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문화원

장흥문화원(원장 고영천)은 지난 9일 문화원 회의실에서 코로나19 예방체제를 갖추고 30여명

이 참석한 가운데 임진왜란 때 풍암 문위세 의병활동 인문학 강좌를 실시했다.

이날 초청된 강사 김만호(전남연구원 연구위원)는 풍암 문위세 일가 의병활동을 강의하면서 “문위세는 전라좌의병 조직에 아들, 조카, 사위 등 일가와 집안 가동(家僮)100여명을 참여시켜 전라좌의병 봉기(蜂起)를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차별화 된다. 또한 전라좌의병군에서 군량책임자로서 살림살이를 책임졌으며, 군량미가 부족한 사태가 발생하지 않았던 것은 문위세가 최선을 다해 맡은바 소임을 담당했던 결과였다. 그래서 그 공적을 인정받아 용담현령(종5품직)으로 봉직했고, 정유재란 때 용담(현 전북 진안군 용담면)은 호남과 영남의 목구멍에 해당되는 요새 지역이라 적들이 다시 처 들어와 아들, 사위, 조카들에게 의병(향병)을 모으도록 명령하여 일본군 침입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명나라 장수 도독(都督) 유정(劉綎)이 용담지역을 지나다가 탄복하며 말하길 “이 지역 태수(太守;현령)의 현명함이 아니었다면 어찌 이처럼 방어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문위세 비석을 세워 공덕을 기리었다”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임진왜란시기 호남의병 활동상황을 기록한 대표적인 자료인「호남절의록」에 문위세(文緯世:1534~1600)의 기록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정리해 강의하기도 했다.

①남평문씨 문익점 후손이라는 점

②스승이었던 이황선생에게「팔진도:군사조련 훈련법」를 소개받았다는 사실

③고경명의 금산전투 전사 소식과 관계없이 처음부터 독자적으로 창의를 하였다는 점

④임계영, 김익복, 정사제 등과 전라좌의병군을 창의하였고 아들과 조카, 사위와 함께 의병 모집

⑤전라좌의병군에서는 군량보급에 담당한 점

⑥1593년 공적을 인정받아 용담현령을 역임

⑦정유재란 때에는 직접 창의하였다는 점

⑧1600년(선조 38) 파주목사(정3품작) 승진, 아들․사위․조카들이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됨

⑨ 1702년(숙종 28) 월천사(月川祀)건립. 충선공(忠宣公) 문익점을 주벽으로 배향했다가 1785년(정조 9)에 강성(江城)서원으로 조정에서 사액(賜額)받음

특히 문위세가 담당하였던 군량미 조달은 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나중에는 호남운량관으로 활약한 바 있다. 그래서 전라좌의병 군량조달은 물론 관군이었던 권율의 군량까지 공급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전쟁의 운용이라는 것이 병사, 무기, 군량미, 전략전술의 유기적 결합일 것이기 때문에 문위세 일가가 의병운동은 높이 평가 받아야 한다.

풍암 문위세 관련 자료를 살펴보면 “부산면 부춘리에서 출생해 14세에 안동 도산서원에서 유학했고 27세 때 퇴계 이황 선생이 ‘제갈공명의 팔진도(八鎭圖:군사조련 훈련법)에 대해 언급하시고 팔진도 해설서를 내어 보이고 옮겨 베껴 연구하라고 하면서 이 역시 격물치기(格物致知)의 일단(一段)이니, 독서하는 여가(餘暇)에 유의(留意)해서 잘 살펴 볼만한 것이니라’하시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훗날 임진왜란 때 풍암 문위세는 장흥지역 의병장으로 전북과 영남지역에서 군사전략과 전술에 있어 남다른 활약을 했던 바탕이 되었다.

이날 실시한 인문학 강좌에서 전라좌의병 지도자는 장흥 문위세, 보성 임계영. 박광전, 능성현령 김익복 등 전라좌도 남부지역 사림(士林)이 주축을 이루었다. 그들은 각자 의병을 모아 1592년 7월 20일 700여명이 모여 보성관문에서 의병기치를 세웠다. 임계영을 전라좌의병장으로 추대하고 문위세는 양향관, 박근효를 참모관, 정사제를 종사관으로 하는 조직을 갖추고, ‘호(虎)’자를 장표(章標)로 삼고, 전라좌의병군이라 칭했으며 박근효는 문위세 매형 박광전의 장남이었다. 이렇듯 전라좌의병군 창의는 보성 임계영․박광전, 장흥 문위세와 남평문씨(유치면, 부산면) 일가가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기에 가능했다.

특히 중요한 사실은 박광전과 문위세 일가의 결합이라 하겠다. 장흥출신 대표 의병지도자였던 문위세와 박광전 관계는 처남과 매형의 인척관계였고 퇴계 선생 제자들이었기 때문에 전라좌의병 군세를 키우고 결속력을 강화하는데 큰 영향을 줬다.

문위세는 1592년 7월 1일 장흥, 강진, 해남, 영암 선비들에게 창의통문을 보냈으며, 두 형님(문위천. 문위지)과 부춘정(당시 청영정)에서 의병 일으키기를 협의하고 관산관(冠山官:장흥도호부 객관)에서 장흥도호부사와 의병 일으킬 것을 논의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래서 장남 문원개에게 집안의 가동(家僮)100여명을 동원하고 군량을 모으게 했으며 강진출신 무사(武士) 이충량을 자신의 부장으로 삼는 등 군대조직을 갖추고 매형 박광전과 협력체제를 구축했다. 임계영을 전라좌의병장으로 추대하고 7월 20일 보성에서 출진해 낙안- 순천-구례-남원으로 진군해 전라우의병(의병장 최경회)과 함께 남원에서 연합전선을 이루어 무주․진안․장수․금산전투에 1개월 동안 참전했다.

그리고 안동 도산서원에서 함께 수학했던 김성일 경상우도관찰사가 지원 요청하여 전라좌의병군은 곧바로 성주․개령 수복전투에 참전해 4개월 동안 큰 전공을 세웠다.

전라좌의병군 지도자 21명 가운데 7명은 문위세와 그의 아들(문원개, 문영개, 문형개, 문홍개), 조카(문희개), 사위(백민수)이다. 문위세 재종질(7촌) 문기방과 문명회는 선무원종 2등 공신에 책록되었고, 문위세와 그의 아들 문영개, 문홍개, 사위 백민수는 선무원종 3등 공신으로 녹훈되었다.

주제 강좌가 끝난 뒤 문평섭(강성서원보존 위원장)은 “ 풍암 문위세 다섯째 아들 문여개는 정유재란 때 용담지역에서 문원개․문형개․문홍개 형님과 함께 아버지 문위세를 함께 도와 일본군을 방어했으며, 명량해전에서도 문영개․문홍개 형님과 함께 참전했다”고 말했다.

문평열(전 장흥군의원)은 “풍암 문위세 선생은 생전에 일찍이 암대(岩臺)에 올라, 임금이 계신 북쪽을 바라보며, 사모하는 시를 읊었다.”며, “장흥군에서는 사군대(思君臺:현재 장흥댐 특산품판매장 앞 산자락)터에 정자를 복원해야한다”라고 건의했다.

사군대(思君臺) 원시(原詩)는 다음과 같다.

前川秋月引閑步 夜上岩臺望紫微(전천추월인한보 야상암대망자미)

앞 시냇가 밝은 가을밤에 한가로이 걸어가 암대 위에 올라 왕궁을 바라보니

北闕迢消迢息斷 終南渭水夢依依(북궐초초소식단 종남위수몽의의)

임금계신 곳 멀고멀어 소식마저 끊기니 남산과 한강만이 꿈속에 어른거리네. (자료제공 / 문병길 문화관광해설사, 장흥문화원 향토사 이사)

 


출처 : 장흥문화원, '풍암 문위세 일가 의병활동' 인문학 강좌 실시

장흥투데이(http://www.jhtoday.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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