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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열린자료실(DB)/■장흥 100년사(1996년)

사진으로 보는 장흥 100년사(31p~36p)

by 장흥문화원 관리자 2019. 3. 22.

2. 격동의 현장, 부침하는 인심/ 정치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때, 대덕, 관산, 회진 주민들이 해태를 팔아 성금을 모금하여 제작된 함상전투기.

군부(해군성)에서 엽서로 제작하여 보낸 사진.

1932년 경북도 평의원 문아무개가 육군기 1대를 헌납한 이래 '1군 1기 헌납운동'이 전개되어 강제기부로 돈을 모았고 일제는 중일전쟁
(1937. 7.7 개전)과 태평양전쟁(1941`. 12. 8개전)을 일으키면서 강제모금은 물론 물자 공출까지 실시한다.

 

●1937년 민심 선도를 목적으로 활동한 연극패

 

●태평양 전쟁 때 일본의 홍콩함락 축하 가장행렬을 하며 징병에 참여한 자들의 공훈을 추세기며 징병을 강요했다.
태평양전쟁은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미국의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함으로써 일어난 전쟁으로 일본과 미국 영국 네덜라늗 등의 연합국 사이에 일어났다. 주로 남서태평양과 남동아시아를 중심으로 싸웠고 일제는 우리나라에서 애국자 검거,징용,강제지원병, 공출,일본군 위안부(정신대)등 학정을 멋대로 일삼았다.

 

●일제는 태평양 전쟁 막바지에 내선일체를 내세우고 국민 총동원령을 내려 조상 대대로 쓰던 유기그릇까지 모두 공출시켰다
(기양리에서 공출시킨 유기들)


 

광복직후 청년단들
1945년 해방청년단원이 광주에서 개최한 씨름대회에 참가하여 황소 두마리를 부상으로 받았다, 장흥읍사무소 벽변에는
건국준비위원회의 간판이 붙어있고 현재까지 역사를 증명하는 당시의 소나무는 소년기였다.

 

●광복 이듬해 장흥초등학교에서 열린 3.1운동 기념행사(1946. 3.1)
1919년의 3.1운동은 일제지배하 한국민족 최대의 독립운도이었다. 이 운동을 통하여 우리민족은 한국민족의 독립의지를 내외에 과시하였다.
전국 210여군데서 수백만명이 참가했다. 전남지방에서도 수많은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는데, 다른 지역보다 약간 늦은 3월10일의 광주시위를
기점으로 전남 각지로 확산되었다. 장흥에서는 천도교;교구장인 김재계 선생이 교구원인 김재반, 황생주.황업주 등과 함께 시위를 직접준비하여
3월 15일 읍내시장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4월초까지 각 면에서도 시위가 전개 되었다. 사진은 광복직후인 1946녕의 3.1운동
기념식으로 당시는 좌우의 대립이 심하지 않았던지 함께 참여하였다. 지금은 세아름이 넘는 큰 프라타나스나무는 아주 작았고 담장이 둘러지지 않은 학교주변으로 구경꾼도 보이고 시내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금의 충혼탑자리에 기공식을 하고나서(남산공원)
신사란 일본 왕실의 조상이나 신대의 신을 모신 사당이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통치할 떄 종교와 사상자유를 억압하고 자국의 정책을 감행하기 위한 수단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이것을 반대한 많은 종교인, 우국지사가 참혹한 희생을 당했다. 보통 각 고을의 역사적인 상징물을 헐고 세웠다.

 

 

●우리는 이렇게 강요 당해야만 했다. 당시 공무원 신사참배 광경
태평양전쟁 기간중인39년부터 해방되던45까지 7년동안 일본등에 끌려간 한국인의 숫자는1백37만명.한국 국내에서 강제노동등에 동원된 수는
4백50마.군인.군속.정신대로 연행된 사람이 57만명등 6백만염명이 일제에 의해 동원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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