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문화원

도로개설시의 울력(장흥-남포선 구간의 자울재에서)

 

 

지게와 달구지는 우리 고향을 생각나게 하고

 

 

 

 

 

 

 

 

 

장평면 청룡리 소류지 공사. 장평면 청룡리 마을 주민들은 이렇게 땀흘려 일했다. 순수한 노력, 이때만 해도 농기구외 특별한 장비가 없었다.

 

 

 

 

용산 덕암보 설치를 역설하는 김미식씨, 김용관 지사와 군수가 듣고 있다.

 

 

 

덕암보 공사 시공현장. 1963. 4. 3 착공

 

 

 

 

 

 

대덕면 율지리 100여정보가 홍수로 매몰된 농지를 피해복구하는 광경(사라호)

 

 

 

사촌 분배식 끝나고 대덕사업이 시작된다. 1954년도 안양 사촌 장재도 연륙공사 현장

 

 

 

 

 

 

 

 

 

흥업회에서는 부모형제가 없는 난민을 위해 따뜻한(전인표, 황만일 혼주가 돼서)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1950년대 말 군청내에 있는 공회당에서 장흥군 지활 정착단원 45쌍의 합동결혼식.

 

 

 

 

행사장 근경

 

 

 

행사장 뒤로는 아직도 초가집이 즐비했다.

 

 

 

5.16이후 국토확장 사업의 일환으로 활발하게 전개된 간척사업(대덕자조정착사업 조성농지 분배식에 박정희 대통령 권한대행과 미국 버거대사 참석하였다.)(1962.11.27)

 

 

 

 

안양 사촌 난민정착지 농지분배식. 1954년 시작해 1957년 완공 이후 대덕사업이 시작된다.)

 

 

 

 

 

 

대덕 난민 정착사업장 제방 준공

 

 

 

 

 

 

 

 

 

대덕 덕촌 간척사업장의 군수실에서 당시의 상황을 설명받는 김용관 지사. 당시 본군 출신 김용관 지사에게 관계들은 장흥에 대한 부탁도 잊지 않았다.

 

 

 

선임 김용관 도지사 초도순시중 가내수공업 공장 시찰

 

 

 

흥업회 가내수공업 공장을 보고 나오는 김용관 지사, 김수남 군수

 

 

 

군내 기관장들이 덕촌 자활 정착 사업장을 시찰

 

 

 

장흥읍 송암리( 강진 군동과 경계) 사인바위앞 도로의 범람. 이 곳은 작천 발원의 강줄기가 유치 발원의 본류와 만나는 지점으로 유량이 많았으나 지금은 직강공사로 메워져 버렸다. 당시 주막집이 보이며 아래 사진에서는 방앗간까지 침수되었다.(1971.8)

새암바위 앞 물방앗간이 침수

 

 

 

군계지역인 새암바위앞 도로가 폭우로 침수된 장면

 

 

폭우로 인하여 범람된 관산 고읍천 전경

 

 

 

관산 고읍천이 범람 물바다가 됐다.

 

 

 

부산 유량리의 전파가옥과 세간살이

 

 

 

대덕읍 연지리 세월교의 침수(1971)

 

 

 

장동 구시 방죽 붕괴직전 관련인사들의 현지 확인

 

 

 

 

 

 

 

 

7. 시대따라 변한 농자천하지대본/ 산업

 

 

 

 

 

 

 

 

 

 

장흥보통학교 학생들이 벼를 베는 실습을 하고(1912)

 

 

 

1920년대 만해도 일본인 지주는 흔했다. 우리땅을 빼앗기고 품팔이 하고 있는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 여기에 두 사람은 일인지주, 이 때 우리 품삭이 쌀 반되였다. (건산리 장흥농협 뒤)

 

 

 

일본인 酒井(사가이) 농장(1915과수원 조성되기 이전)

 

 

 

50년대 비료가 없던 시절 분뇨는 농가의 중요한 거름이었다.

 

 

 

농기계가 없던 시절 농부에게 소는 유일한 재산이었다.

 

 

 

제초제가 없던 시절 한 여름 땡볕에서 논메기하는 아낙들

 

 

 

바쁜 하루중에도 농주 한 잔 곁들인 후 바지게를 침대삼아 피로를 풀던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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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읍 부녀 생활개선을 선도해 온 사람들 모임

 

 

 

 

 

 

부녀자들의 생활개선사업으로 추진했던 농촌부녀자들의 활동복 패션

 

 

 

1960~70년 장흥읍 송암리 썩시골 삼애원 정착자 자활 개간구역(2~5)

 

 

 

당시 이 마을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 지금은 의젓한 사회인으로(삼애원은 자활갱생원이다.)

 

 

 

삼애원을 운영한 사람들

 

 

 

남 다른 노력으로 자립. 지금은 넉넉한 생활에 보람있게 지낸다.

 

 

 

1960년대의 우리의 초상. 깡통 모습이 낯설기만 하다.

 

 

 

 

 

6. 나무로 엮은 다리에서 12층 아파트까지/건설

 

 

 

 

 

 

98년 전의 예양강 대나무다리. 나루배와 나루터 주막이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한다.(1897)

 

 

 

장흥교의 개교를 축하하며(1930년대)

 

 

 

옛 동교다리의 모습. 다리 폭은 4m였고 다리 밑으로 옛날 다리인 나무다리 잔해가 보인다.(경문당 인쇄소가 보인다)

 

 

 

박림쏘에서 잉어낚시하는 태공(옛 이야기가 됐다.)

 

 

 

현 천주교 앞 둑길

 

 

 

공사 후 통행 모습(다리 확장 후)

 

 

 

1958년 손석두 국회의원이 선거공약으로 동교확장공사. 정과 망치로 부수는 모습

 

 

 

제방공사되기 전의 예양강 뚝자리

 

 

 

울력으로 쌓은 예양강 제방. 일제는 공사 시작전 근로보국대기를 세워놓고 동방요배를 시켰다.

 

 

 

제방공사 기공식을 마치고 기념사진. 고창석 읍장과 직원들. 일인 추진위원들의 모습도 보인다.

 

 

 

우리고장의 산물을 실어내기 위해 장흥-해창간 도로를 1917년 개설했다. 멀리 사자산이 보인다.

 

 

 

 

 

 

마을별 가구별로 활당하여 자갈 울역을 강요하여 나라의 동맥이라며 관리했다.1950년대의 도로관리를 위해 출력했다.

 

 

 

 

1960년 신흥마을 진입로 확장. 도로 완공 테이프를 끊고 있는 군수와 기관장

 

 

 

 

 

 

 

 

 

 

 

 

 

새마을 사업으로 후손을 위해 진입로를 내던 때 돈을 받지 않는 출력이었지만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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