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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속의문화원/2018 언론보도

[언론]장흥동학지도자 이방언 친필 편지 확인

by 장흥문화원 관리자 2018. 4. 26.

http://www.namdo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71358


장흥동학지도자 이방언 친필 편지 확인

최혁 주필의 전라도역사이야기
40. 친필편지 확인으로 살펴본 동학지도자 이방언의 삶
유학자에서 동학지도자로 변신한 이방언

형장이슬로 사라진 장흥의 걸출한 동학 지도자
동학입문 전 유학자로서의 삶 드러난 편지확인

김희태 전남도문화재전문위원 각종 편지비교로
이정석이 이방언이라는 사실 입증 학술제 발표

편지는 동학 입도 전 면암 최익현에게 보낸 것
면암 제자 돼서 학문 배우고 싶다는 내용 담겨


 


22일 전남 장흥에서 열린 ‘성암 김재계선생의 항일독립운동과 장흥 동학’주제의 학술제에서 김희태 전문위원이 이방언 친필편지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김희태 위원은 천도교중앙총부가 주최하고 천도교 장흥교구가 주관한 이날 학술제에서 1890년 8월에 면암 최익현에게 보낸 이정석의 친필편지와 강진출신 학자 경회 김영근(1865~1934)이 최익현에게 보낸 1895년 2월 15일 편지, 김영근이 손지 홍재구(1845~1898)에게 1895년 3월 27일 보낸 편지들을 대조한 결과 이정석이 이방언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이방언의 이름은 1982년 발간된 <인천이씨대동보>에 이민석(李民錫)으로 올라 있다. 이방언의 또 다른 이름은 이정석(李正錫)으로 동학입도 전에 사용했던 이름이다. 동학도가 된 후에는 이방언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890년 8월 14일 이방언과 같은 동네인 장흥군 용산면 묵촌에 살던 친구 사복재 송진봉(1840∼1898)이 면암 최익현(1833∼1906)에게 보낸 편지에 이방언의 아버지 묵암 이중길(李重吉, 1797~1877)이 등장한다.
 

장흥 송진봉이 면암 최익현선생에게 보낸 편지. 이정석(이방언)에 대한 내용이 적혀있다.

송진봉의 편지에는 ‘묵암공은 이정석의 돌아가신 아버지’(菴公 卽李正錫先考也)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 묵암공은 이방언의 아버지 이중길의 호이다. 이정석이 묵암 이중길의 아들이고 이방언의 다른 이름인 것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에 따라 이방언은 동학입도 전에는 이정석으로 불렸으나 후에는 이방언이라 칭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편지에는 이방언의 부친 이중길과 노사 기정진(1798∼1879)의 교류 내용도 나온다.

김위원은 이번 연구에서 이정석이 1890년 8월 15일 면암 최익현에게 보낸 편지를 확인했다. 이 편지는 이방언 대접주의 친필 편지다. 편지에는 이방언이 중암 김평묵(1819~1891)의 문하에 들었다는 내용을 말하면서 수취인인 면암 최익현에게도 하루빨리 나아가 배우고 싶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제자 되기를 청한 것이다.
 

장흥지역 동학과 항일운동에 대해 위의환 선생이 발표하고 있다.

지금까지 이방언에 대한 자료는 동학지도자로서의 활동에 관한 것만 남아있었을 뿐이다. 동학입도 전의 활동상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번 이방언의 친필편지 연구를 통해 유학자로서의 이방언의 활동내용과 학맥 등이 알려지게 된 것은 상당한 성과다. 남다른 기개와 포부를 지닌 동학지도자로서의 면모뿐만 아니라 학문을 사랑하고 대학자를 흠모하는 학자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방언이 어떤 이유와 배경 때문에 동학에 입문했는지에 대한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송진봉의 문집인 <사복재집>에 실린 송진봉의 전(傳)과 유사(遺事) 에는 이방언이 동학에 입교하자 함께 수학하던 동문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동학에서 빠져나올 것을 설득하지만 끝내 듣지 않자 1892년 동문록에서 삭적(削籍)하고 교류를 끊은 내용이 기록돼 있다.

‘전(傳)’은 용서 유기일(龍西 柳基一, 1845~1904), ‘유사(遺事)’는 심능순(沈能舜)이 지은 글이며 삭적을 함께 논의한 동문은 학남 김우(1833~1910), 오남 김한섭(1838~1894)이다. 이정석(이방언)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논의했던 장소는 월산정사로 지금의 용산면 모산리에 있는 월산재이다. 송진봉의 편지는 최익현을 배향한 모덕사에 소장돼 있다.



■이방언은 누구인가?

석대들 전투 후 은신해 있다가 관군에 체포돼 처형당해

남도 땅 큰 싸움들 승리로 이끈 ‘남도장군’으로 불리기도
 

이방언. 조연희 화백 작품

동학농민혁명 당시 이방언은 장흥지역을 대표하는 농민군 지도자였다. 장흥의 핵심적인 동학지도는 이방언을 비롯 이사경, 이인환 등이 있다. 이들은 인천 이씨로 인천 이씨는 지역사회를 주도했던 성씨 가운데 하나였다. 이방언은 동학 입도 후 장흥 동학도와 농민들을 규합해 전봉준의 주력부대로 활동했다. 장흥의 향토사학자이면서도 동학연구에 괄목한 성과를 내고 있는 위의환씨는 이방언의 장흥농민군이 전방전투와 후방수비라는 두 가지 핵심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고 있다.

위 선생은 장흥 대덕지역 농민군 후손들의 구전과 박석교의 천도교 전승, 박기현의 <일사>의 내용을 살펴볼 때 2차 기포이후 전봉준의 대본영 전투에 이방언과 장흥 농민군 일부가 전봉준의 주력부대에 합류한 것이 확실하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즉 동학2대 교주인 최시형이 1894년 9월 12~13일 삼례에서 남·북접회의를 끝내고 돌아와 9월 18일 청산에서 각 포의 접주들을 불러 모은 뒤 힘을 합할 것을 지시하자 합류했다는 것이다.

이방언 대접주를 따라 북상한 장흥농민군은 대덕의 강일오가 지휘하는 부대와 관산접, 용산접, 부산접의 일부 병력인 것으로 추정된다. 박기현의 <일사> 9월 19일자 내용에는 ‘동학의 일곱 척의 배가 장흥과 강진 경계에 정박하고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는 장흥일대 도서지역의 동학군이 북상하기 위해 배를 이용해 대규모로 장흥으로 이동한 사실이, 그렇게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위의환씨는 일곱 척의 배가 정박한 그 장소를 현 대덕읍과 마량면(당시 대구면) 사이의 경계를 지목하고 있다. 즉, 장흥군 대덕읍과 강진군 마량면 경계에 있는 지방하천인 상흥천 일대다.
 

법무아문에서 작성한 이방언 판결문. 증거가 적확치 않아 무죄판결한다고 적혀 있다.

이방언 장군을 따라 북진했던 부대는 우금치 전투 패배 후 장흥으로 돌아온다. 관군과 일본군은 우세한 무기와 병력을 앞세워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면서 도망갈 곳이라고는 바다밖에 없는 해남지역으로 ‘토끼몰이’를 하고 있었다. 오지영의 <동학사>에는 전주출신 동학도 김동진(金東鎭)이 장흥 석대들 전투에 참가했다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는 증언이 나온다. 이는 이방언의 부대가 전북·충청전투에 참여했다가 후퇴하면서 타 지역 농민군이 이방언을 따라 장흥으로 유입됐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방언 장군 묘. 묘비에 남도장군 이방언이라 쓰여있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제공

이방언 농민군은 나주·광주 전투에서 패전한 최경선과 손화중의 농민군과 합류해 장흥지역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 농민군은 12월 1일 장평면 사창에서 이인환, 구교철의 현지사수 농민군과 합해져 대부대가 된다. 약 3만 명의 농민군이 모아지게 되는데 이 대규모 농민군은 벽사역 전투를 비롯 장흥성, 강진성, 병영성 전투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게 된다. 그러나 장흥지역 동학농민군은 14~16일 석대들 전투에서 참혹하게 패배했다. 일본군의 신무기와 잘 훈련된 병사들의 전투능력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석대들 전투에서만 1천 500백 명 이상의 농민군들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동학농민혁명에 있어서 석대들 전투는 우금치 전투 이후 최대 규모의 전투였다. 그렇지 않아도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군에 밀려 세가 줄어들던 동학농민군은 석대들 전투를 끝으로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방언은 석대들 전투에서 패한 뒤 남상면에 숨어 있다가 12월 25일 체포돼 나주로 압송됐다. 이후 서울로 압송돼 재판에 회부됐으나 무죄 석방됐다.
 

이방언장군이 처형당한 장대터. 지금 의 장흥서초등학교자리다
이방언 장군이 처형당한 장대터.
지금의 장흥서초등학교자리다. 한양으로 끌려간 이방언 대접주는 법무아문 재판에서 의외로 무죄판결을 받는다. 그러나 개화파의 조종을 받던 전라감사 이도재는 고향으로 돌아온 이방언 대접주를 붙잡아 사형에 처한다. 장흥 서초등학교 교정내 예향관 자리가 예전에 이방언 대접주가 목숨을 잃었던 자리로 알려졌다.

조선조정을 손에 쥐고 흔들어대던 일제가 이방언 대접주에 대해 무죄판결을 내린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보성으로 피신해 있던 이방언은 1895년 4월 당시 전라감사 이도재에 의해 다시 체포돼 그의 아들 이성호와 함께 장흥 장대(지금의 장흥서초등학교)에서 처형당했다. 이방언 대접주가 얻은 별호 및 직함 등은 장흥대접주를 비롯해 남도장군, 관산장군, 장태장군, 삼남도교장(三南都敎長) 등이다. <일청교전 종군일지> 12월 17일조에서는 이법헌(李法軒)이라 기록돼 있기도 하다. 법헌(法軒)은 ‘동학의 최고 어른이 있는 법소(法所)’라는 뜻이다.

자료 및사진제공 = 김희태 전남도문화재전문위원, 위의환 선생


/최혁 기자 kj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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