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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고문집(DB)/■헌헌헌유고(軒軒軒遺稿)원문

[헌헌헌유고] 표지 및 설명

by 장흥문화원 관리자 2022. 8. 24.

 

 

 

軒軒軒先生文集

 

김여중 金汝重(명종111556~인조81630) 향년 75

 

조선 중기 의병장 공신. 는 자임(子任)이고, 는 헌헌헌(軒軒軒)이다. 본관은 靈光이며 전라도 장흥부 남면방 금화(全羅道 長興府 南面坊 金華) 392번지에서 살았다. 고사 터 유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증조부는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월봉(月峯) 김광원(金光遠), 조부는 형조좌랑(刑曹佐郞) 김귀수(金龜壽)이다. 생부는 사근도 찰방(沙斤道察訪) 김척(金惕)이고 양부는 부사과(副司果) 김열(金悅)이다. 貞敬夫人 竹山安氏 縣監 安彦龍의 딸이다. 젊어서는 領議政에 오른 思庵 朴淳에게 수업했다.

 

36세 때(선조241591) 辛卯 式年試 [進士] 12(2/100)했다. 우수한 성적이었으나 관직(官職)에 나아가지 않고 공부에 전념하며 특히 병서(兵書) 탐독에 집중하자 사람들이 비웃었으나 괘념치 않았다.

 

다음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아우 김여강(金汝剛) 종제 김의룡(金懿龍)과 함께 의병과 의곡(義穀)을 모아 의병장 임계영(任啓英)에게 보내었고 박광전(朴光前), 김익복(金益福), 이잠(李潛) 등과 함께 왜적과 맞서 싸워 크게 공을 세웠다. 이 일을 임계영이 조정에 보고하여 참봉(參奉)에 올랐다.

 

같은 해 9월 변사정(邊士貞)이 의병을 일으키자 다시 병사 300명을 모집하고 군량 80석을 모아 전력을 보강하고 이어 변사정을 따라 창원 방면의 적을 추격하였다. 이 때 아우 김여강(金汝剛)은 전사하였고 이를 본 공이 분함을 참지 못하고 돌진하여 적의 원수를 벨 때에 왜군이 밀려오므로 아우의 시체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다시 단신으로 적 수십 급을 베고 승리를 거두었다. 이러한 공을 변사정이 계문을 올려 이조참판이 되었다.

 

또 의주(義州)로 피신한 선조(宣祖)에게 3백석의 의곡을 서해안 뱃길로 전라도 영광 사는 의곡 도유사 광주 이씨(廣州李氏) 학매(鶴梅) 이굉중(李宏中)을 통해 임금과 신하가 굶주리고 있는 행재소로 보내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제수(除授)되었다.

 

1597년 실제로 또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이때에도 공을 세워 여러 차례 직첩(職帖)이 내려졌다.

 

軒軒軒先生文集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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