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년 판본을 텍스트로
장흥문화원(원장 김명환)이 문림의향 장흥 고전 국역 총서 13으로 譯註 무민재집(无㦖齋集)을 발간했다.
김명환 장흥문화원장은 발간사에서 “무민재 선생은 장흥이 낳은 효자요, 향리의 큰 어른이요, 조선말기의 추앙받는 군자였다. 선생의 문집은 현재 계해년과 신사년에 나온 두 판본이 전하고 있다. 이번 역주는 신사년 판본을 텍스트로 하였다”고 썼다.
김성 장흥군수는 “시문을 보면 한 자 한 자 그의 충효와 안빈낙도의 선비정신을 느낄 수 있다”고, 왕윤채 장흥군의회 의장이 “군자로서의 선생의 삶이 남긴 시문에 청아하고 고상한 품격으로 남아 장흥의 선비들의 정서를 보여준다”고 축간에 썼다.
저자인 문취광(文就光, 1752년(영조 28)~1835(헌종 1)의 자는 명진(明進). 호는 무민재(无㦖齋)이다. 본관은 남평(南平)으로 장흥군(長興郡) 늑용리(勒龍里)에서 출생하였다. 시조 다성(多省)의 25세손이며, 삼우당(三憂堂) 강성군(江城君) 문익점(文益漸, 1329~1398)은 15대조이며, 풍암(楓庵) 문위세(文緯世, 1534~1600)는 6대조이다. 고조(高祖) 치욱(致郁, ?~?)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증조(曾祖) 상효(尙虓, 1635~1659)는 증지중추부사(贈知中樞府事), 조부(祖父) 천경(天經, 1669~1749)은 절충장군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龍驤衛副護軍)을 지냈다. 부친 덕우(德遇, 1714~1791)는 호가 농암(聾巖)이다. 모친은 경주이씨(慶州李氏) 세관(世爟)의 딸로 90세에 숙부인(淑夫人)에 봉해졌다.
문취광은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기품이 있었다. 8세에 큰아버지 경학재(耕學齋) 덕중(德中, 1732~1824)에게서 《小學》을 배웠으며, 장차 가문을 크게 일으킬 아이라고 칭찬받았다. 18세에 보성선씨(寶城宣氏) 성표(聖豹)의 딸과 결혼하였으며,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다.
19세에 경북 안동으로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을 찾아가 문하에 들어 학문을 갈고 닦았다. 22세 되던 해 1773년에 향시(鄕試)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지만 과거에 그다지 의미를 두지 않고 부모 형제를 가까이서 모시는 일에 성심을 다하였다. 아버지를 여의고 난 후에 주위에서 과거에 응시할 것을 권하자 ‘과거는 단지 어버이를 기쁘게 하는 일인데, 지금 계시지 않으니 내가 누구를 위하여 과거를 본단 말인가’하고 응하지 않다가 49세 되던 해 1794년 대과(大科)에 합격하였다.
대과 합격 이후에 벼슬살이 한 이력은 기록에 전하지 않아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는 주로 문중의 선조 선창사업에 주력하였으며, 1785년 문익점(文益漸)과 문위세(文緯世)의 서원을 중수하였다. 충청·경상·전라도의 유생과 함께, 상소하여 강성사(江城祠)가 사액(賜額)되었으며, 1798년 호남(湖南) 유생과 함께 상소하여 문위세가 참판(參判)에 추증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1809년 대제학(大提學) 황경원(黃景源)에게 문익점의 묘갈명(墓碣銘)을 부탁하여 개수(改竪)하였고, 1818년 문익점의 《삼우당문집(三憂堂文集)》을 문계항(文桂恒)과 함께 간행하였으며, 다음 해에 문위세의 《풍암선생문집(楓庵先生文集)》을 간행하였다.
중년 이후는 ‘놓아버린 마음을 거둬들인다’는 수방심(收放心)과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다’는 구방심(求放心) 3자에 절실히 기울였으며,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을 좋아하여 일찍이 손에 놓지 않았다고 한다.
1835년 정월에 자식을 모아놓고 전긍임리(戰兢臨履)라 하여 ‘내 나이 80을 넘어 안방에서 생을 마감하려 한다. 이는 우리 모두가 가는 길이라 할 것이다.”라 하여 다리를 모으고 향년 84세로 운명하였다.
1893년에 이창우(李昌祐), 박만원(朴晩源), 조대진(曹大振) 등이 그의 효행을 임금에게 알리자 장흥(長興)에 정문(旌門)이 내려졌고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시문을 엮어 간행한 『무민재문집(无憫齋文集)』 1책이 있다.
문취광의 문집 《无㦖齋文集》은 4대손 문수호(文守鎬)에 의해 초간본 1923년(癸亥)과 중간본 1941년(辛巳) 두 차례에 걸쳐 간행되었다. 생전의 저술은 한우충동(汗牛充棟)을 이룰 정도로 분량이 많았다고 전해지나 대부분 사라지고 구전으로만 전해지는 것을 상황을 후손 수호가 안타깝게 여겨 집안에서 보관하고 있던 묵첩(墨帖), 사장(詞章), 산문(散文), 연보(年譜)를 가려 모아 정리하여 이희겸(李喜謙, 1707~?)에게 보여드리고 목판본 1책 3권으로 펴냈다. 이때가 1923년(계해)이다.
초간본(계해)에는 이도복(李道復)과 이상호(李祥鎬)의 서문(序文)이 실려 있으며, 권1은 저자의 시문을 모아 시(詩) 26편, 서(書) 7편, 행장(行狀) 2편, 발(跋) 1편, 서(序) 1편이 있다. 권2에는 부록(附錄)으로 문취광을 위한 만사 75수, 제문, 행장, 묘갈명 각 1편, 기(記) 2편, 척록(摭錄) 2편이 있다. 권3 역시 부록으로 연보(年譜), 척록(摭錄) 4편이 수록되어 있다. 끝에는 후손 수호의 발(跋)이 있으며, 책 면수로는 149면이다. 초간본은 장흥문화원, 연세대학교 도서관, 고려대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중간본(신사)에는 후손 수호가 종제 권호(權鎬), 정호(定鎬)와 함께 홍종소(洪鍾韶) 선생과 의논하여 초간본의 잘못, 빠진 부분, 겹친 부분, 오탈자를 바로 잡아주기를 부탁하여 초간본과 마찬가지로 목판본 1책 3권으로 펴냈다. 권1에는 시(詩) 31편, 서(書) 7편, 행장(行狀) 2편, 발(跋) 1편, 서(序) 1편이 있다. 권2에는 부록(附錄)으로 만사, 제문, 행장, 묘갈명, 정려서(旌閭序), 정려기(旌閭記)가 있다. 권3에는 연보(年譜)와 척록(摭錄) 5편, 추록(追錄) 13편이 있다. 끝에는 현손 수호의 발(跋) 2편이 있으며, 이는 초간본의 발도 같이 실었다. 초간본과 중간본의 차이점은 홍종소의 서문 1편, 권1의 시 3편, 권2의 <정려서> 1편, 권3의 <추록> 13편이 추가되었다. 책 면수로는 192면이다. 중간본은 전남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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