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문화원

 

●1938년 장흥의 경제를 주도했던 상공인들
김대준 장순남 이춘선 김의택 오부장 안부장 노무라 구니고 김남식 박제국 문재환

 

 

●1928(단기 4261) 광주 무덕전 앞, 장흥 각면 행정주무유지 지도자 기념

 

 

 

●일제시대 장흥읍 위원
일제 강점기에 최하금 행정기관인 邑의 의결기관으로 邑議會를 두었다.
1917년에 面중에서 비교적 인구가 많고 상공업이 발달하여 도시적인 면모를 갖춘 곳을
指定面이라 하다가 1931년 총독부령 제11호로 邑面制를 실시하면서 책임자를 읍장이라고 의결기관으로 邑會가
구성되었다. 근대적인 의미에서 읍의회 구성은 1952년 〈지방자치법〉에서이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 축하행렬(木炭車)
(1948.8.15 장흥읍사무소 앞}
1945년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자 포츠담 선언데 의하여 광복되었다. 얄타협정에 의하여 북위
38도선을 두고 북한은 소련군, 남한은 미군이 진주하여 국토는 양단되고 군정이 실시되었다. 미국의 제의로
1947년 11월 제2회 유엔총회에서 우리나라 독립문제를 토의하게 되자, 유엔한국위원단을 조직하여 이 위원단의
감시하에 자유선거를 실시랗ㄹ 것을 결의 하였다. 북한의 소련 점령 지역에서는 이를 거부하여 남한에서는 유엔
 감시하에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실시,5월 31일 국회가 열리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내외에 선포
하였으며 초대 대통령에는 이승만이 취임했다. 전국 각지에서 정부수립기념 축하행사가 열렸고 장흥에서는 장흥
읍사무소앞(칠거리)에서 열렸다. 중앙의 차량은 드럼통에 든 숯을 태워 그 힘으로 움직였다.

 

 

 

 

●장흥초등학교에서 열린 이승만 대통령취임 축하대회(1948.8)
유엔의 결의에 의해 1948년 8월 15일 남한지역만의 총선거가 실시되고, 5월 31일 최초의 국회가 개원, 7월 17일
헌법을 공포했다. 7월 20일 국회에서 실시한 정,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영이 당선, 7월 24일
취임식을 갖고 거국내각을 구성했으며 8월 15일 광복 3주년을 맞아 정부수립 선포식을 했다.

 

 

 

●국회 뿌락치 사건 설명회와 군민성토대회(1945. 5. 20 장흥읍사무소 앞)
1949년 4월 이른바 남로당 프락치(공작원)로 제헌국회에 침투 첩보 공작을 한 혐의로 당시 국회부의장 김약수 등
13명이 체포된 사건,이들 진보적 소장파들은 외국군의 완전 철수, 남북정치회의 개최 등<평화통일방안> 7원칙을
제시했는데 평화통일, 자주통일을 불온시하고 북진통일만 주장하던 이승만 정권은 이들이 남로당 공작원과 접촉,
정국을 혼란시키려했다는 혐의를 씌워 검거했고 전국적으로 성토대회를 유도했다.

 

 

 

 

 

●장흥중학교 교정에서 열린 "국민회의 북진통일결의대회"(국민회 회장 김정현 부회장 진남용)
광복직후 남한에서 좌우익의 대립을 결정적으로 격화시킨 것은 신탁통치문제로서 이를 둘러싸고 이승만계열은
신탁통치반대, 남한단독정부수립을, 김구계열은 신탁통치반대, 남북통일정부수립을, 좌익계열은 신탁통치찬성,
신탁통치보류, 통일된 임시정부수립을 각각 주장했다. 특히 이승만 중심의 우익세력은 1946년 6월 3일 '정읍발언'
이후 남한단독정부수립을 본격화했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 반군 소탕작전을 위한 군병력(유치 송정리에서)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20일 여수에 주둔중이던 국군 제 14연대에서 일어난 반란사건이다. 그해 4월 3일 제주도에서
남한 단독정부수립을 위한 5.10선거에 반대하는 무장봉기가 일어나자 이를 진압키 위해 여수주둔 14연대를 파견키로
하자 좌익계 군인들이 출동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었으며 반란군은 지리산일대로 들어가
본격적인 유격대(빨치산Partizan)활동을 전개해것이 소설 태백산맥이다.

 

 

 

●1948년 여순사건직후 11월 국군 20연대 1중대원들이 반군 소탕작전을 위해 장흥에 왔다(읍사무소 뒤 예양강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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