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장흥읍 석대들 모습. 경운기 없던 시절 비료를 마을로 옮길 때
●마을 부녀회원들이 논보리 수확을 올리기 위해 제초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장흥읍 掛也里
유명했던 부산 자매마을 모시베
집 뒷뜰의 논서밭에 심은 모시를 가지런히 다듬어 밤새껏 동네사람들과 함께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며 실을 내린뒤 온 동네 사람이 모여 마당에서 풀칠을 한 뒤 베틀에 앉아 마무리한다. 장에 내다팔고 혼수감으로도 쓴다. 이제는 거의 볼 수 없는 작업과정이다.
농가부업과 농한기소득을 권장하던 60년대 국민학교와 중학생들에게는 품평회를 열어 표창하였다.-학생토끼(앙고라)기르기-
해장창고 앞에서 근처 노인들을 모셨다. 장흥 장날이면 배가 출항.통영, 삼천포, 부산 등지로 서남부 4개군의 쌀이 운반되고 근처 섬사람들은 그 배편으로 장흥장을 이용했다.
●해창에서 부산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는 쌀장사 아줌마
●베짜기
베틀에 앉아서 베를 짜고 있다. 이 사진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부테허리(부티) 에 몸을 기대고 앉을깨에 앉아 작업을 하는 것이다. 밥댕이에 감은 삼줄이 차츰 조직되어 가는 것을 바라보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
●우리는 착실히 이렇게 살아왔다. 장흥의 어머니, 아버지들. 농한기에 가마니짜기
●1951 장흥읍 해당리
●퇴비를 증산하여 지력을 증진하자는 1964년의 퇴비증산 결의대회
●'퇴비증산운동' 무공해 농산물 생산 이 시대에 깊이 생각해 볼 필요는 없는지. 1951.9. 24 장흥읍 상리
●보람으로 일한 당시의 농촌 지도자들도 이제는 거의 세상을 떠났다(1952. 4. 24 퇴비증산 표창). 장흥읍 해당리 경로회당 앞
●가을 파종을 마치고 괘야리 부녀조합원 일동(1953. 7. 3)
●순지근로청년단원들(1950년 후반)
●옛 대덕장터에서 조(서숙)를 따고 있는 옛모습. 논둑에까지 조를 심어 식량증산에 노력하던 때
●우리땅 우리손으로, 동네 청장년이 품앗이를 하였다. 이때만 해도 농약 생각도 못하고 이때는 논에서 미꾸라지, 붕어가 자랐다.
●퇴비증산 총궐기 공동작업(1951. 9. 24 장흥읍 해당리)
각 마을별 영농품평회와 지도교육
●동네 최장수 어른께 권주
●농한지 활용을 잘하여 양곡증산에 기여한 공로로 도지사로부터 장흥군이 받은 우등상(1963)
●식량증산을 위해 행정력을 강화하던 60년대
●월남 피난민의 정착기반을 구축한 이준식 군수의 공을 찬양하는 신용우지사(장평 경림마을에서)
●초도 순시차 장흥에 온 신용우 지사. 김수남 군수
농가부업으로 양잠을 장려하던 시절
●양잠특설지구와 뽕나무밭. 장편면 봉림리 총농가 117호중 70%에 이르는 83호가 130반 78,500주를 식상하였다(1963)
●장평면 봉림에 산지를 개간하여 뽕밭을 조성
●1964년 산림녹화를 위해 읍면 산림계장이 한자리에 모여 억불산 기슭의 식수현장을 방문했다.
●농촌의 고리채를 청산하기 위해 마을단위 리동조합을 육성하던 시절 엄을준 조합장.
●고리채 청산 마을단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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