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문화원

신년사 - 문화의 향기로 치유하고 화합하는 한 해 되시길

  • 2021.12.29 12:43

존경하는 장흥군민 여러분, 장흥투데이 애독자 여러분! 희망찬 2022년은 임인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에는 군민 두루 만복이 깃들길 기원합니다.

작년 한해도 우리 생활은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으로 인해 활동이 자연스럽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흥문화원에서는 비대면 사업으로 전환하여 장흥전통인문학문화강좌, 제23회 장흥문예백일장 및 제19회 그림그리기대회, 문림의향 장흥역사자원 발굴조사와 제11회 한국문학특구포럼, 장흥향교청소년문화체험, 고문집국역사업, 유치면지발간사업, 장흥문화달력 등을 제작하였고 특히 문림의향(文林義鄕)‘장흥지역 암각문’영상제작, 장흥지역의 청태전(돈차)의 인문학적 고찰 공모사업을 진행하였으며 무엇보다 장흥군 암각문 문화재 지정을 위한 학술조사와 장흥 의병사 발간 및 의향 장흥 의병 관련 학술대회를 통해 빛을 보지 못했던 정두흠 선생 손명사를 발굴하고 독립운동가 추서를 진행하는 성과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새해에도 장흥문화원은 지역 고유문화의 계발, 보급, 보존, 전승 및 선양, 향토사 연구를 통한 사료의 체계화, 지역문화행사 및 다양한 교육활동과 새로운 기획으로 폭넓은 사업을 전개함으로써 문화의 향기와 뿌리가 있는 지역문화 정체성 확립에 모든 열정을 다하겠습니다.

2022년에는 코로나19에 힘든 시기에 몸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문화와 예술로 건강과 행복 증진에 크게 기여할 수 있기를 희망하며 힘찬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감사합니다.

 

 

http://www.jhtoday.net/news/articleView.html?idxno=7448 

 

신년사 - 문화의 향기로 치유하고 화합하는 한 해 되시길 - 장흥투데이

존경하는 장흥군민 여러분, 장흥투데이 애독자 여러분! 희망찬 2022년은 임인년 새해가 밝았습니다.새해에는 군민 두루 만복이 깃들길 기원합니다.작년 한해도 우리 생활은 코로나19 팬데믹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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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 정유재란 시기 조선 수군의 재건과 장흥 회령포

장흥 회령포에서의 수군 정비와 의미
제장명/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장

장흥문화원은 지난 11월 25일(목)일 오후 1시 30분부터 5시 30분까지 장흥통합의학컨벤션센터에서 ‘의향 장흥의 인문학적 기반과 계승·발전을 위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제장명교수(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장)는 ‘정유재란 시기 조선 수군의 재건과 장흥 회령포’를 발표했다. 이 논고에서 장 교수는 ①칠천량해전 직후 조선 수군의 상황 ②전라도에서의 조선 수군의 정비 과정 ③장흥 회령포에서의 수군 정비와 의미에 대해 발표했는데, 다음 글은 장흥군과 밀접한 ‘장흥 회령포에서의 수군 정비와 의미’의 내용의 요지이다.-편집자 주



칠천량해전 직후부터 명량해전 직전까의 수군 정비 과정에서 장흥지역의 역할은 어떠했는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장흥지역에서 수군은 장흥부사가 관할하는 읍수군과 회령포만호가 지휘하는 회령포 진수군이 있다.
여기서는 이순신이 장흥부에 들어서서 수군정비를 위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통제사 이순신은 보성까지 거쳐 오면서 군사와 전선, 그리고 군수물자를 확보하였다. 추가로 모집한 군사는 120명으로 늘어났다고 하지만 이보다 더 늘어났을 수 있다.

이순신은 그동안 모은 병력과 군수물자들은 수시로 찾아온 부하 장수들의 전선 편으로 이송했을 것으로 보인다.(일부 연구에서는 120명의 군사가 군영구미로 가기 전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서 역원을 이용했을 것이라고 했지만 이미 이전에 이순신을 찾아온 부하들에게 병력들을 인계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순신 역시 그동안의 수군정비 노력을 보성에서 마무리 하고 최종 대비태세를 점검하기 위해 회령포로 이동하였다.
그러면 여기서 이순신이 회령포로 이동하기까지 과정을 살펴본다.
『난중일기』에 보면 8월 15일~16일까지 보성 열선루에서 숙박한 이순신은 8월 17일 아침식사 후에 장흥땅 백사정(白沙汀)으로 갔다. 백사정의 현재 위치는 장흥읍 축내리 축내저수지로 비정하고 있다.(이수경,‘난중일기의 백사정과 군영구미 위치 검토’ 108쪽).

이곳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군영구미(軍營仇未)로 갔다.

군영구미는 당시 장흥부의 선소가 위치한 곳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회령포로 갈 함선을 기다렸는데, 이는 이전에 부하들에게 지시한 일정이었다. 그러나 경상우수사 배설이 보내주기로 한 함선이 오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그곳에서 유숙했다.

(…)

좀 더 부연한다면 1556년(명종 11) 보길도 일대에 왜선이 상륙하자, 소식을 들은 장흥 부사가 출동하여 이진(梨津)의 권관(權管)과 함께 왜선을 나포하였다.(明宗實錄 권21, 11년 7월 癸酉, 丙子.)

을묘왜변 직후 1556년 장흥 부사가 전선을 타고 해전에 나섰다는 것은 당시 장흥부에 전선이 배치되었다는 것이다. 전선의 정박처와 전투를 위한 무기, 군량 등이 비축되어 있는 창고시설도 마련되었을 것이며, 그곳에서 군영의 시설이 갖추어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

여기서 장흥 회령포에서의 수군전력 정비 과정을 살펴보기 전에 회령포의 역사에 대해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선행연구를 토대로 하여( 회령포진의 탄생과 변화과정에 대해서는 이병혁, 「전라도 장흥도호부 수군(水軍) 만호진(萬戶鎭) 회령포(會寧浦) 연구」 『호남문화연구』 61,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229~232쪽에 자세한 설명이 되어 있다.)

회령포진의 역사에 대해 살펴본다. 회령포만호의 병선이 정박했던 회령포진은 처음 병선을 정박시켰던 1422년(세종 4)부터 1425년(세종 7)까지 3년 동안은 장흥부의 동쪽인 지금의 보성군 회천면 관내의 포구에 소재해 있었고, 이후 정박처를 옮겨서 옛 이름을 그대로 붙인 회령포진은 장흥부 남쪽 지금의 장흥군 회진면 관내의 포구에 위치하였다.

그 후 1485년(성종 16)과 1490년(성종 21)사이에 회령포성의 축성을 계기로 현재의 위치인 장흥군 회진면 회진리(會鎭里)에 고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이병혁, 위의 논문 제4장). 다시 말해 회령포진은 1422년(세종 4)에 지금의 보성군 회천면인 옛 장흥부 회령포에 처음 설진되어, 3년 후인 1425년(세종 7)에 장흥부 주포 즉 지금의 장흥군 회진면에 이설되었다.(그러나 회령포진의 설치와 이설에 대해서는 다른 기록이 존재하고 있다.

장흥향교에서 주관하여 일제강점기인 1938년 무인년(戊寅年)에 시작하여 1940년에 발간한 장흥지(長興誌)에 기록된 “회령진은 명종 9년(1554) 보성군 회령면에서 옮겨 와서 회령진으로 개칭하였다.”라고 한 기사가 그것이다.

이런 내용이 여러 자료에 무비판적으로 수용됨으로써 최근까지도 회령포진의 위치에 대해 논란을 야기한 바 있다(이병혁, 위의 논문).

회령포만호진이 처음 설치된 1422년의 전라도 수군처치사영은 무안현 대굴포(大堀浦)에 있었다.

지리적으로 전라좌도에 속한 회령포는 전라좌도를 관장하는 도만호인 고흥지역 여도량(呂島梁)에 있는 여도 만호진을 거진(巨鎭)으로 하여 내례(內禮)・돌산(突山)・축두(築頭)・녹도(鹿島)・마도(馬島)・달량(達梁)・어란(於蘭) 등 7개 만호진과 함께 전라좌도에 소속되었다.

이후 무안현에 있던 전라도 수군처치사영이 1432년(세종 14) 10월에 목포(木浦)로 이설되고, 1440년(세종 22)에는 지금의 해남 황원곶(黃原串)으로 옮겨져서, 1466년(세조 12)의 관제개편으로 전라도수군절도사영이 되었다.(조원래 (1993), 「임진왜란과 전라좌수영」, 전라좌수영의 역사와 문화, 순천대학교박물관, 136쪽.)

이후 1478년(성종 9)에 순천부 내례포(內禮浦)에 왜구가 침입하여 군기와 화약을 탈취한 사건을 계기로 조정에서 전라도 순찰사 이극배(李克培)의 계청을( 성종실록권100, 10년 정월 계해) 받아들여 이듬해인 1479년(성종 10)에 내례포에 수군절도사영을 추가로 설치하여 전라도의 수군을 강화하였다. 이때부터 해남에 있던 기존의 수군절도사영은 전라우도수군절도사영, 내례포에 신설된 수영은 전라좌도수군절도사영으로 승격 되었다.

1457년(세조 3)부터 시행된 조선의 국방체제인 진관체제에 따르면 이 시기 전라도의 수군 편제는 좌・우 절도사영에 있는 수군절도사인 수사(水使, 정3품) 의 휘하에 수사를 보좌하는 본영의 우후(虞侯, 정4품)와 직접 수군을 통솔하는 첨절제사(僉節制使)인 첨사(僉使, 종3품)가 있고 그 다음으로 각 포구의 만호(萬戶, 종4품)가 배속 되어있었다.

이후 경국대전에(경국대전 권4, 「병전」, 외관직, 전라도) 나타난 전라도 수군의 편제 에 의하면 회령포는 주진인 전라좌수영 관할 하의 첨절제사진인 흥양의 사도진(蛇渡鎭)에 달량(達梁)・여도(呂島)・녹도(鹿島)・발포(鉢浦)・마도(馬島)・돌산(突山) 등 7개 만호진과 함께 소속되었다. 회령포진의 주진관이 같은 전라좌도의 여도진에서 사도진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송은일(2016), 앞의 논문, 48쪽에서 사도(蛇渡)가 여도(呂島)를 대신하여 첨절제사진으로 승급된 시기를 도만호가 첨절제사로 바뀌었던 1466년경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관할 체제는 영속되지 않고 변화를 계속하였다.)

1522년(중종 17) 6월 왜구가 추자도(楸子島)에 침입하자, 강진현 완도의 가리포(加里浦)에 진관(鎭管)을 설치하여 첨절제사를 배치하고 이곳을 전라우수영에 배속시켰다.

동시에 전라좌수영의 돌산도(突山島)에 방답진(防沓鎭) 진관을 설치하면서, 좌수영 관할의 마도(馬島)를 우수영에 이관하고 달량(達梁)을 폐지하여 소속 수군과 선박을 가리포에 이관하였다.(송은일(2016), 앞의 논문, 48쪽에서 사도(蛇渡)가 여도(呂島)를 대신하여 첨절제사진으로 승급된 시기를 도만호가 첨절제사로 바뀌었던 1466년경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관할 체제는 영속되지 않고 변화를 계속하였다). 그 때까지도 회령포는 여전히 전라좌수영 사도진에 소속되어 있었다.

1555년(명종 10) 5월에 왜구가 지금의 해남군인 영암의 달량포(達梁浦)에 침입하여 이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전라병사 원적(元積)과 장흥부사 한온(韓蘊) 등이 전사하고, 장흥부와 강진의 병영(兵營)이 약탈을 당하고 회령포진성이 소각되는 등 을묘왜변(乙卯倭變; 달량포 왜변)이 발발하자, 이를 어렵사리 토벌한 조정에서는 전라우수영의 군사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전라좌수영 관할의 장흥 회령포를 우수영관할인 완도의 가리포진(加里浦鎭) 소속으로 이관하여 우수영을 확대 개편한 가운데 임진왜란을 맞이하게 되었다.(정성일(2011)

회령포진성의 축조는 다른 연해 제진의 축성과 함께 추진되었는데, 1490년(성종 21) 4월에 높이가 13척, 둘레가 1990척 규모로 축성되었다.(『성종실록』 권239) 『신증동국여지승람』 에는 회령포성(會寧浦城)은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1천 9백 60자, 높이가 10자이고, 안에 샘이 1개가 있다고(『성종실록』 권239) 하였다.

회령포진의 관원・병선과 입방군(入防軍)인 군사의 수효가 최초로 기록된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회령포진은 종4품직 무관인 수군만호가 중선 4척과 별선 4척의 병선과 472명의 군사, 그리고 뱃사공인 초공(梢工) 4명을 거느리고 장흥부의 남쪽인 주포에 소재해 있었다.

그러면 임진왜란 당시 회령포진의 전선 수는 얼마나 되었을까? 여기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지만 『경국대전(經國大典)』 (1485)에는 대맹선 1, 중맹선 1, 소맹선 2, 무군소맹선 4척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전선 척수는 다른 만호진의 전선 수와 비슷하다. 따라서 임진왜란 당시 만호진에 통상 판옥전선 2척이 있었던 사실을 통해 볼 때 회령포에도 비슷한 규모일 것으로 생각된다.

어쨌든 회령포진은 당시 이순신이 수군정비를 마무리 한 곳으로 역사적 의미가 있다. 이를테면 이순신은 칠천량해전 이후 통제사에 재임된 후 8월 3일부터 공식적인 임무를 시작한 후 불과 보름 기간 동안 순천, 보성, 장흥을 거치면서 모집한 군사와 군수물자를 이곳 회령포에 집결시킨 것이다. 다시 말해 이전에는 말을 타고 육로로 이동하면서 수군을 정비했다면 이제부터는 전선을 타고 해상으로 이동하면서 수군전력을 강화시키는 노력을 시작한 것이다.

그야말로 제대로 된 해상작전과 해전을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요컨대 회령포는 칠천량 해전 이후 수습된 조선 수군의 총집결지로서 그 기능을 수행한 것이다. 이곳에서 이순신은 배설이 이끌고 온 전선과 그동안 수보하였던 기타 전선들을 확보하여 12척의 전선을 확보한 것이다.

그리고 이진을 거쳐 어란포에 도착했을 때인 8월 26일에 전라우수사로 새로 부임한 김억추가 전선 1척을 구비하여 합류하였다.

이때 총13척의 판옥선이 확보되어 명량해전을 준비하게 된다.

아울러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명량해전에서 큰 활약을 한 해상의병들도 이 시기에 모집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장흥출신의 마하수 부자는 대표적인 인물로 드러나고 있다.

정유재란 시기 조선 수군은 칠천량해전이라는 대회전을 맞아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대책으로 이순신을 통제사로 재임명하여 수군 재건의 중책을 맡겼다. 이순신은 칠천량해전의 결과를 탈출해온 장수들로부터 듣고는 향후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전라도로 향했다.

이때 이순신 곁에는 도원수 권율이 지원해 준 군관 9명과 군사 6명이 전부였다.

이순신은 육로로 전라도에 도착하여 수군을 정비해 나갔다. 그리하여 순천과 보성을 거치면서 병력과 군수물자를 확보하였으며, 전선을 수습하였다.

그 결과 장흥 회령포에 도착했을 때 전선 12척을 정비하고 수백 명의 병사들을 추가로 확보할 수 있었다. 불과 보름간의 단기간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한 결과인 것이다.

이러한 수군 정비의 집결지가 바로 장흥 회령포이다.

이곳에서 이순신은 경상우수사 배설이 거느리고 온 전선과 자체 수보한 전선을 합하여 12척의 전선을 확보하였다.

이순신의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다른 자료에는 이 기간 장흥부사에서 전라우수사로 승급 부임한 김억추의 활약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어쨌든 이러한 수군 정비의 결과 명량해전의 승리에 기여할 수 있었다.

장흥은 당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조선 수군이 재건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곳으로 평가할 수 있다.

 

 

출처

http://www.jhtoday.net/news/articleView.html?idxno=7460

 

기획특집 - 정유재란 시기 조선 수군의 재건과 장흥 회령포 - 장흥투데이

장흥문화원은 지난 11월 25일(목)일 오후 1시 30분부터 5시 30분까지 장흥통합의학컨벤션센터에서 ‘의향 장흥의 인문학적 기반과 계승·발전을 위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제장명교수(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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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문화원, 문화달력 제작 배포

장흥의 문화와 역사, 관광 총망라

 

장흥문화원(원장 고영천)이 발행하는 ‘문화달력’이 제작되어 금년에도 인기리에 배포됐다.

장흥 문화 가족은 물론 향우회, 읍면사무소와 전남문화원 회장과 총무, 장흥 지역 사회단체에도 배부되어 장흥의 위상을 높였다.

고영천 장흥문화원장은 “장흥문화달력은 장흥의 문화와 역사, 관광을 한 곳에 총망라한 것이 특징이다”며 “특히 금년에는 장흥의 풍경과 선조들의 넋을 기리는 사진을 많이 수록했다”고 소개했다.

임인년(壬寅年) 달력에는 표지에 정두흠 망화대(望華臺) 사진을 전면과 후면을 위도로 표시한 위치와 함께 수록하여 망화정 터에 남은 표석과 운암 선생이 순국하며 지은 손명사의 첫 번째 시도 수록하여 우국충정의 마음과 함께 현대를 살아가는 후손들에게 나라 사랑의 마음을 심어주었다.

또한 1월 청정바다, 자라섬, 2월 동학의 기상 푸조나무(천연기념물 제 268호 / 어산리 푸조나무), 3월 장흥 해동사(長興 海東祠) 전라남도 문화재 자료 제291호, 4월 그대와 가고 싶은 아름다운 호수, 탐진호 벚꽃길, 5월 구산선문 보림사(寶林寺) 명부전, 6월 관산 신동 가슴앓이섬(가스마리섬), 7월 송백정, 무계고택 ‘한국 민가정원’, 8월 정남진 장흥물축제 - 강과 산, 바다와 호수가 어우러진 땅!, 9월 회주고지 천관낙토 관산, 10월 메밀꽃 흑하게(하얗게) 핀 ‘선학동 마을’과 ‘이청준’, 11월 ‘백세청풍(百世淸風)’ ‘제일강산(第一江山)’ 부춘정, 12월 무공해 친환경 웰빙 ‘장흥 무산김’을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장흥지부와 위종만 화가의 사진으로 수록했으며, 위치는 물론 사진 설명을 곁들여 수록하여 고향을 떠난 향우들에게도 눈을 감으며 그 시절이 떠오르게 하여 고향사랑의 마음을 심어주었다는 평도 함께 받았다.


출처

http://www.jhtoday.net/news/articleView.html?idxno=7383

 

 

장흥문화원, 문화달력 제작 배포 - 장흥투데이

장흥문화원(원장 고영천)이 발행하는 ‘문화달력’이 제작되어 금년에도 인기리에 배포됐다.장흥 문화 가족은 물론 향우회, 읍면사무소와 전남문화원 회장과 총무, 장흥 지역 사회단체에도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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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종만 화가 ‘하나 됨은 다른 많은 것을 이룬다’ 개인전 개최

12월 13일 ~ 30일 전라남도 도청 갤러리 1층

  • 2021.12.13 08:42


장흥문화원 사무국장으로 근무 중인 위종만 화가가 두 번째 개인전을 전라남도, (재)전남문화재단, 한국예술인복지재단 후원으로 전라남도 도청 갤러리 1층에서 13일 개막하여 30일까지 전시된다고 한다.


위종만 화가는 “6. 15 남북공동선언 21주년을 맞이한 올해, 분단 76년 한반도 한국에 살고 있는 작가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해양과 대륙의 공기가 맞부딪치는 차가운 전선이 들이닥쳤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다. 한치 앞도 예산되지 않은 동북아 정세에 한반도 남북정산회담과 같은 희망의 발걸음이 있긴 하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어 보인다. 희망과 절망, 믿음과 배신의 과정을 살펴보는 일은 동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숙제이다. 한반도 분단을 극복하고 평화와 통일이 빨리 오기를 희망하는 마음에ㅔ ‘통일’이라는 주제로 2번째 개인전을 하게 되었다”고 도록에서 말했다.

강경호 시인이며 문학평론가는 “이번 작품전 주제에서 보듯 이번 전시회는 시학詩學의 본질인 동일성同一性과 맞닿아 있다”며 “한반도기, 철조망 사이 두 개의 지문, 원員, 태극문양, 독도, 고구려 벽화, 천마총 등의 상징적인 이미지와 타이포그래픽적인 요소가 친근하면서도 작가의 개성이 뚜렷하게 보여진다”고 ‘민족미술의 과제를 말하다’에 썼다.

위종만 화가는 장흥 용산출신으로 한성대학교 회화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현재는 논아트 밭아트 유쾌한 예술농부, 장흥문화원 사무국장, 토우조형연구소 대표, 달항아리공방 대표, (사)민족미술협회 감사로 활동 중이다.

2011년 서울 성북전시관에서 제1회 개인전 ‘U-쾌한 꿈’을 개최하고 이번이 두 번째 개인전이나 2010년부터 매년 10회 정도의 단체전에 참여하고 있으며, 그동안 2019년 제11회 전남문화원장상, 2021년 제52회 한민족통일문화제전 중앙의장상의 수상 경력이 있고, 세 번의 전시기획(큐레이터)과 당산동 성당 유치원 타일벽화 제작 등 공공미술에도 수십 차례 참여한 다재다능한 작가로 알려져 있다.

출처

http://www.jhtoday.net/news/articleView.html?idxno=7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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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문화원(원장 고영천)은 지난 9일 문화원 회의실에서 코로나19 예방체제를 갖추고 30여명

이 참석한 가운데 임진왜란 때 풍암 문위세 의병활동 인문학 강좌를 실시했다.

이날 초청된 강사 김만호(전남연구원 연구위원)는 풍암 문위세 일가 의병활동을 강의하면서 “문위세는 전라좌의병 조직에 아들, 조카, 사위 등 일가와 집안 가동(家僮)100여명을 참여시켜 전라좌의병 봉기(蜂起)를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차별화 된다. 또한 전라좌의병군에서 군량책임자로서 살림살이를 책임졌으며, 군량미가 부족한 사태가 발생하지 않았던 것은 문위세가 최선을 다해 맡은바 소임을 담당했던 결과였다. 그래서 그 공적을 인정받아 용담현령(종5품직)으로 봉직했고, 정유재란 때 용담(현 전북 진안군 용담면)은 호남과 영남의 목구멍에 해당되는 요새 지역이라 적들이 다시 처 들어와 아들, 사위, 조카들에게 의병(향병)을 모으도록 명령하여 일본군 침입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명나라 장수 도독(都督) 유정(劉綎)이 용담지역을 지나다가 탄복하며 말하길 “이 지역 태수(太守;현령)의 현명함이 아니었다면 어찌 이처럼 방어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문위세 비석을 세워 공덕을 기리었다”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임진왜란시기 호남의병 활동상황을 기록한 대표적인 자료인「호남절의록」에 문위세(文緯世:1534~1600)의 기록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정리해 강의하기도 했다.

①남평문씨 문익점 후손이라는 점

②스승이었던 이황선생에게「팔진도:군사조련 훈련법」를 소개받았다는 사실

③고경명의 금산전투 전사 소식과 관계없이 처음부터 독자적으로 창의를 하였다는 점

④임계영, 김익복, 정사제 등과 전라좌의병군을 창의하였고 아들과 조카, 사위와 함께 의병 모집

⑤전라좌의병군에서는 군량보급에 담당한 점

⑥1593년 공적을 인정받아 용담현령을 역임

⑦정유재란 때에는 직접 창의하였다는 점

⑧1600년(선조 38) 파주목사(정3품작) 승진, 아들․사위․조카들이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됨

⑨ 1702년(숙종 28) 월천사(月川祀)건립. 충선공(忠宣公) 문익점을 주벽으로 배향했다가 1785년(정조 9)에 강성(江城)서원으로 조정에서 사액(賜額)받음

특히 문위세가 담당하였던 군량미 조달은 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나중에는 호남운량관으로 활약한 바 있다. 그래서 전라좌의병 군량조달은 물론 관군이었던 권율의 군량까지 공급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전쟁의 운용이라는 것이 병사, 무기, 군량미, 전략전술의 유기적 결합일 것이기 때문에 문위세 일가가 의병운동은 높이 평가 받아야 한다.

풍암 문위세 관련 자료를 살펴보면 “부산면 부춘리에서 출생해 14세에 안동 도산서원에서 유학했고 27세 때 퇴계 이황 선생이 ‘제갈공명의 팔진도(八鎭圖:군사조련 훈련법)에 대해 언급하시고 팔진도 해설서를 내어 보이고 옮겨 베껴 연구하라고 하면서 이 역시 격물치기(格物致知)의 일단(一段)이니, 독서하는 여가(餘暇)에 유의(留意)해서 잘 살펴 볼만한 것이니라’하시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훗날 임진왜란 때 풍암 문위세는 장흥지역 의병장으로 전북과 영남지역에서 군사전략과 전술에 있어 남다른 활약을 했던 바탕이 되었다.

이날 실시한 인문학 강좌에서 전라좌의병 지도자는 장흥 문위세, 보성 임계영. 박광전, 능성현령 김익복 등 전라좌도 남부지역 사림(士林)이 주축을 이루었다. 그들은 각자 의병을 모아 1592년 7월 20일 700여명이 모여 보성관문에서 의병기치를 세웠다. 임계영을 전라좌의병장으로 추대하고 문위세는 양향관, 박근효를 참모관, 정사제를 종사관으로 하는 조직을 갖추고, ‘호(虎)’자를 장표(章標)로 삼고, 전라좌의병군이라 칭했으며 박근효는 문위세 매형 박광전의 장남이었다. 이렇듯 전라좌의병군 창의는 보성 임계영․박광전, 장흥 문위세와 남평문씨(유치면, 부산면) 일가가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기에 가능했다.

특히 중요한 사실은 박광전과 문위세 일가의 결합이라 하겠다. 장흥출신 대표 의병지도자였던 문위세와 박광전 관계는 처남과 매형의 인척관계였고 퇴계 선생 제자들이었기 때문에 전라좌의병 군세를 키우고 결속력을 강화하는데 큰 영향을 줬다.

문위세는 1592년 7월 1일 장흥, 강진, 해남, 영암 선비들에게 창의통문을 보냈으며, 두 형님(문위천. 문위지)과 부춘정(당시 청영정)에서 의병 일으키기를 협의하고 관산관(冠山官:장흥도호부 객관)에서 장흥도호부사와 의병 일으킬 것을 논의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래서 장남 문원개에게 집안의 가동(家僮)100여명을 동원하고 군량을 모으게 했으며 강진출신 무사(武士) 이충량을 자신의 부장으로 삼는 등 군대조직을 갖추고 매형 박광전과 협력체제를 구축했다. 임계영을 전라좌의병장으로 추대하고 7월 20일 보성에서 출진해 낙안- 순천-구례-남원으로 진군해 전라우의병(의병장 최경회)과 함께 남원에서 연합전선을 이루어 무주․진안․장수․금산전투에 1개월 동안 참전했다.

그리고 안동 도산서원에서 함께 수학했던 김성일 경상우도관찰사가 지원 요청하여 전라좌의병군은 곧바로 성주․개령 수복전투에 참전해 4개월 동안 큰 전공을 세웠다.

전라좌의병군 지도자 21명 가운데 7명은 문위세와 그의 아들(문원개, 문영개, 문형개, 문홍개), 조카(문희개), 사위(백민수)이다. 문위세 재종질(7촌) 문기방과 문명회는 선무원종 2등 공신에 책록되었고, 문위세와 그의 아들 문영개, 문홍개, 사위 백민수는 선무원종 3등 공신으로 녹훈되었다.

주제 강좌가 끝난 뒤 문평섭(강성서원보존 위원장)은 “ 풍암 문위세 다섯째 아들 문여개는 정유재란 때 용담지역에서 문원개․문형개․문홍개 형님과 함께 아버지 문위세를 함께 도와 일본군을 방어했으며, 명량해전에서도 문영개․문홍개 형님과 함께 참전했다”고 말했다.

문평열(전 장흥군의원)은 “풍암 문위세 선생은 생전에 일찍이 암대(岩臺)에 올라, 임금이 계신 북쪽을 바라보며, 사모하는 시를 읊었다.”며, “장흥군에서는 사군대(思君臺:현재 장흥댐 특산품판매장 앞 산자락)터에 정자를 복원해야한다”라고 건의했다.

사군대(思君臺) 원시(原詩)는 다음과 같다.

前川秋月引閑步 夜上岩臺望紫微(전천추월인한보 야상암대망자미)

앞 시냇가 밝은 가을밤에 한가로이 걸어가 암대 위에 올라 왕궁을 바라보니

北闕迢消迢息斷 終南渭水夢依依(북궐초초소식단 종남위수몽의의)

임금계신 곳 멀고멀어 소식마저 끊기니 남산과 한강만이 꿈속에 어른거리네. (자료제공 / 문병길 문화관광해설사, 장흥문화원 향토사 이사)

 


출처 : 장흥문화원, '풍암 문위세 일가 의병활동' 인문학 강좌 실시

장흥투데이(http://www.jhtoday.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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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아시아문화중심도시조성 위원장(국무총리급)인 송기숙(宋基淑, 1935~2021.12.5.) 전 전남대 교수가 지난 5일 오전 8시 숙환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향년 86.

고인은 부인인 김영애 씨와 네 여식(석희·강희··송희)을 남겼다. 발인은 7일 오후 1시에 치러졌고 서울추모공원에 안장됐다. (‘코로나19’로 인해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고인의 고향 장흥군에는 고인의 분향소도 마련되지 않았으나, 광주시에서는 7일 오전 광주 동구 YMCA‘() 송기숙 시민 분향소’(사진)를 마련, 많은 시민 들이 고인을 추모할 수 있도록 했다.

송 전 교수는 30여 년 간 전남대교수(19732000)로 봉직했다. 한국 현대사 사료연구소 개설(전남대) 및 소장,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초대 공동의장, 민족문학작가회의(현 한국작가회의) 회장, 광주전남 정치개혁시도민연대 상임대표 등을 역임했다. 1996년 전남대 5·18연구소장, 노무현정부 때인 20042006년 대통령직속 문화중심도시조성위원회 위원장(국무총리급)을 맡았다.

송기숙은 현실의 부정에 과감히 대처하는 80년대 행동하는 작가’ ‘실천하는 대표적인 지성인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64현대문학에 평론 창작 과정을 통해 본 손창섭이 추천되었고, 1965이상서설로 추천이 완료되었다. 작품집으로 송기숙 중단편전집(2018)을 비롯, 장편소설 자랏골의 비가, 암태도, 녹두장군, 은내골 기행, 오월의 미소등이 있으며 현대문학상(백의민족), 만해문학상, 금호예술상, 요산문학상, 후광학술상(2019) 등을 받았다. 후광학술상 수상 때 송 명예교수는 제세공과금을 제외한 상금 전액을 국문학과의 발전을 위해 써달라며, 최근 전남대 발전기금재단에 기부했다.

송 교수는 1978년 교육지표사건 불법 구금당한데 대해 국가로부터 뒤늦게 받은 보상금 전액7천만원을 전남대에 장학금으로 기부하기도 했다. 또 지난 201010월에는 장흥군에 건립된 정남진 도서관에 평생 보유한 장서 3천여 권을 기증하기도 했다.

 

출처 : 장흥문학의 거목, 스러지다_장흥투데이(http://www.jhtoday.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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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군이 주최하고 장흥문화원(원장 고영천)이 주관하는 장흥 지역 의병·독립운동 유적지 참배 행사 및 암각문 문화재 지정을 위한 심포지엄이 122일부터 3일까지 이틀간 일정으로 진행된다.

 

2일에 진행되는 유적지 참배 행사에는 한시준 독립기념관장도 함께하며 동학농민혁명기념탑 헌화, 장흥 동학농민혁명기념관 관람, 해동사 참배 등 장흥의 의병·독립운동 유적지를 방문하여 의향 장흥의 정신을 되새기고,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숭고한 뜻을 기리는 자리가 마련된다.

 

오는 3일 오전 10시에는 군민회관 3층에서 장흥군 암각문 문화재 지정을 위한 심포지엄이 개최된다. 이번 심포지엄은 20205월부터 올해 4월까지 1년간 장흥 암각문 조사단에서 각별한 관심과 노력으로 자료 조사 및 분석을 진행한 장흥 암각문을 주제로 진행된다.

 

주요 일정으로는 한시준 독립기념관장의 구한말 의병·우국지사 활동 조사 현황 및 향후 추진계획으로 기조강연을 시작하고, 김희태 전남문화재전문위원의 문림의향 장흥의 경승과 유적지’, 홍순석 해동암각문연구회장의 장흥 암각문 학술조사 성과보고주제 발표로 마무리된다.

 

또한 심포지엄을 마친 후에는 암각문 탁본전시회도 진행할 예정이다.

 

군 관계자는 장흥 지역의 유적지 참배를 통해 의향 장흥 역사의 발자취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장흥의 곳곳에 숨겨져 있는 암각문은 선현들의 유적으로서 한 시대의 내면을 조명하는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고 전했다.

 

출처 : 장흥군, 의병독립운동 유적지 참배 행사 및 암각문 문화재 지정을 위한 심포지엄 개최_장흥투데이(http://www.jhtoday.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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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두흠(鄭斗欽:1832~1910)은 전남 장흥군 유치면 운월리 출신으로 경술년(1910) 한일합병 때 순절한 애국지사이다.

같은 시기에 매천 황현은 <절명시>를 남기고 순절하였다. 곡성에서는 정재건(鄭在楗), 김제에서는 장태수(張泰秀)가 각각 유서를 남기고 순절하였다.

운암 정두흠은 <손명사(損命詞)>를 남기고 순절하였다. ‘손명사목숨을 버리며 고하다라는 뜻이다. 순절 당시의 유묵은 확인되지 않고, 그의 문집인 운암집(雲巖集)에 칠언율시 2수만 전한다.

운암 정두흠의 순절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만, 당시에 지은 <손명사>는 매천 황현의 <절명시>에 가려져 알려지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손명사>의 제4구에 2자가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장흥문화원의 고전국역사업 일환으로 운암집 국역을 위촉받은 홍순석 명예교수(강남대, 한문학전공)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증 결과를 지난 1125일 장흥통합의학컨벤션센터에서 순국지사 운암 정두흠의 생애와 <손명사>란 주제로 발표하였다.

운암집에 수록된 <손명사>7언시인데 제4구는 閉戶白日天5자만 기록되어 있다.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이 쓴 묘갈명에는 경술년 변고에 문을 닫고 대낮 하늘의 해를 보지 않았다(庚戌之變 閉戶不見天日)”고 하였다.

이를 통해 不見이 누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운암집 권3에 수록된 연보 경술년 기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묘갈명> <연보>의 기록을 통해 <손명사> 4구의 결자는 不見임이 분명해진다. 결자 부분을 복원한 첫 번째 시를 정리해 보이면 다음과 같다.

 

有客來傳無國報 어떤 객이 전하길 나라가 없어졌다 하기에

 

癲狂心事淚悽然 미칠듯한 심사에 눈물 흘리며 처참해지네

 

擧跟寧蹈靑山土 발꿈치 들고 어찌 청산의 흙을 밟으랴

 

閉戶不見白日天 문 걸어 닫고 대낮의 하늘을 보지 않네

 

負帝貞忠慚陸秀 황제를 업고 죽은 육수부의 정충에 부끄럽고

 

攘秦大義憶齊連 진나라 물리친 제나라 노중련의 대의를 생각하네

 

國破難容無救罪 나라가 망함은 용납이 어렵고 구제할 수 없는 죄이니

莫如身死逐先賢 이 몸 죽어 선현을 따르니만 못하리라

운암집에는 을사년(1905) 조약 때 순절한 신헌조병세민영환송병선홍만식김봉학 등 6명의 충절을 애도하는 만사가 있다. 1906년에 순절한 최익현을 애도하는 시편도 있다.

홍교수는 지난해 12월에 회은 위원량의 수리봉 망곡서(望哭書)’ 암각문을 공개하여 주목을 받았다. 회은 위원량이 경술년 가을에 암각문을 남긴 것과 운암 정두흠이 경술년 10월에 순절한 역사적 사실이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송사 기우만은 정두흠의 묘갈명에서 경술년에 호남에서 순절한 사람이 셋인데 정재건장태수, 그리고 한 사람, 사헌부 지평 정두흠이라 하였다.

같은 시기에 호남에서 순절한 애국지사인데 정재건 선생은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장태수 선생은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운암 정두흠은 <손명사>가 문집에 전하고 있음에도 아직 추서를 받지 못한 상태이다.

이에 대해 독립기념관 한시준 관장과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적 심사위원인 박민영 교수는 조속히 운암의 사적을 정리해서 건국훈장을 추서함이 마땅할 것이다고 하였다.

운암 정두흠의 문집인 운암집은 42책으로, 1919년도에 장자인 정제하(鄭濟夏)에 의해 간행되었다.

노사(老沙) 기정진(奇正鎭)의 제자인 정의림(鄭義林:1815~1910)이 서문과 <운암재기(雲巖齋記)> <망화대기(望華臺記)>를 썼다.

그리고 기우만(奇宇萬)<묘갈명>을 썼다.

운암 정두흠은 화서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서 경학을 수학한 문인이다.

부친과 형님의 강권으로 48세 되던 1879(고종16)에 출사하여 권지승문원정자성균관 전적사간원 정언을 거쳐 56세 사헌부 지평에 오른 문신이다.

세 차례 대성(臺省)에 오르고, 사간원을 출입하면서 불의를 만나면 곧바로 간쟁하고, 잘못을 보면 반드시 탄핵하였다.

재임 중 <청색천변소(請塞天變疏)> <청엄방헌소(請嚴邦憲疏)> <만언소(萬言疏)> <청파매관소(請罷賣官疏)> <청납직언소(請納直言疏)>를 올렸다.

스스로 상소에 미친 사람[疏狂]’이라 할 정도로 강직했던 인물이다.

10개 조목으로 구성된 <만언사>는 당시의 정황을 살피는데 매우 중요한 사료이다.

운암집에는 구한말 쇠국기에 순국한 신헌민영환조병세‧‧송병선홍만식김봉학 등 6명의 충절을 애도하는 만사가 있다.

1906년에 순절한 최익현을 애도하는 시편도 있다.

<임오군란을 탄식함(嘆壬午軍擾)> <의장 개제를 탄식하며(歎衣章改制)> <의병을 일으킴에 감회가 있어 읊다(倡義感吟)> 등 당시의 정황을 개탄하며 지은 시도 적지 않다.

특히 운암 정두흠의 부인인 청주한씨도 나라 망하고 남편이 죽었으니 홀로 살 수 없다.”고 하며, 운암의 1주기를 제사를 지내고 조용히 따라 죽었다.

이같은 우국충정과 정절에도 불구하고, 운암 정두흠의 사적에 대해선 거의 알려진 바 없다.

그가 살았던 집터는 도로가 횡단하였고, 망화대(望華臺) 표석만 북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망화대 표석은 후손의 안내로 지난 97일 장흥문화원 조사팀(고영천 원장, 위종만 사무국장, 문충선 이사 외)에 의해 확인되었다.

훼손이 심하여 판독이 어려우나 우측면에 崇禎五辛酉 十二月 日 濟夏 海鵬 竪라는 건립연대가 새겨져 있어 192112월에 아들 제하, 해붕이 건립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운암 정두흠과 같은 시기에 곡성에서 순절한 정재건(鄭在楗)선생은 196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며,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제에서 순절한 장태수(張泰秀)선생은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구한말의 순국지사는 대부분 1962~1963년도에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운암 정두흠이 같은 시기에 <손명사>를 남기고 순절하였음에도 아직도 그의 우국충정은 드러나지 않았다.

향후의 과제로 산일된 운암 정두흠의 유적과 유물 조사를 통해 다른 순국지사처럼 선양되어 추서되어야 할 것이다.

홍순석 교수는 학술회의 다음 날인 26일에 장흥문화원의 고영천 원장, 문충선 이사, 위종만 사무국장, 그리고 독립기념관의 김건실 연구원, 양동철 전남서남부 광복회장,서선미 운영위원, 정환기 후손 등과 함께 운암리 운월마을에 있는 운암선생의 묘소를 찾아가 참배하였다.

그리고, 123일에는 장흥문화회관에서 우국지사 회은 위원량의 생애와 망곡서 암각문을 발표한다.

이날에는 독립기념관 한시준 관장도 구한말 의병 우국지사 활동 조사 현황 및 향후 추진 계획이란 주제로 기조강연을 한다.

한시준 관장은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을 탐방하며, 안중근 의사를 모신 해동사를 참배할 예정이다.

 

출처 : 구한말 순국지사 운암 정두흠의 손명사를 100년만에 학계에 공개하다_장흥투데이(http://www.jhtoday.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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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림의향 장흥의 절의정신 재조명"

전라남도와 장흥군이 주최하고 장흥문화원(원장 고영천)이 주관하는 의향 장흥의 인문학적 기반과 계승ㆍ발전을 위한 학술대회가 25일 오후 1시 30분 장흥통합의학컨벤션센터에서 열렸다.
이번 학술대회는 ‘문림의향 장흥의 절의정신 재조명’을 주제로 학술발표 및 종합토론이 이루어지며 외세 침탈에 맞서 구국의 대열에 앞섰던 선조의 애국정신 함양과 전승, 의향 장흥지역의 항일독립운동 역사를 재조명하고 의병의 역할과 발자취를 되돌아봄으로써 용기와 희생이 깃든 숭고한 의병정신을 계승ㆍ발전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이번 학술대회에서 제장명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이 ‘장흥 회령포진과 정유재란 시기 조선 수군 재건’, 박맹수 원광대학교 총장이 ‘장흥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과 역사적 의의 재조명’, 홍순석 강남대학교 명예교수가 ‘장흥 지역의 순국지사와 절의정신의 발현-정두흠의 손명사’, 홍영기 순천대학교 명예교수가 ‘장흥 지역의 항일독립운동 전개와 특성’, 이건상 전남일보 역사선임기자가 ‘항일독립운동유산의 국제적 연계를 통한 활성화 방안’을 주제로 발표를 맡았다.

또한 주제 발표를 마친 후 이해준 공주대학교 명예교수를 좌장으로 한 종합 토론도 펼쳤다.
정종순 장흥군수는 “문림의향 메카인 장흥은 이순신 장군께서 회령포 결의를 다진 회령진성, 동학농민군 최후의 격전지 석대들이 있는 지역으로 이번 학술대회를 통해 의향 장흥 역사의 발자취를 되돌아보고 계승ㆍ발전시키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전했다.

 

출처: 의향장흥의 인문학적 기반과계승ㆍ발전을 위한 학술대회 열려_장흥신문(www.jh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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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복 갖추고 예절교육, 장흥의 역사와 전통에 대해 수업 받아

전남 장흥문화원(고영천 원장) 9월부터 일부터 10월까지 총8회에 걸쳐 관내 중학교 1학년이 모두 참여하는 ‘제6회 문림의향 장흥향교 청소년 문화체험’을 실시했다고 밝혔다.

문림의향 청소년 향교체험은 ‘2015년부터 꾸준히 진행하여온 교육사업으로 장흥군과 장흥문화원,장흥향교,장흥교육지원청과 각 중학교와의 다양한 협력으로 진행된 사업이다.

각 학교의 인솔교사와 학생들은 향교장의분들이 강사로 나서 향교방문예절, 유생복정제, 향교(鄕校)에 대한 고찰(考察),절에 대한 예절, 우리지역 대표 인물 알기등을 실시했다.

특히 올해는 남학생에게는 유복과 여학생에게 당의를 따로 준비하여 예절교육을 실시하였는데 학생들로부터 관심과 호응을 받았다.

향교수업이 끝난 후 수료식에서는 수료증과 함께 이문갑(한국서예협회 장흥지부장) 서예가로부터 집안의 가훈을 하나씩 전달하는 시간도 가졌으며, 이후 해동사와 보림사 문화유적 현장 탐방을 실시했다.

장흥문화원 위종만 사무국장은 “장흥향교는 1398년부터 1894년까지 500여년간 나주향교와 함께 명성 높은 향교로 장흥문화체험을 통해 학생들이 문림의향으로 불리는 지역 역사의 숨결을 직접 느끼고 체험을 통해 곧은 선비정신의 이해를 돕는 교육의 장을 마련했다” 고 취지를 설명했다.

또한, “수업의 전체 내용을 동영상으로 촬영 편집하여 장흥문화원 유튜브채널에서 볼수 있도록해 학교 온라인 교육에도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고 덧붙였다.

출처 : 장흥문화원, 제'6회 장흥향교청소년문화체험'의복 갖추고 예절교육, 장흥의 역사와 전통에 대해 수업받아-장강신문(www.jg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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