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30년 전 일본 유학 시절 어느 날 만주사변을 연구하던 일본 친구와 함께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는 길이었다. 둘 다 요코하마에 살고 있어 동경- 요코하마 간 고속도로 차 안에서의 대화 가운데, 각자 국내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서 그는 이토 히로부미를 선정한 데 대해 나는 안중근 장군을 택했다. “아니 그런 테러리스트를” 하고 반응하는 가장 친했던 일본 친구를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순간 너무 당혹한 나머지 더 이상 운전하기 어려울 정도로 패닉 상태에 빠졌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런데 2014년 1월 20일 일본 관방장관이 정례회견에서 아직도 “그는 테러리스트다.”라고 언급했다고 한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그대로 두고 어떻게 떳떳하게 3.1운동 100주년을 맞을 수 있겠는가?
1. 꿈의 태동
노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 주선으로 조인된 포츠머스 강화조약의 결과 한국 보호권, 요동조차권, 남만주 철도 등 이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제 일본은 한국의 주권을 강탈하는 데 열강의 보증을 받은 셈이었다.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한국에 파견하여 보호조약의 강제체결을 서둘렀다. 이로부터 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했고, 일본은 통감정치를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온 국민은 크게 분격하여 불법적인 조약의 무효화를 주장하고, 황성신문 사장 겸 주필이었던 장지연은 논설 ‘是日也放聲大哭’을 신문에 게재하여 국민 여론에 호소하였다.
한편, 그 무렵 한말의 위기적인 시대 상황은 어느 민족이든지 위기에 처한 시대일수록 흔히 나타나는 것처럼 각 부문에 걸쳐 민족부흥의 역할을 담당할 구국의 영웅 출현을 절실히 요망했다. 당시의 영웅 대망론은 열국 경쟁 시대에 세계와 분투할 영웅이 있어야 세계와 교섭하고 쟁투하면서 독립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하며, 워싱턴, 크롬웰, 비스마르크 등 서구 각국의 영웅들과, 광개토대왕, 연개소문, 최영, 이순신 등 민족사적 영웅들의 역할과 위업을 열거하였다. 더구나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잡고 자주독립의 근대 국민국가를 세우기 위해서는 새 시대의 국민적 영웅이 각계에서 나와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 대세였다.
하지만 이와 같은 영웅 대망론을 주장하던 신채호조차도 뒤에 영웅 사상에서 점차 벗어나 국민적 규모의 민족혁명을 고취하기에 이른다. 즉 신채호는 민족 독립운동의 전략으로서 민중과 폭력을 바탕으로 한 <민중적 혁명론>을 천명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그는 민중과 폭력을 민족 독립혁명의 필수적인 개념으로 정립시키고, 그중 한 요소만 결여해도 혁명은 실패로 끝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신채호는 <조선혁명선언>에서 보여 진 대로 <혁명의 길은 파괴부터 개척할지니라.>라고 전제하면서, 파괴와 건설의 변증법을 통해 미래의 이상적인 조국상을 제시하려 했다. 즉 먼저 反帝·反封建의 입장에서 전근대적인 속성에 대하여 과감한 파괴를 선언했던 것이다.1)
이와 같은 사회분위기 속에서 안중근(重根:성질이 가볍고 급하기 때문에 이렇게 지었음)은 1879년 황해도 해주 수양산에서 순흥 안씨인 안태훈 진사와 배천 조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 몸에 검은 점이 7개가 있어서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응하여 태어났다는 뜻으로 어린 시절에 응칠(應七)로 불렸다. 안 장군의 부친 안태훈은 학문에 뛰어나고 신학문에 뜻이 있어 개화파 박영효가 선발한 외국 유학생 명단에 올랐었다. 김옥균, 박영효 등이 주도한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박영효는 일본으로 피신했고 안태훈은 유학을 못 가고 체포 대상이 되었다. 그는 고향으로 피신해 재산을 정리하고 1885년 황해도 신천군 청계산 속으로 들어가 살았는데 이때 안 장군은 일곱 살 때로 거기로 이사해 자라면서 신학문을 공부하였는데 그의 집안은 오랫동안 해주에서 대를 이어 살아온 양반 집안이었다. 고려 후기 문신이자 유학자였던 안향의 후예로서 할아버지 안인수는 진해 현감을 지냈다. 그리고 상당한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여서 해주 일대에서는 부호로 일컬어질 만큼 재산도 풍족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더불어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영웅, 안중근장군은 자유분방하고 ‘의리’, ‘남아대장부’, ‘영웅’을 추구하였고 초패왕 항우를 추앙했다. 이처럼 전형적인 무골로, 어렸을 적부터 무술을 연마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사격의 명수였다. 놀랍게도, 그는 화승총을 쏘아 20보나 되는 곳에 놓인 동전을 맞추었다고 한다. 이처럼 그는 어린 시절 공부에 대한 관심보다는 사냥을 즐기며 장부로서 세상에 이름을 떨칠 뜻을 세웠는데 도산 안창호 선생의 연설을 듣고 문명개화와 국권 회복의 필요성에 눈을 뜨게 되고 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됐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과 친분이 있었던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안중근을 '안씨 집안의 총 잘 쏘는 청년'으로 묘사하였다. 또한 안 장군 자신도 어려서 조부의 가르침을 받고 8, 9년 동안 한문학교를 다녔지만 겨우 보통학문을 깨우칠 뿐이었다고 자평하였다. 안중근은 그의 부친이 문장으로 이름을 떨치는데 무식한 사람이 되려느냐고 학문을 권하는 친구에게 항우가 한 “글은 이름이나 적을 줄 알면 그만이다”라는 말을 상기시키며 “만고 영웅 초패왕의 명예가 오히려 천추에 남아 전한다. 저도 장부요, 나도 장부다”라며 야성을 키우는 포부를 드러냈다.
오늘날 후손들은 안중근 의사를 독립투사로만 알고 있다. 북한에서는 열사로 남한에서는 의사로 부르고 있다. 물론 그는 교육자이기도 했고 종교인이기도 했고 또 군인이자 사상가였기에 인물에 대한 총체적인 결과물로서 의사로 표기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의거는 개인의 의분에 의한 것이라는 느낌을 주며, ‘하얼빈 의거’ 당시 일본 측은 정치범을 파렴치범으로 몰기위해 일본 형법에 의한 일반살인죄를 적용코자 했음으로 의사라는 단어는 일본의 의도를 본의 아니게 충족시키는 꼴이 되는 것이다. 더구나 나이어린 아이들은 안중근 의사를 병을 고치는 의사로 아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안 의사의 호칭을 붓과 총을 동시에 들고 있는 성웅 안중근 장군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미 안중근 평화재단 청년아카데미와 사단법인 한민족평화통일연대는 순국 100년을 맞은 2010년, 국회의원 150여 명의 서명을 받아 ‘대한의군 대장 안중근 장군 추인식’을 열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최후진술에서도 “개인 자격이 아닌 대한의군 참모중장 자격으로 조국 독립전쟁 중에 적장을 사살하고 체포된 것이니 만국공법에 따라 마땅히 포로로 대우하라”고 요구했다. 이처럼 그는 내 신분이 이러하니 이 법을 적용하라고 한 것이다. 즉 1899년 제1차 만국평화회의 “육전포로에 관한 법”에 따르면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도 교전단체 적용대상이 됨을 알고 주장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쓴 휘호도 ‘爲國獻身 軍人本分’이다.
어릴 때부터 안중근 장군은 의협심이 강한 분이셨다. 누가 핍박받거나 억압을 받거나 권력으로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면 쫓아가서 항의하고 신변에 어려움도 많이 당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이었던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의협이란 것은 강자를 꺾고 약자를 일어서게 하고 공리(公理)를 유지하게 하는, 제일 굳세고 용맹한 장수”이며, “의협 있는 제공들이 떨쳐 일어나지 않았다면 어찌 사람으로 세상을 향해 얼굴을 들겠는가?”라고 하며 안중근, 이재명 등 7명의 열사를 언급하였다. 그는 이중 특별히 안중근을 더욱 높이 평가하였다. 그가 지은 『안중근전』에서 “안중근은 ‘지사(志士)’나 ‘열협(烈俠)’이라고도 말할 수 있으나 나는 이런 것이 안중근을 다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안중근은 세계적인 식견을 가지고 스스로 평화의 대표로 나선 사람이다.”라고 극찬하였다.
안중근 장군은 또한 많은 교육을 받고 앞서가는 신지식인이기도 했다. 이것은 안 장군이 직접 쓴 자서전을 보면 그의 교육 배경을 알 수 있다. 안중근 장군은 유교적인 가정에서 태어나서 전통적인 교육을 받으며 논어나 맹자와 사서삼경을 공부했다. 동시에 그는 안창호 선생, 헤이그 특사로 갔던 이상설, 프랑스 신부 빌렘(Joseph Wilhelm, 洪錫九) 등으로부터 서양의 지식도 섭렵했다. 안중근 의사의 자서전을 보면 사서삼경에서 나왔던 내용을 많이 응용해서 썼는데 이러한 책들과 미래를 열어가는 인물들과의 지적교류뿐만 아니라 길러진 야성이 있었기에 철학을 가진 독립전쟁의 실질적인 이행이 가능했다고 본다.
2. 꿈의 성장
이러한 안중근이 사회적 문제와 직면하게 된 것은 1894년 동학군이 일어났을 때였다.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황해도 관찰사 정현석과 해주감사가 청계동에 지원을 요청했는데 이때 16살의 안중근은 우수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박석골 전투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안중근은 이들을 백성을 약탈하는 무리로 보았는데, 당시 동학도였던 백범 김구도 황해도 일대의 동학군 기강이 상당히 문란한 점이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부친 안태훈은 동학군과 격돌을 벌였고 안중근은 선봉에서 활약하였다. 동학군을 퇴치한 후 동학군에게서 획득한 곡식에 대해 탁지부 대신 어윤중 등이 추궁하자 안태훈은 천주교 교당으로 피신했다가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안중근 장군도 1897년 도마(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받고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되어 20대 초반을 천주교 포교에 앞장섰다. 그는 프랑스 신부 빌렘(Joseph Wilhelm, 洪錫九)에게 프랑스어를 몇 달 배우다 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00년경 천주교대학 설립을 뮈텔(Gustave Charles Marie Mutel) 주교에게 요청했다. 그러나 뮈텔은 “한국인이 만일 학문이 있게 되면 교 믿는 일에 좋지 않을 것”이라며 반대를 했다. 그래서 안중근은 천주교를 통해 서양의 문물을 급속히 흡수하였으나, 그 와중에 천주교대학 설립 건을 두고 한국인을 무시하는 뮈텔 신부와 갈등을 겪으며 서양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안중근이 천주교를 신앙하되 주체적으로 판단하여 흡수하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안 장군의 신앙은 그의 사상을 세우는데 크나큰 역할을 했다. 만인평등과 같은 신앙적 배경과 유교적인 가풍에 따른 우리의 전통 그리고 자기 나름대로의 평화사상을 융화시켜 어떻게 하면 동아시아 공동체를 만들어 평화를 정착시킬 수 있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천주교 포교에 힘쓰고 있던 안중근은 러일전쟁과 을사늑약을 보며 ‘한국 독립’을 위해 매진하기로 결심하였다. 중국 망명을 시도했으나 뜻을 접고, 국내에서 삼흥학교를 세우고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을 맡는 등 애국계몽운동에도 참가하였다. 대구의 서상돈이 중심이 되어 전개한 국채보상운동은 당시 1천600만의 조선 인구에 380만이나 참가하였다니, 인구 5천만에 400만이 참여한 금모으기 운동보다 더 중요하였다. 이 운동에 안중근은 평안도 책임자가 되어서 어머니와 부인의 금비녀, 은수저, 은가락지까지 바치며 열심히 기꺼이 참가하였다. 그 결과 <동양평화론>의 동양평화회의체가 자율적인 순수민간 운동차원에서도 가능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등 그의 사상에도 깊은 영향을 끼치었다.2)
이처럼 그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토마스(도마)라는 세례명까지 받아 열심히 살았다. 그러나 의거 직후 살인자란 이유로 신자 자격이 박탈되었다가 순교 후 100년이 지난 2010년에서야 비로소 복권되었다. 순교 직전 천주교 신자로서 죽기 전 마지막으로 받은 의식인 종부성사를 요구했으나 당시 천주교 한국교구 전체를 관할하던 조선대교구장 뮈텔이 그의 요구를 거절한 일화는 유명하다. 이미 오래전부터 가톨릭교회 일각에서는,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했던 잔 다르크가 시성된 것처럼 안중근도 시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돼 시복(諡福)을 추진하는 작업에 착수했다고 한다. 염수정 추기경은 안중근의 동양평화 사상과 노력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다"며, 안중근을 "민족주의 관점에서만 평가되는 반쪽짜리 인간"으로 만들지 않기를 당부하였다. 이는 안중근이 명백히 사람을 죽일 목적으로 총을 쏴 살인한 것은 맞지만 그의 생애를 이토 히로부미 저격에 한정시키지 않고 처형당하기 전 마지막 시기인 ‘동양 평화를 위한 수인(囚人)기’ 등을 깊이 조명하면 성인으로 공경할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본 것이다. 아무튼 안중근은 어떻게 평화스럽게 살 것인가? 라는 방법론을 제시함으로서 새로운 신학(하나님의 뜻)을 실천한 것으로 생각하였으니 얼마나 위대한 생을 영위한 것인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일본이 우리나라의 자치적인 외교권까지 빼앗자 인재를 기르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한 안중근은 1906년에는 자신의 상점까지 팔아서 삼흥학교를 세웠고 곧이어 1907년에는 남포에 있던 돈의학교를 인수했다. 1907년에 안중근은 인재 양성에 힘을 썼지만, 국채 보상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그러나 정미조약이 강제되고 한일신협약에 따라 우리나라 군대가 해산되자 그는 교육으로는 한국 독립을 꾀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직접 무력행동에 나서기로 결심하고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가 러시아로 망명하였다. 그 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연해주를 떠돌며 의병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1908년 의병부대를 조직, 의병운동에 참가하면서 참모장까지 돼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안중근은 일반적으로 ‘의병’을 무식한 폭도라고 보았던 계몽 운동가들과 달리 의병에 대해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강토를 뺏고 사람들을 죽이는 자가 폭도입니까. 제 나라를 지키고 외적을 막는 사람이 폭도입니까. 이야말로 도둑놈이 막대기를 들고 나서는 격”이라며 의병의 정당함을 내세우고 일제의 의병학살을 비난하였다. 그는 “스스로 강한 힘으로 국권을 회복해야만 한다(以自强力 自復國權)”고 호소하였다.
국내에서 일본의 탄압이 점점 거세지자 안중근은 나라 밖에서 독립운동을 펼치기로 결심하고 29세 되던 해 연해주로 건너가 전제덕이 이끄는 부대에서 대한의군 참모 중장이 된다. 의병들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가 회령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으나 패하고 만다. 특히 안중근은 만국공법의 포로조항을 존중하면서 포로를 부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제 우리는 약하고 저들은 강하니 惡戰할 수는 없다.”며 풀어주었다. 즉 어진 것으로써 악한 것을 대적코자 하였다.
한편, 노브키에프스크에서는 국민회·일심회 등을 조직하였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동의회를 조직하여 애국사상을 고취시키기에 앞장서고 군사 훈련을 담당하였다. 독립 운동가들이 펴내는 <대동공보>의 일을 도우기도 했다. 그는 동포들에게 독립 정신을 심어주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 1909년에는 동지 12명과 함께 ‘단지회’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한일합방의 핵심 인물인 이토 히로부미와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을 암살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안 장군은 30살이던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장관 V.N.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하여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인 기자로 가장, 하얼빈 역에 잠입하여 역전에서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던 이토 히로부미에게 3발을 명중시킨 후 총을 내던지고 품속에서 태극기를 꺼내 펼치고는 "대한제국 만세(Корея! Ура!)"를 불렀다. 이 순간 현장에서 러시아 경관에게 체포당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그의 전 생애를 설명해주는 대목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다만 안중근 본인은 이 일을 의거가 아닌, 김두성의 명령을 받고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신분으로 적국의 장수를 공개리에 처단한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그가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한 것은 그의 종교성에서 나왔다. 그래서 나쁜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음으로 도망가지도 않았는데 우리는 아직도 ‘이토 히로부미 암살(assassination)’이라고 잘못 말한다. 실제로 안중근은 대한의군 소속으로 활동했다. 안중근과 거사를 함께한 유동하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거사일 당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을 몰랐다고 한다. 알고 있는 것은 대략적인 얼굴상과 특징뿐이었는데, 사진을 구하기 쉬운 때도 아니었거니와, 이토 히로부미가 원태우의 돌팔매에 중상을 입고 죽을 뻔했던 일을 겪은 뒤로 자신의 사진이 시중에 나도는 것을 극히 제한했기 때문이다.
플랫폼에 이토가 하차했을 땐 워낙 많은 수행원들이 함께하여 도저히 누가 이토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래서 체념하던 순간에, 이토의 하얼빈 방문을 환영하는 현지 일본인 환영객들 중 누군가가 이토의 이름을 부르자 이토가 뒤를 돌아서서 손을 흔들어준 덕분에 안중근이 이토의 얼굴을 확인하고 브라우닝(FN M1900)권총으로 3발 저격했고 그 주위의 일본 측 인물도 4발 저격했다. 3발 모두 급소를 맞췄다고 한다. 그리고 남은 총알로 일본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 俊彦), 이토의 수행비서 모리 다이지로(森 泰二郞), 만주철도 이사 다나카 세이타로(田中 淸太郞), 만주철도 이사 나카무라 요시히코(中村 是公)를 맞췄다. 그리고 총알 한 발을 남기고 체포된다. 안중근의 저격을 받은 이토 히로부미는 얼마 후 사망한다. ‘한국병합사 연구’라는 책을 낸 운노 후꾸쥬 동경대 명예교수는 안중근이 의거하지 않았고, 제3의 저격자가 하얼빈 역 2층에서 쐈다고 하면서 총알의 방향이 다르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 야마구치현 히카리시의 한 박물관에서는 이토가 사망했을 당시에 입고 있었던 내복을 보관하고 있으며 그 내복을 통해 어디에 총탄을 맞았는지 알 수 있다.
공판 과정을 통해 일제의 잘못을 꾸짖고 자신의 정당함을 널리 알리려던 안중근의 시도는 일제의 부당한 공판 진행으로 억압되었다. 그는 “언권이 금지되어 내가 목적한바 의견을 진술할 도리가 없었다. 모든 사태는 숨기고 속이는 것이 현저했다”며 일본이 이렇게 자꾸 감추려고 하는 태도는 일본 스스로 자신의 부당함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재판과정에서 자신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은 “공법공사(公法公事)”에 의한 것이지 “사정사혐(私情私嫌)”에 의한 것이 아니라며, 검찰관이 자신의 행동을 자꾸 개인적인 오해나 사적인 감정으로 몰고 가는 것에 대해 분노하였다. 또한, 일본인 변호사가 안중근의 행동이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며 변론하자 그는 “이토의 죄상은 천지신명과 사람이 모두 다 아는 일인데 무슨 오해란 말인가. 더구나 나는 개인으로 남을 죽인 범죄인이 아니다. 나는 대한국 의병 참모중장의 의무로 소임을 띄고 하얼빈에 이르러 전쟁을 일으켜 습격한 뒤 포로가 되어 이곳에 온 것이다. 여순구(旅順口) 지방재판소와 전연 관계없는 일인즉, 만국공법과 국제공법으로 판결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다.2)
원래대로라면 러시아에서 수완을 쌓은 독립운동가 최재형의 지원을 받아 제삼국인 러시아에서 공정한 재판을 받아야 하였으나, 일제의 압력에 의해 뤼순에 있는 일본 법원으로 송치되고 만다. 의거 소식이 들리자 한국은 물론 러시아·영국·스페인, 심지어 일본에서까지 수많은 국제 변호사들이 안중근의 변론을 맡겠다고 몰려들었다. 그러나 선임이 불허되었고, 법치국가인 것처럼 보이기 위한 일제 측의 완전히 형식적이고 진짜 변호는 안 하는 관선 변호사가 변론을 맡게 된다.
1910년 2월 14일에 사형선고를 받았고, 이후 3월 26일 오전 10시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하기 직전, 운명의 날에는 비가 눈물처럼 내렸지만, 형장에 서서 기뻐하며 말하기를 "나는 대한독립을 위해 죽고, 동양평화를 위해 죽는데 어찌 죽음이 한스럽겠소?"하였다.
그는 유언으로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는 말과 함께 자신의 유해를 하얼빈 공원에 묻었다가 고국이 해방되면 그때 고국의 땅에 묻어달라는 말을 남겼다.
유해는 뤼순 감옥 인근 죄수 묘지에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은 안중근 장군이 죽어서라도 영웅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무덤에 대한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안중근 장군의 유해는 아직도 발견되지 않았다. 김구는 안 장군의 유해를 찾으려 시도했으나 암살당하며 흐지부지 끝나버렸고 유해발굴에 호의적이던 장제스가 국공내전에서 패전, 이후 공산 중국의 성립과 한국전쟁, 냉전으로 중국과 교류가 끊기다시피 해 남한 측 주도로 찾는 것은 사실상 기대할 수가 없어졌다. 공산화된 중국과 우호 관계를 유지한 북한의 경우 안중근을 높게 평한 김일성은 1970년대에 직접 주석명령을 내려 안중근 장군의 조카인 안우생 씨를 단장으로 하여 조사를 벌였고, 1986년에도 북한은 대규모 유해발굴단을 보내 조사를 벌였다고 하며 물론 둘 다 성공하진 못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한중일 공동유해발굴단의 결성을 마지막 기회로 보고 의제로 추진하게 되었으나 이렇다 할 결실은 거두지 못한 채 흐지부지 끝나 버렸다. 결국, 안중근은 고국이 광복을 맞이하였음에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유해의 회수에 실패하였기에 효창공원의 삼의사 묘역에 가묘로 비도 없이 모셔져 있으나, 안 장군의 증손자는 유해가 되돌아오면 묻힐 곳은 남북이 서로 마주 보고 바라볼 수 있는 38도선 상이라고 언급했다.
3. 꿈의 미완성
안중근 의사 기념관 정원에 세워져 있는 대표적인 어휘록 중 하나로서 ‘인무원려난성대업(人無遠慮難成大業)’이 있다. 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못하면 큰일을 이루기 어렵다는 뜻이다. 사람이 멀리 생각하는 것이 없으면 반드시 가까운 곳에서 근심이 생긴다는 공자의 ‘인무원려필유근우(人無遠慮必有近憂)에서 인용된 것이라고 한다. 당장 눈앞에 일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큰 목표를 세우고 멀리 생각하면서 살라는 말씀이다. 사재를 기울여 구국교육운동에 투신한 안 장군은 이들 학생이 훗날 조국독립의 전사가 되기를 기원하였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말씀에서 안중근 장군의 동양평화론과 같은 원대한 구상도 꿈꿀 수 있었다. 20세기 초였던 당시 서양세력이 동양으로 뻗쳐오는 화난을 동양 인종이 일치단결해서 극력 방어해야 함이 상책임은 어린아이라도 아는 일이라고 했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일본은 같은 인종인 이웃 나라 한·청과 우의를 끊어 스스로 방휼(蚌鷸)의 형세(도요새가 조개를 먹으려고 껍데기 안에 주둥이를 넣는 순간 조개가 껍데기를 닫는 바람에 도리어 물려서 서로 다투며 양보하지 않음을 나타내는 말)를 만들어 어부를 기다리는지 알 수 없다고 하면서, 동양평화 문제에 관한 구상을 제안하였다. 이처럼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외롭게 동양평화를 지켜내고자 했던 안중근 장군은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이자 진정한 평화주의자였다. 『안응칠역사』와 쌍을 이루는 것이 바로 그의 사상적 정화인 『동양평화론』인데, 그가 항소를 포기하고 『동양평화론』 저술을 위해 사형집행 일자를 한 달만 늦춰 줄 것을 요구하자 어찌 한 달뿐인가라고 말하였지만, 결국 서론과 본론 4절 중 제1절만을 남겨둔 채 사형을 맞이하였다. 대한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한 마지막 당부를 남기고자 한 작은 바람도 이뤄지지 못했다.
현대 역사학자들은 <동양평화론>이 최근 나오고 있는 동아시아 통합 논의에도 유효할 정도로 현대적이라는 평가를 하고 있다. 안 의사는 동양평화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또 공존하는 방법이 무엇인가 하는 고민을 했다. 여기에 안중근 의사는 중국 쪽이 가지고 있던 생각이나 일본이 가지고 있던 대동아 공영권과는 아주 다른 방법으로 동양평화를 주창했다. 그러면, 똑같은 동양평화를 외쳤던 이토 히로부미와 안중근의 주장 과 비교해 본다. 1905년 11월 15일,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에게 “동양의 평화를 영원히 지키려면 한국과 일본이 튼튼히 맺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1910년 2월 7일, 뤼순법정에서 안중근은 재판관에게 “이토를 죽인 것은 한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 한 일이오.”라고 말했다. 두 사람이 말하는 평화는 서로 너무도 달랐다. 일본은 러일전쟁을 벌이는 이유로 한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들었다. 서양 강대국이 한국을 차지하면 동양의 평화가 깨지니까 일본이 맞서 싸운다는 주장이었다. 당시 러시아를 두려워한 많은 한국인이 일본의 말을 사실로 믿고 일본군을 응원했다. 안중근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일본은 러일 전쟁이 끝나자 또다시 동양평화를 들먹이며 을사조약을 강요했다. 동양평화를 위해 한국을 보호한다더니 외교권을 빼앗아 갔다. 게다가 고종 황제를 내쫓고 군대까지 해산시켰다. 전국에서 일어난 수많은 의병은 일본군의 총에 비참하게 죽어 갔다. 식민지 확장의 도구로 주장한 이토 히로부미의 동양평화론에 대해, 안중근은 일본과 이토 히로부미가 남의 나라를 침략하여 동양평화를 해쳤다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이토 히로부미를 없애기로 마음먹고 러시아로 가서 ‘대한의군’을 만들었다. 그리고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 역에 나타난 이토 히로부미에게 방아쇠를 당겼다.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뤼순 감옥에 갇힌 안중근은 ‘동양 평화론’을 써 내려갔다. 비록 완성은 못했지만 안중근의 생각이 고스란히 담겼다.
이태진 서울대명예 교수는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이 독일 철학자 칸트의 저서 《영구평화론》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일본 호세이대마키노 에이지(牧野英二) 교수도 같은 주장을 펼친 바 있다. 그래서 ‘안중근은 동양의 칸트다’라는 말도 나왔다. 칸트는 1795년 출간한 《영구평화론》에서 다른 나라의 주권을 빼앗고 강대국 몇 나라가 모이는 방식의 '국제국가'가 아니라 각국의 영토와 주권을 보장하는 형태의 '평화연맹'을 구상했다. 이는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1918년 제창하고 1920년 창설된 국제연맹의 사상적 근거가 되었으며, 나중에 오늘의 UN을 낳게 되었다. 이태진 교수는 "안중근이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접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안중근은 자서전인 〈안응칠역사(安應七歷史)〉에서 프랑스인 신부 조셉 빌렘(Joseph Wilhelm·洪錫九)으로부터 프랑스어를 공부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 교수는 "《영구평화론》은 당시 프랑스어 판본이 있었고 알자스·로렌 지방 출신인 빌렘 신부가 이를 안중근에게 전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또한 대한매일신보나 황성신문에 일부 소개된 동양의 사상과 학문의 황제 중국 양계초가 쓴 한문번역본도 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안중근은 윌슨의 국제연맹보다 10년 앞서 자주생존권을 보장하는 평화공존의 국제주의를 주창했다"며 "시대를 읽는 통찰력을 가진 사상가로서 안중근을 재조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마키노 교수는 이 같은 안 의사의 평화사상이 칸트의 '영구평화론(永久平和論)'과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고 분석했다. 안중근 의사가 한국에서 중국·러시아로 이동하며 일본군과 싸우는 과정에서 최신의 국제 정세를 두루 살펴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먼저 '평화를 위해선 뛰어난 교육을 통해 도덕적인 인간을 육성해야 한다' '국제적인 경제 교류의 촉진이 평화 실현에 기여한다'는 생각에서 칸트와 안중근의 사상은 일치했다. '무력에 의해서는 진정한 평화의 실현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두 사람 모두 간파하고 있었다. 전쟁은 결코 정치의 일환이 아니라, 국가 간 정치적 교섭의 파탄이거나 한계를 넘은 것이라는 생각에 닿아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세계 정보에 숙달하고 학구적이었던 안중근 장군이 당시 칸트의 사상을 일부 접했을 가능성도 있는데, 그렇다면 안 의사는 칸트 사상을 실마리로 삼아 그것을 독자적인 동양평화론 사상으로 승화시킨 것"이라고 했다. <동양평화론>의 골격중의 하나로 ‘영구평화론’을 보면 나라마다 민주 공화제의 독립국으로 이루어진 국제적인 연합체를 만들고, 그 연합체가 개별국가의 독립성을 보호해주는 방식이다. 그런데 안중근은 민주 공화제 국가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서 UN과 같은 정부대표는 따로 있고 민간단체의 시민대표가 자율적으로 모이는 동양평화회의체가 상부기관이 되어 움직이는 EU보다도 더 진보된 형태라 할 수 있다.
마키노 교수는 "안중근 장군이 세례를 받았던 프랑스인 빌렘 신부는 20세기 초까지 독일령이었던 알자스·로렌 지방 출신이었고, 안 장군을 면회하러 뤼순 감옥을 방문했을 때 독일어를 썼다는 기록이 있다"고 했다.
안중근은 1909년 11월 2일 수감된 뤼순감옥에서 〈동양평화론〉 집필을 시작했으나 이듬해 3월 26일 사형이 집행되어 미완성 원고로 남고 말았다. 그러나 안중근은 2월 14일 사형선고가 내려진 3일 뒤인 2월 17일 히라이시 우지히토 (平石氏人) 고등법원장 면담에서 동양평화론의 주요 요지를 밝혀 법원서기가 기록한 〈청취서〉 형태로 남아 있다. 안중근은 이 면담에서 다른 나라의 국권을 빼앗고 일본이 맹주가 되는 동양평화론은 침략의 구실일 뿐이라고 비판하고 자신의 동양평화 구상을 밝힌다. 구체적으로는 ▲2개 국어 이상 교육함으로 서로 연대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한·중·일 3국 연합군단 편성 ▲일본이 점령한 뤼순·대련을 중국에 반환하고 뤼순의 공동 군항화와 그곳에 동양평화회의체 구성 ▲3국의 공용 화폐를 발행하는 공동은행 설립 ▲은행 설립 비용은 수억의 동양인이 회원이 되어 1엔씩 모금 ▲일본의 지도로 상공업 발전시키고 3국의 협력 하에 산업화와 경제공동체가 성공하면 인도·태국·월남 등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회원국을 확산한다는 구상이다. 한국과 중국 및 일본의 군대가 아닌 동아시아 공동 군대를 조직하고, 공동 은행의 설립 및 공동 화폐를 만든 것은 칸트의 ‘영구평화론’의 수준을 훨씬 넘어선 것이다. 이것은 EU의 아버지인 쟝 모네의 사상과 비슷하다. 즉 쟝 모네는 독일과 프랑스를 오고 간 알자스·로렌지방은 석탄과 철강의 보고이므로 그 지역을 장악하면 유럽을 장악한다는 생각에서 1.2차 대전이 일어났으므로 유럽이 공동으로 관리하자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런데 안중근 장군은 반세기 전에 동양의 뤼순을 유럽의 알자스·로렌으로 본 것이다. 즉 뤼순은 한국에게는 을지문덕 장군이 진을 치고 당나라 수군을 물리친 지역으로 얼마 전까지 고려성이라는 옛 이름이 남아있었다. 중국은 그 지역을 뺏기면 만주를 다 뺏긴다고 여겼다. 또한 러시아가 부동항을 찾아 남하정책으로 노리는 지역이고 일본의 대륙침략의 전략적 거점이었다. 그래서 안 장군은 뤼순을 분쟁의 초점으로 보고 동양평화회의의 본부를 거기에 두고 공동 관리함으로서 협력의 초점으로 만드는 전략적 이론을 개발한 것이다.
안중근의 동양평화공동체 구상은 현재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동아시아공동체론'보다 100년 앞선다. 이태진 교수는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당시 시점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며 "유럽공동체보다도 70년이나 앞선 평화공동체 구상"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또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획기적인 것으로 한국이 세계에 자랑할 만한 평화사상"이라고 말했다.6)
장인봉 신한대 공법행정학과 교수는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유럽통합론과도 닿아 있다고 주장한다. 장 교수는 유럽연합(EU)을 구성한 유럽통합론과 <동양평화론>이 △평화회의체 건설 △공동기금 조성 △공동은행·공동화폐 △공동 군대 창설 △공동언어 상호문화 존중 등에서 닮아있다고 했다. 다만 유럽연합도 공동 군대 창설엔 실패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미 유럽연합은 경제공동체를 거쳐 정치적 통합으로 나가고 있으며, 오래전부터 공동화폐를 사용하고 있다. 안중근 장군은 경제적 공동체의 기반 없이 동양평화도 요원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장 교수는 이어 “지역적 차원의 거버넌스를 구성하자는 현대적이고 합리적인 의미의 발상”이라고 평가하면서, 이런 공통점에 착안해 지역 거버넌스를 구축하고 평화 체제를 정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현재 동북아의 경우 개별 국가가 독자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사회적 정치적 이슈를 효과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장 교수는 이를 위해 △파트너십 △운영법칙 △조정 △상호의존성 △신뢰 등 5가지 원칙을 제안했다. 그는 “동북아 각국이 갖고 있는 강한 민족주의적 역사인식을 극복해 네트워크를 형성해야 한다.”며 “지역 거버넌스 운영규칙을 3국이 함께 합의해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조정은 지역 거버넌스 작동 과정에서 발생될 수 있는 제반 문제의 자율적인 조절 및 해결기제를 의미하고, 이는 미국의 역할과 함께 논의돼야 할 것”이라고 했다. 아울러 “상호의존성은 실질적으로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역설했다. 장 교수는 “최근 남한과 북한의 평화, 화해 무드에 비해 일본의 우경화 조짐 등 동북아의 정세는 매우 복잡하다”며 “동북아 국가의 주체적 연대가 얼마나 중요한지 재조명하고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이 미완성으로 남아 있지만 우리가 완성작품으로 채워갈 수 있는 노력이 절실한 시기”라고 강조했다.
4. 꿈의 완성을 위한 해동사
장흥의 죽산 안씨 덕분에 국내에서 유일하게 안중근 장군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일본에서도 제사를 모시는 곳이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없음을 안타까워했지만, 제가 태어난 1955년에 벌써 전남 장흥에서 사당이 이미 지어진 것을 보고 반가웠다. 이제 장흥군이 이곳을 역사체험교육의 공간으로 조성해 안중근 장군의 꿈에 대한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널리 알리겠다는 계획에 나도 동참하고 싶다. 왜냐하면 안중근 장군님의 미완성인 “동양평화론”을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연구해보고 싶은 소원이 있기 때문이다. 안중근 장군님의 사당이 있는 해동사에 이승만 전 대통령이 직접 써 내려준 편액 해동명월을 보니 안 장군님의 옥중 한시가 떠오른다. 이 옥중 한시는 안 장군이 1910년 3월 사형집행을 앞두고 흔들림 없는 심경을 술회한 자작시이다. 이 한시 속에 나오는 해동의 밝은 달처럼 안 장군님의 정신은 우리 시대를 열고 나갈 사상적 에너지이므로 더욱 널리 알리고, 오늘도 내일도 조국을 위해 환하게 비추게 하리라.
옥중 한시
북녘 기러기 소리에 잠을 깨니
홀로 달 밝은 누대 위에 있었다.
언제고 고국을 생각지 않으랴
삼천리가 또 아름답다
형제의 백골이 그 삼천리 땅 속에 의의하고
父祖는 청산에 역력하다
우리 집에는 무궁화가 만발해서 기다리고 있고
압록강의 봄 강물은 돌아가는 배를 가게 해 준다
남자가 뜻을 육대주에 세웠으니
일이 만약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죽어도
조국에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海東에 밝은 달은 선생님의 얼굴이요
북풍 맑은 곳은 처사가 있는 곳
붉은 꽃, 푸른 버들은 작년 봄과 같고
여름이 지나고 서늘함이 생기니 가을이 왔구나!
남자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바른 마음을 속일까보냐
판사 검사가 어찌 나의 속마음을 알까
원수는 갚았고, 곧 외로운 혼은 땅에 떨어진다
지금, 최초라는 타이틀이 붙은 안중근 기념시설은 ‘안중근 사당’이 유일하다. 장흥군 장동면에 바로 이 안중근 사당인 해동사가 자리하고 있다. 해동사와 함께 정남진에 안중근 동상이 서 있다. 재미있는 건 정남진 동상에서 해동사를 거쳐 북쪽으로 계속 올라가면 안 의사 의거현장인 하얼빈 역이 나온다. 이곳들이 모두 동경 126도 자오선 축선 상에 위치함은 우연의 일치일까? 이것은 마치 일본 미야기현에 사는 간수였던 치바 도시치(千葉十七)가 15년 동안 매일 안 장군님을 추모하면서, ‘서산 저 멀리 아스라하게 보이는 길에 다다르면 안 장군님이 잠든 요동반도의 남단에 도달하겠지’라고, 우연히도 뤼순과 위도가 거의 같은 고향 서산의 석양을 바라보며 그리워했던 것처럼 말이다. 전국 자치단체마다 지역개발소재 발굴에 열심이다. 없는 곳은 새로 만들어가지고라도 어필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런데, 장흥은 어떤가? 대한민국 최고의 역사자산인 안중근장군을 일찍부터 모시고 있다. 다른 곳이 이제 안중근 사당을 만든다고 해도 어찌 해동사에 비하겠는가?
그런데 지난 2월 26일자 유력 모 지방일간지에서 “장흥 안중근 의사 관광개발사업 논란”이라는 제하의, 부제 “지역적 연고성 없어 애물단지 전락 우려”등의 제목으로, 장흥군이 추진하는 안중근 의사 관광개발 사업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보도를 본 적이 있다. 관광개발사업의 일례로서 일본 기후현에서는 욘사마(배용준)가 인기 절정일 때 강원도 춘천 공원에 앉아서 드라마를 촬영했던 의자를 가져옴으로 일본 전국으로부터 엄청나게 관광객이 모여 들었던 사실을 기억한다. 엊그제는 외교협회의 전직대사들과 함께 아산 현충사와 당진 버그네 순례길을 다녀왔다. 장인의 영향으로 무과로 전직한 이순신 장군의 처가가 있던 자리에 현충사가 들어서 최대의 관광명소가 되었고, 김대건 신부의 생가 자리라는 인연으로 교황까지 동상을 남기고 다녀갔으며, 솔뫼, 합덕 등 성지에는 꺼먹지 정식 및 두렁콩 밥상 등 전통식단이 관광객을 즐겁게 하고 있음을 보았다. 이처럼 모티브가 중요한데 이미 장흥에는 성웅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의 신화를 일군 전진기지가 바로 장흥에 있다니, 또 다른 성웅 안중근 장군을 개발한다면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그 성웅 이순신 장군이 바로 조선함대의 12척으로 조선 수군 재건 육로의 종점이자 수로의 시점이었던 호국의 영지(領地)였던 회령포(지금의 회진면)가 그곳이었다. 그러므로 안중근 장군 성지로서 추진되는 ‘안 장군 성지화’사업이 회령진성의 복원사업과 연계된다면, 장흥은 가히 명실상부 ‘애국·호국의 영지’로서 ‘민족과 역사의 체험교육의 메카’로 자리 잡게 될 것이다.
그렇다. 안중근 장군 사당에 대한, 관광자원화 사업을 본격화한다는 것이 정종순 장흥군수의 방침이다. 대한민국의 근세사에 최고의 영웅이요 위대한 독립투사였던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 정신’이 대한반도 최남단 정남진 장흥으로 내려와 안착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동사 일대 성역화사업이 추진되어 기념관이 세워지고 기념공원이 들어선다면 전국의 많은 분들이 정남진 장흥 땅을 찾으리라고 본다. 그리하여 안중근 장군의 애국정신을 우리 후손들에게,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더욱 알려주고 계승 발전시키는 그런 살아있는 역사 교육의 현장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만약 안중근 선생이 순국하지 않았다면 한반도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역사학이 if를 허용하지 않는 이유로는 이순신이 아니더라도 원균이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었을 것이다, 라고 말하거나 일제가 아니더라도 조선은 어느 나라에든지 먹혔을 거다, 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약무호남시무국가’라는 이순신 장군님의 말처럼 만약 안중근 장군님의 뜻이 없었더라면 삼일운동의 정신이 태동했을까? 라는 질문을 던져보지 않을 수 없다. 문약한 조선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안중근 장군의 하얼빈 의거 정신과 그 위업이 있었기에 3.1운동의 대표인 손병희 선생의 3戰論이 나올 수 있었고 2.8 독립선언에 이어 3.1혁명으로 학생들이 앞장서 뛰쳐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2018년 4월 20일에 일본 외무성 공문서관과 러시아 극동문서보관소 하바로프스크 도서관에서 ‘한국주차군 참모장 아카시 모토지로 보고’라는 문서가 발견되었는데, 일본군 참모장이었던 아카시 모토지로(1864∼1919)가 중국 현지 밀정들을 통해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동 문서에서는 안중근이 1906년 8월 고향을 떠나 간도 용정에 망명한 것은 당시 간도에서 서전학교를 세워 운영하고 있던 이상설의 문하생이 되기 위해서였다고 적고 있다. 보고서 말미에는 ‘조선통감부 촉탁경시 사카이의 신문’에서 안중근이 이상설을 두고 “포부가 매우 크며 세계 대세에 통해 동양의 시국을 간파하고 있다. 만인이 모여도 상설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호평하고 있어, 안중근의 사상에 이상설이 얼마나 영향을 크게 주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과 러시아가 Great Game을 벌리던 시대에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김으로 침략이 운명 지워진 마당을 몸으로 체험한 이상설에게 배운 것이 행운이었다. 즉 1907년 고종의 명을 받아 헤이그 특사로 가서 처절한 국제정치 현실을 몸으로 체험한 그를 가장 존경하고 많이 배웠을 것이다.
또한, 안중근은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의 입장에서 일제 식민통치의 전근대적인 속성에 대하여 과감한 파괴를 선언한 신채호의 사상에도 영향을 입은 듯하다. 즉 신채호의 사상은 일제의 침략이 대두, 심화되었던 한말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국권 수호의 인식에서 성립되었다. 그의 민족자강론이나 애국적인 영웅 활동을 강조하던 영웅사관에서 일전하여 민중사관과 폭력항쟁을 전제로 민중을 역사와 사회발전의 주체로 인식하는 저항적 민족주의에서 말이다.
우선 안중근 장군이 독립의 의지를 보여준 하얼빈 의거는 윤봉길, 유관순, 이봉창, 송학선(사이토 총독 암살미수), 조안득(총독 폭사기도) 등 국내의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의 롤 모델이자 중심 멘토가 되었다. 또한 국외에서도 시베리아의 눈보라 속에서 하얀 말을 타고 늘 앞장서서 항일빨치산을 지휘했던 전설 속의 김경천 장군도 1909년 일본 육사 입학을 앞두고 동경근교에서 대항연습을 하다가 ‘이토 히로부미 암살’이라는 호외가 나돌며 동경시가 떠들썩했음을 보았다고 한다. “나는 가슴이 덜컹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한 이는 安應七씨라 한다. 나는 자세히 모르나 아! 위대하다. 우리도 사람이 있구나!”하고 속으로 감격해서 외쳤다고 한다. <경천아일록>을 일기체로 기록한 김경천 장군은 이렇게 광무제(고종) 시기에 주일 대한제국 유학생으로 갔다가 1910년 6월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일본 장교가 된 후, 3.1운동 직후 일제에 빼앗긴 조국을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만주로 망명하였고 얼마 후 연해주로 옮겨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일관된 헌신과 희생의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런데 오랜 역사적 단절로 인해 그분의 행적은 그동안 우리나라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비서출신 최경환 교수는 "안중근 장군의 ‘동양평화론’의 내용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구상했던 ‘동아시아공동체’ 형성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주었다"고 지적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경제공동체로 시작하여 유럽연합(EU)과 같은 지역공동체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1998년 대통령 재임 중 아세안+3 정상회의에서 동아시아공동체(EAC) 구상을 제안했다. 김 대통령은 퇴임 후 동아시아공동체 논의가 동아시아포럼(EAF), 동아시아정상회의(EAS)로 발전하는 것을 보고 더욱 크게 희망을 가졌다. 그리고 장차 정치적 공동체로까지 나가는 과정에서 동아시아 국가들의 교류와 협력, 우호와 친선을 바탕으로 하는 동아시아인들의 결집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안 장군님을 생각하는 자세나 밝게 나타내는 일은 사실 뜻있는 일본인들도 마찬가지다. 안 장군님이 사형당한 뤼순(旅順)형무소의 담당 교도관이면서 헌병 대원이었던 치바 도시치(千葉十七)는 안 장군으로부터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이라는 휘호를 받고, 나중에 귀국한 뒤 미야기(宮城)현의 다이린(大林)사에 안 장군님의 위패를 모셨다. 안 장군의 사형집행 명령을 하달하면서 벽에 머리를 들이받고 통곡했다는 사람이다. 그 절 앞에는 안 장군의 이 휘호를 새긴 추모비가 서 있고 매년 추도식도 열린다. 유묵 원본은 한국에 기증됐다.
또 뤼순 형무소장이었던 구리하라 사다키치(栗原貞吉)는 법원장과 재판장에게 선처를 탄원한 일이 있다. 안 장군님이 흰 한복 차림으로 죽음을 맞고 싶다고 하자 부인에게 한복을 짓게 해 입도록 했다고 한다. 안 장군님 사후엔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사망할 때까지 공직을 맡지 않았다. 당일 입은 옷은 상하의 모두 조선에서 만든 명주옷이었다. 안 장군님 통역이었던 일본인 소노키 스에키(園木末喜)은 만주일일신문에 ‘안중근의 최후’라는 제목으로 기고했으며, 소노키는 안 장군님이 간직했던 마지막 유품인 가족사진을 보관해왔다. 안 장군님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라는 ‘일본의 영웅’을 저격한 인물인데도 일본인들 중에는 이렇게 안 장군님을 존경하고 추모하는 사람들이 많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1919년 3·1독립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그리고 대한민국에 면면히 계승되고 있다. 기미독립선언서는 동양평화·세계평화·인류행복을 바탕으로 하는 공존동생권(共存同生權)을 천명했다. 3·1운동 직후 수립된 상해 임시정부는 민족평등·국가평등·인류평등의 대의(大義)를 선언한다. '대한국인(大韓國人)' 안중근이 그토록 염원했던 자주독립국가 대한민국은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을 헌법 전문에서 천명하고 있다. 이태진 교수는 "안중근이 제창하고 한민족이 연면히 이어온 평화주의는 대한민국이 21세기에 나아가야 할 역할 지표를 제시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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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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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ww.jhtoday.net/news/articleView.html?idxno=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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