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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고문집(DB)/■사복재집(思復齋集)원문

[사복재집] 표지 및 설명

by 장흥문화원 관리자 2022. 10. 31.

 

송진봉 宋鎭鳳 (헌종6년1840~광무2년1898)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치승(致承). 호는 사복재(思復齋). 아버지는 송경옥(宋景玉)이며, 어머니는 언양김씨(彦陽金氏)로 김상수(金尙修)의 딸이다. 처음 이희석(李僖錫)에게 수학하고, 뒤에 김평묵(金平默)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명리를 따르지 않고 오로지 학문을 익히는 데에만 전념하여 여러 지구(知舊) 등과 강수계(講修契)를 세우고, 그의 고조부인 송익호(宋翼顥)가 지은 「추연백록동규(推演白鹿洞規)」를 강규(講規)로 삼고 강마(講磨)하는 데 힘썼다.

1888년(고종 25)에는 가평의 조종암(朝宗巖)을 내왕하면서 당시에 이름난 최익현(崔益鉉)·유중교(柳重敎) 등 여러 홍유(鴻儒)들과 교유하여 더욱 학문을 익혔다. 1895년에 을미사변이 일어나 안팎으로 일인의 세력이 발호하자, 기우만(奇宇萬)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능주향교(綾州鄕校)까지 달려갔다.

 

그러나 일이 실패로 돌아가자 향리로 돌아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이 무렵 근기(近畿) 일원에서 이단을 배척하고 정학(正學)을 지키려는 위정척사학파의 일원으로 태서(泰西)의 학을 극력 배척하였고, 또 일본 등 열강의 외세에 대항하여 이를 물리쳐서 국기를 바로잡을 것을 주장하였다.

이기론(理氣論)에 있어서는 주리(主理)·주기(主氣) 어느 일방에 치우침을 경계하고, 이와 기는 하나로 합해진 일물(一物)로 해석하였다. 저서로는 『사복재집(思復齋集)』 6권이 있다.

 

 

『사복재집(思復齋集)』

 

6권 3책. 목활자본. 1903년 박희원(朴熙元) 등 그의 문인들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기우만(奇宇萬)의 서문과 권말에 정의림(鄭義林)의 발문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전남대학교 도서관·연세대학교 도서관과 일본 동경대학 시라야마문고(白山黑水文庫) 등에 있다.

 

권1에 부(賦) 3편, 시 118수, 권2·3에 서(書) 80편, 권4·5에 잡저 26편, 기(記) 8편, 서(序) 3편, 명(銘) 3편, 잠(箴) 1편, 찬(贊) 1편, 행장 3편, 묘갈 1편, 묘지 2편, 묘지명 1편, 제문 및 애사 9편, 권6은 부록으로 만장(輓章) 6수, 제문 8편, 고묘문(告墓文)·행장·서가장후(書家狀後)·유사·전(傳)·묘지명·묘갈명 각 1편이 수록되어 있다.

 

잡저의 「묵리만필록(墨里漫筆錄)」은 일사기문(逸事奇聞)을 적은 것으로 충신과 열사의 행적은 물론, 관비(官婢)의 정절(貞節)과 가비(家婢)의 충절 등 미천한 이들의 숨은 선행까지도 적고 있다. 또한, 신임사화에 얽힌 사연과 조종암(朝宗巖)의 내력 등도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다.

「인산만록(仁山謾錄)」은 선비의 몸가짐에 대한 느낌과 학문에 있어 정학(正學)과 이단(異端) 및 경세(經世) 등에 관한 소견을 편 글이다. 「운림문답(雲林問答)」은 이기에 관한 여러 학설을 비교하면서 자신의 이기설(理氣說)을 내세운 것이다.

「변태서설(辨泰西說)」은 이마두(利瑪竇)와 같은 서사(西士)의 이단을 극력 배척하고 오로지 정학만을 지키자는 주장을 밝힌 글이다. 전대의 사실(史實)에서부터 서학(西學)과 이기론에 이르기까지 두루 논급하고 있다. 이 무렵 위정척사를 주창한 이들의 사상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들이다.

 

이밖에도 「향음례본의후설(鄕飮禮本義後說)」·「향약본의후설(鄕約本義後說)」 등은 당시의 향례(鄕禮)를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되는 자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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