하며 인근에서 모인 제자들을 가르쳤다. 아마 운암(雲巖)선생이 역대 장흥출신들 중 중앙무대에 가장 접근하신 것으로 여겨.. 2022. 8. 17.
[운암집]_1권 표지, 1p~ 11p 2022. 8.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